반말도 아니고 존댓말도 아니다. 그래서 더 강하게 들린다. 별 볼일 없을 것 같은 주인공 황동만이 자신을 무시하며 설교하려고만 드는 최 대표를 향해 폭발하며 외치는 절규의 말이다. 심취해서 보고 있는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얘기다.
주인공 황동만은 사고뭉치다. 다친 고양이 수술을 위해 겁도 없이 사채를 쓰는 남자, 20년간 시나리오를 쓰고 있지만 막판에서 번번이 떨어지는 남자, 영화판에서 잔뼈가 굵은 친구들이 하나씩 둘씩 출세할 때마다 속이 소란해지며 불안한 남자, 그래서 가위도 잘 눌리는 남자, 그 불안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정신과를 다니면서도 영화의 꿈을 버리지 못해 영화판을 빙빙 도는 남자, 그래서 종종 위악적으로 구는 남자!
“잘나서 나를 증명할 수 없을 때는 망가져 나를 증명한다!”
황동만의 철학, 아니 행태다. 그러니 얼마나 망가지는 일이 자연스럽겠는가. 그 황동만의 매력은 뭘까. ‘낄끼빠빠’가 안 되는 그는 아무도 부르지 않는데 친구들 사이에 끼고, 아무도 반기지 않는데 끊임없이 떠들어대고, 그러다가 폭발해 진심으로 싸운다. ‘무직’이라는 말에 가장 심장이 빨리 뛴다는 그는, 맞다, 덜 자랐다.
최고의 배우 오정희가 그의 진면목을 단박에 알아본다. 언제나 화려한 여주로서 세상 꼭대기에서 내려다보기를 즐기는 오정희는 몇십 년 만에 만난 딸이 황동만과 사귀는 것을 보고 일침을 가한다. “무능한 남자는 거세당한 남자와 같다, 네 눈에만 괜찮은 남자니 헤어지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엄마의 빈자리로 인해 생긴 두려움과 싸우며 단단해진 딸은 단호하다.

평소 변은아는 느리고 조용하다. 그래서 존재감이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종종 자기를 향해 선을 넘는 사람들을 두고만 보지 않는다. 조용한 사람이 당차면, 그렇다, 힘이 있다. 그녀는 9살 때 엄마에게서 버림을 받았다. 삶에는 늘 바람이 부는 법이지만 감당하기 힘든 비바람을 만나 두려움을 짊어지고 생존해야 했던 아이는 종종 자기 속으로 숨어들어 자기를 지켰다. 그 덕에 그녀는 타인을 관찰하는 힘을 길렀고, 자기의 힘을 아는 청년이 되었다.
그런 그녀가 황동만에게서 본 것은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 동물적인 감각이 있다는 것. 그녀가 말한다.
“감독님은 천 개의 문이 다 열려있는 인간인 것 같아요. 한 개의 문도 열어보지 못한 인간이 쓴 글을 보면 지겨워요.”
그런데 왜 황동만의 글은 늘 2% 부족했을까. 변은아에게 진심인 황동만이 변은아에게 고백한다. 주인공은 나보다 멋져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변은아가 말한다.
“감독님이 훨씬 멋져요. 훨씬 동물적이고 훨씬 따뜻하고.”
멋져 보이려고 꾸며 만든 주인공은 멋지지 않다. 멋진 인간은 멋져 보이려 하지 않는다. 멋져 보여야 한다는 관념이 감옥이 되어 멋진 ‘나’를 가둔 것이다. 털어내야 하는 것, 관념이다. 관념을 털어내지 못하면 덩어리진다.
사람이 외모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감정 덩어리로 보인다는 변은아는 아이들이 예쁜 이유를 “감정이 덩어리지지 않아서”라고 말한다. 그런 그녀는 덩어리진 감정을 직시하는 여인이다. 덩어리진 감정은 눈덩이처럼 커져 그 사람을 삼킨다.
젊은 시절 도스토옙스키는 자주 이렇게 말했단다. 인간이라는 수수께끼를 풀고 싶다. 드라마 작가 박해영은 그 인간이라는 수수께끼를 관계의 상처를 통해 보고, 보여주고, 풀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궁금하다. 인간이 수수께끼일까. ‘나’라고 하는 존재가 수수께끼일까.
푼다는 것은 맺혔다는 뜻이기도 하다. 맺히고 덩어리지게 하는 것, 우리는 그것을 상처라 부른다. 불안, 두려움, 우울, 분노, 절망, 의심, 경멸…. 나는 주로 어떤 감정의 창으로 세상을 보고 있을까. 당신은 어떤 감정의 창이 익숙한가.
※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 journalist@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