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일이 인천 대신 전북으로 마음을 돌린 데에는 최강희 감독의 ‘따뜻한 말 한 마디’ 때문이었다고 한다. “마음고생 그만하고 전북에서 뛸 수 있을 때까지 마음 편히 뛰어라”는 내용은 김남일의 얼어 있던 마음을 일시에 녹인 힘으로 작용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서 대답하는 ‘김남일식’ 어법은 여전했다. 순간 순간 빵빵 터지는 대답에 폭소와 미소가 공존했던 시간들 또한 그대로였다.
김남일은 자리에 앉자마자 “뭐가 바쁘다고 이렇게 빨리 찾아왔느냐”며 특유의 반어법적인 말투를 내놓는다. 김남일과 인터뷰하려면 제대로 정신줄 잡고 있어야 한다.
김남일이 전북 현대 유니폼을 입었다. 8일 브라질로 전지훈련을 떠나기 전날, 전북 봉동에 위치한 클럽하우스에서 김남일을 만났다. 최준필 기자 choijp@ilyo.co.kf
―전북현대 클럽하우스에서 김남일 선수를 보니까 기분이 묘하다. 이곳 식당 밥이 맛있어서 그런가? 얼굴색은 좋아 보인다.
“어휴, 속을 까보면 또 달라. 클럽하우스는 최첨단 시설에다 최적화된 환경을 구축해 놨는데 이상하게 잠을 못 자겠더라고. 왜 그럴까? 하고 따져보니까 방의 창문을 열면 바로 위가 묘지인 거야. 어떤 분의 묘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묘지를 본 이후론 쉬이 잠을 이룰 수가 없어. 누가 밖에서 창문을 두드리는 것 같고…. 내가 소리에 민감한 편이거든. 조금만 소리가 나도 깨는 타입인데, 환청이 들리는지, 진짜 누가 두드리는 건지, 잘 때마다 창문 밖이 신경 쓰여.”
―그렇게 신경 쓰인다면 방을 바꿔달라고 하면 되지 않겠나.
“그럴까? 그럼 누구 방으로 바꿔달라고 하지? 음…, 감독님 방이 낫겠네. 감독님 방의 위치가 아주 좋거든. 감독님 방에선 선수들 중 누가 밖으로 나가는지 다 보여. 반면 내 방에선바로 묘지가 보이는 거고.”
―지난해 오픈한 전북현대 클럽하우스는 나도 이번에 처음으로 방문했다. 입이 딱 벌어 질 정도로 엄청난 시설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건물은 최고급인데 주변엔 아~무 것도 없어. 뭐 어느 정도 예상은 했는데, 이 정도로 허허벌판일 줄은 정말 몰랐네.”
―숙소에서 생활할 예정인가.
“무슨 소리야. 내가 나와야 어린 애들이 편하게 지내지. 인천에 있을 때도 그랬지만, 여기서도 생활은 다른 곳에서 해야 할 것 같아.”
―가족들은?
“여기까지 못 오지. 아내가 왔다 갔다 할 수밖에. 감독님은 체질이 그러신 건지 숙소에서 잘 지내시대. 하긴 숙소 생활만 하셔도 심심할 틈이 없으셔. 팬들이 무진장 찾아오거든. 여성 팬들이 나타났다 싶으면 대부분 감독님 팬들인 거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이동국이 있는데? 참, 감독님의 팬 관리, 팬 서비스가 아주 끝내줘. 중심이 7대3 정도?”
―무슨 중심?
“(미소를 지으며) 팬들을 챙기는 게 7이라면 선수는 3 정도?”
―봉동에서 3일 지낸 선수가 마치 다 본 것처럼 얘기한다.
“에이, 3일 정도 있으면 분석이 끝나. 그런데 최 감독님은 재밌는 분이야. 헤어스타일은 더 그렇고.”
―부평고 시절, 최 감독이 수원삼성 코치였을 때 김남일을 스카우트하려고 직접 경기장까지 찾아갔다고 하시던데….
“맞아. 그랬었지. 그때 최 감독님과 인연 맺고 프로 생활을 일찍 시작할 뻔 했었어. 결국엔 한양대로 진학했지만. 가끔 그런 생각을 해봐. 내가 만약 대학을 포기하고 프로로 직행했더라면 어떠했을까 하고.”
최강희 감독과 선수 생활의 전반기가 아닌 후반기에 만나게 된 김남일. 좀 더 좋은 모습으로 만났더라면 하는 바람이 김남일의 마음을 자극시킨다. 최준필 기자 choijp@ilyo.co.kf
―최 감독 설명으로는 당시 김남일이 수원으로 왔더라면 고종수랑 재미있게 놀았을 것이라고 하더라.
“하하, 맞아. 만약에 그랬다면 종수랑 많이 놀러 다녔겠지. 난 종수보다 독하지 못해서 2년 정도 프로 생활하다가 이름도 없이 사라졌을 거야.”
―그런 최 감독을 지난 해 대표팀에서 다시 만나게 됐다. 고등학교 시절 만났던 최 감독과 대표팀에서의 최 감독, 어떤 차이가 있던가.
“차이? 있지. 영감님이 되셨으니까.”
―본인이 아저씨 된 건 생각 안하고?
“난 아저씨이고, 감독님은 영감님이시니까 감회가 새롭지. 당시 상황이 좋지 않았어. 대표팀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크지 않았는데, 결국엔 들어가게 됐고, 들어가서도 마음먹은 대로 잘 안됐잖아. 부상으로 뛰지도 못했으니까.”
―당시 어떤 심정이었을지 상상이 간다. 최 감독도 대표팀 감독으로 마지막 3연전을 앞둔 상태에서 히든카드로 김남일을 발탁한 터라 나름 기대가 컸을 것이고, 이로 인한 부담이 감독도, 또 선수도 비슷하게 영향을 받지 않았겠나.
“그러니까 얼마나 힘들겠어. 그 상황이. 특히 대표팀이 경기 결과에 따라 본선 진출을 하느냐, 마느냐 했기 때문에 더더욱 부담스러웠지. 나이가 거의 40이 다 된 선수(37세)가 뒤늦게 대표팀에 들어가서 젊은 선수들과 어떤 결과를 이끌어낸다는 게 쉬울 리가 없잖아.”
―이전 남아공월드컵 당시, 월드컵 이후 대표팀에서 은퇴할 계획이라고 밝혔던 것 같은데.
“그랬었지. 그때는. 그래서 언제부턴가 하루하루가, 한 경기 한 경기가 소중했고 절실했어. 매 시즌마다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임했었고. 대표팀, 월드컵은 남아공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는데, 최 감독님이 덜컥 불러주신 거잖아. 부담만 잔뜩 안고 파주에 들어가서 감독님과 면담을 했는데, 감독님이 그러시더라고. ‘주위의 시선, 나이와 관련된 기사들에 신경 쓰지 말라’고. 그리고 ‘앞으로 대표팀이든, 선수 생활이든, 네 입으로 먼저 그만두겠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참으로 의미있는 말씀이셨어. 바로 그런 최 감독님의 마인드가 전북으로 향하게 된 이유 중 하나야. 주위에선 더 이상 선수생활에 대한 미련을 버려라, 이젠 편하게 지내라며 은퇴를 종용했는데, 감독님이 나이 든 선수들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갖고 계신 지 아니까 내 마음이 움직인 거야.”
―궁금했던 질문이다.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인천과의 재계약을 안 한 건가, 못한 건가.
“뭘 또 이렇게 대놓고 물어보시나. 기분 꿀꿀하게. 서로 최선을 다했어. 인천도, 나도. 유종의 미를 거두려고 했지만 잘 안됐지. 아쉬운 부분도 있어. 난 인천에서 선수생활 하다가 지도자 과정 밟으면서 오랫동안 고향 팀에 남고 싶었거든. 그게 잘 안되더라고. 재정적인 어려움을 토로하니까 내가 모른 척 하고 버틸 수가 없었어. 내 연봉이면 어린 선수들을 더 많이 데려올 수 있잖아. 마치 내가 그들의 앞길을 막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
인천과의 재계약 문제로 갈등이 깊었던 김남일은 최강희 감독으로부터 따뜻한 조언을 받고 마음이 움직였다고 말한다. 최준필 기자 choijp@ilyo.co.kf
―전북 현대의 조건은 마음에 들었던 건가.
“아니, 조건은 인천이 더 좋았지. 중요한 건 돈이 문제가 아니었어. 지금은 자세히 말하기 어려워. 이젠 남의 팀 일이니까. 재계약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최 감독님의 전화를 받게 됐어. 식사나 하자고 하셔서 어렵게 자리에 나갔는데, 감독님의 ‘따뜻한 말 한 마디’가 또 거기에 있더라고. ‘아, 날 인정해주는 팀이 있구나’ ‘나이 먹었다고 태클 걸지 않고 경험으로 승화시키는 팀이 있구나’ 이런 생각들이 들면서 마음이 뜨거워지더라고.”
―최 감독이 큰 역할을 한 셈이다.
“지도자들이 제일 힘들어 하는 부분이 선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거라고 해. 보통 일이 아니니까. 그런데 그 분은 너무 쉽게 하셔. 무슨 비법이 있는 걸까? 적절히 농담을 섞어서 하시는 말씀들이 대박이야. 감독님과 얘기를 나누다보면 마구 빠져들어. 그래서 ‘소녀팬’들이 봉동까지 찾아오는 건가?”
―전북 현대 선수로 최 감독을 만났을 때 어떤 얘기를 하시던가.
“무조건 편안하게 하라셔. ‘김남일 영입은 우승하기 위해서’라고 언론에는 말씀해 놓으시고선. 인천보다 전북이 더 힘들 거라고 생각해. 기대감 못지않은 압박감 때문에. 인천은 만들어가는 재미가 있었거든. 물론 우승을 하면 좋겠지만, 지금 당장 우승을 해야 하는 부담은 덜했어 인천은. 그런데 나도 우승을 하고 싶어. K리그 우승 경험이 한 번도 없기 때문에 축구 그만두기 전에 우승은 꼭 해보고 싶더라고.”
―이전 수원에서 J리그로 떠났을 때도 수원 팬들은 ‘배신’ 운운했었다. 인천 팬들 일부는 돈을 좇아서, 팀과 팬을 버렸다고 말하더라.
“어휴, 제발 그런 말 좀 안했으면 좋겠어. 물론 이해는 해. 보이는 부분만 믿으려 하니까 어쩔 수 없는 부분이겠지. 난 수원 팬들이 나를 향해 ‘배신자’라고 하는 지도 몰랐어. 인천-수원 전에 수원 응원석에서 ‘김남일 배신자’라고 소리쳤다고 하더라고. 그래도 난 수원 서포터스들을 향해 인사를 했어. 왜냐고? 내가 배신자라고 소리 들을 만큼 잘못한 게 없으니까. 그들은 언론을 통해, 또는 구단 관계자의 입을 통해 나온 얘기만 들었으니까 날 이상한 놈으로 봤겠지. 인천도 마찬가지야. 인천 팬들도 보이는 것만 보고 있으니까. 그래도 난 올시즌 인천과의 경기가 벌어질 때 응원석으로 찾아가 인사할 거야. 떳떳하니까. 이럴 때 하는 말 있잖아.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는 것이라고.”
―김봉길 감독과도 좋은 인연을 맺었는데, 헤어진 데 대한 아쉬움이 클 것 같다.
“난 감독님이 코치하셨을 때가 더 좋았어. 코치보다는 형이라는 생각에 스스럼없이 다가갔으니까. 그런데 감독이란 자리가 어쩔 수가 없나봐. 옆에서 보기만 해도 골치가 아파. (최)용수 형, (황)선홍이 형, (홍)명보 형 등등 감독하는 선배들 보면 흰머리가 눈에 띄게 늘었어. 아무나 할 수 없는 자리이고,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직책이라 고생을 할 수밖에 없나봐.”
―골치 아파하는 사람이 지난 연말 파주 NFC(국가대표팀 트레이닝센터)에 들어가서 지도자 교육 연수를 받았나.
“그거야, 다들 하는 거니까. 나 말고도 (김)병지 형, (김)상식이 형, (이)을용이 형, (설)기현이 등 많았는데 뭘. 지도자 교육은 미리 준비해 놓는 차원일 뿐이야. 그런데 하루 12시간 수업은 진짜 힘들더라. 공부 안 하던 사람들이 필기하고 암기하고 코칭수업하며 3주를 버텼으니 대단한 거지. 요즘 선수들 머리도, 능력도 뛰어나잖아. 그런 선수들을 리드하려면 지도자는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해. 만약 내가 그 길을 가게 된다면 많이 채워서 할 거야. 지금은 완전 꽝이고.”
박충균 코치와 함께 훈련에 참가하고 있는 김남일. 박 코치는 김남일의 몸 상태가 70% 정도 회복됐고, 남은 부분은 브라질 전지훈련 동안 채워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준필 기자 choijp@ilyo.co.kf
―결혼 후 김남일이 달라졌다고들 하던데, 진짜 그런 것 같다.
“왜? 더 재수 없어졌어?”
―그게 아니라 한결 여유 있어진 모습이다. 이전의 김남일은 인터뷰할 때 편한 취재원은 아니었으니까.
“나를 너무 띄엄띄엄 봐서 그래. 정이 많은 반면, 그 정을 빨리 뗄 정도의 차가움도 있어. 결혼하고 아이 아빠되고 하니까 모난 곳도 둥글둥글 해지고, 웬만한 일은 농담하며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도 생겼어. 나도 나이 먹은 거지 뭐.”
―지금 모습에선 2002년월드컵 이후 박지성과 함께 폭발적인 인기를 피해 ‘어둠의 세계’로만 돌아다녔다는 당시의 김남일을 떠올리기가 어렵다.
“그게 벌서 10년도 넘었네. 재밌지 뭐. 그때의 나라면 지금 최 감독님을 찾는 ‘소녀팬’들이 나한테 더 많이 왔을 텐데. 그때 지성이, (이)을용이 형, (안)정환이 형 등과 어울려 다녔던 기억을 잊지 못해. 아주 환상이었지.”
김남일이 속한 전북 현대는 동계전지훈련을 위해 1월 8일 약 한 달간의 일정으로 브라질로 출국했다. 출국에 앞서 김남일은 “브라질을 소속팀이 아닌 대표팀으로 가고 싶었는데”라는 말로 폭소를 터트리게 만들었다.
※ 김남일과의 인터뷰 <2>에선 ‘이동국과 한 팀에서 뛴다는 건’이란 내용이 이어집니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