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정신이 들었다.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패턴을 뜨고 손으로 모든 것을 봉제해 만든다는 오트쿠튀르. 미리 만들어진 옷이 있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대한민국에 진정한 오트쿠튀르는 자신밖에 없단다. 거침없는 자신감이다. 그는 소위 ‘가봉’이라는 것도 하지 않는다. 몸의 치수를 잴 때부터 완제품을 염두에 둔 완벽한 입체재단을 머릿속에 두고 있기 때문이란다.
아이비로 온통 뒤덮인 2층 돌집인 그의 의상실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올리비아 핫세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아름답다. 70년대 후반, 양장점으로 떼돈을 벌 당시 일본책방이었던 80년 된 적산가옥을 구입해 직접 개조했다는데 솜씨가 여간이 아니다.
▲ 김훈은 무명천 위에 노을진 가을 저녁빛을 고스란히 살려냈다. | ||
여기에서 그는 특별한 날 가까운 고객과 친구들에게 음식과 차를 대접한다. 음식장만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그는 직접 송어회와 농어회를 쳐 낼 정도로 고수인데, 나물무침 하나에서도 느껴지는 손맛이 끝내준다.
지난해 12월, 대통령선거가 막바지로 치닫던 때, 그날도 그랬다. 대구에서 세 번째 부자라는 고객이 또 다른 고객 두 분과 함께 옷을 맞추겠노라며 찾아왔다. 그는 그의 옷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정성껏 음식을 장만했다. 이때 어찌 술을 빼놓으랴. 알싸하게 취한 즈음 그의 고객은 붉은 햇살로 ‘겁나게’ 물든 노을진 가을 저녁 빛으로 염색을 해달라는 특별당부도 잊지 않았다.
김훈은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할머니들의 장롱을 뒤져 찾아낸 수십 년 된 무명천을 직접 염색해 한 땀 한 땀 바느질로 옷을 만드는 솜씨꾼이다. 미니멈 한 벌 2백만원이라는 그의 옷은 주문이 까다로워질수록 1천만원대를 훌쩍 상회하기 일쑤. 붉게 노을진 가을 하늘 빛이라… 제대로 된 작품을 주문한 것이다.
그는 광주의 작은 아파트 한 채 정도 값은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술이 ‘웬수’였다. 정치쪽으로 화제가 돌자 김훈은 호탕하게 “노무현이 당선돼야 한다”고 외쳤다. 다음날 주문은 취소됐다. “김훈 하면 광주 디자이너인 줄 다 아는데 그 옷을 대구에서 입을 수는 없다”는 게 취소의 변.
무명이라는 한정된 재료를 온갖 자연색으로 염색해내는 그의 옷은 비쌀 수밖에 없어 주고객은 김훈 마니아나 상류층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어떤 마니아들은 그의 옷을 입기 위해 계를 들기도 한단다. 그런 그에게 예술작업하듯 옷을 만들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존심과 생계 사이에서 번민도 클 듯, 취소된 옷 세 벌이 못내 아쉬운 눈치다.
필자는 그를 위로할 말을 찾았다. “오히려 잘 됐어요. 부자라는 소리 아무나 듣나요. 디자이너의 정치색을 문제삼아 옷을 취소하다니요. 아마도 광주 출신 디자이너의 옷을 대구시내에서 입고 다니지 못할 만큼 떳떳치 못하게 돈을 벌었나 보죠. 졸부가 김훈 옷을 입지 못하게 된 것이 다행이지요.” 그날 마신 보해양조에서 제조한 ‘천년의 아침’은 유난히도 씁쓸했다.
김행 서령창작(주) 대표이사 청주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