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채 아무개 씨 전부인의 청부를 받고 납치·살인극을 벌인 20대 3명이 지난 4일 현장검증을 했다. 2차 범행장소인 서울 남현동의 한 아파트에서 채 씨를 범행차량에 태우는 과정을 재연하는 모습.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그러던 지난 연말 채 씨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새로 제작하는 예술영화감독 자리가 있으니 만남을 원한다.”
그간의 시름을 싹 잊게 할 만큼 기쁜 소식에 채 씨는 아무런 의심도 할 수 없었다. 안부를 묻는 가족들에게도 ‘10억 원 규모의 영화를 맡게 될 것 같다’며 자랑을 아끼지 않았다.
영화 관계자들과 만남을 약속한 지난 4일 오후 채 씨는 서울 관악구 낙성대 근처의 한 카페를 찾았다. 한겨울이었지만 따뜻한 날씨 덕분에 길거리엔 사람들로 붐볐으나 유독 카페는 한산했다. 자신을 영화관계자로 소개하는 이 아무개 씨(27)와 일행 2명만이 채 씨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짧은 대화를 나눈 뒤 “영화사 이사가 직접 만나고 싶어 한다”며 이동을 부탁했다.
채 씨가 미리 준비된 차량에 올라타자 이 씨 일당은 본색을 드러냈다. 알고 보니 이 씨는 ‘돈을 받아 달라’는 의뢰를 받고 의도적으로 채 씨에게 접근을 한 것이었다. 카페가 한산한 이유도 4시간에 20만 원을 주고 통째로 빌렸기 때문이었으며 차량도 남의 번호판을 훔쳐 단 대포차였다.
와이어타이로 손발이 묶인 채 씨는 40여 분을 끌려 다니며 탈출 기회를 엿봤다. 이 씨 일당은 경북 안동의 한 폐가로 가기 위해 고속도로를 이용했는데 화장실이 급해져 용인휴게소에 잠깐 정차를 시도했다. 그 순간 채 씨는 문을 열고 탈출을 시도했는데 손발이 자유롭지 못한 탓에 금방 잡히고 말았다. 하지만 “살려 달라”는 채 씨의 비명을 주변 사람들이 듣고 경찰에 신고를 하면서 대낮 추격전이 시작됐다. 신고 내용은 ‘여러 명의 사람이 남자 한 명을 납치한 것 같다’는 것이었다.
마침 고속도로를 순찰하던 경찰차가 곧바로 이 씨 일당을 찾아냈고 몇 차례 “정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 씨 일당은 이를 무시하고 시속 150㎞가 넘는 속도로 차선을 넘나들다 사정이 여의치 않자 갓길로 질주했다. 이에 경기, 강원, 충북지방경찰청까지 동원된 대규모 추격전이 벌어졌고 장장 30분이 넘게 광란의 질주는 계속됐다.
한순간에 고속도로를 아수라장으로 만든 이들은 경찰이 공포탄을 쏘고야 중앙고속도로 남원주요금소 인근에서 멈춰 섰다. 하지만 채 씨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현장에 출동했던 한 경찰관은 “피해자는 검은색 안대로 눈이 가려져 피를 많이 흘린 상태로 숨져 있었다. 밖으로 탈출하려는 과정에서 이 씨에게 흉기로 허벅지를 찔려 과다 출혈로 사망한 것 같다”고 말했다.
간단한 조사 후 경기 용인동부경찰서로 이송된 이 씨 일당이 말하는 범행 동기는 충격적이었다. 전과도 없는 초범이 납치에 살인까지 벌인 이유는 “돈 1억 원을 받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었던 것. 주진화 용인동부경찰서 형사과장은 “생활고에 시달리던 이 씨는 지난해 9월경 돈을 받아 달라는 한 여성의 의뢰를 받고 유흥업소 영업상무로 일하며 알고 지냈던 유 아무개 씨와 정 아무개 씨를 범행에 함께 끌어들여 사전에 공모한 것으로 밝혀졌다”며 “우선 180만 원만 받고 일에 착수한 이 씨는 정 씨에게는 일당 50만 원을, 유 씨에겐 빌려준 1000만 원을 안 갚는 조건을 내걸었다”고 말했다.
채 씨와 전 부인 이 씨는 지난 2009년 결혼식을 올렸으나 혼인신고는 하지 않은 사실혼 관계로 지냈던 것으로 조사됐다. 하지만 그 관계도 오래 지속되지 않았고 결혼 4개월 만에 별거를 하게 된 두 사람은 1년 전부터 ‘남’으로 살기로 합의한 상태였다. 문제는 ‘돈’이었다. 전 부인 이 씨는 “혼수비용과 위자료 등 1억 원을 받을 게 있다”고 주장했는데 말이 통하지 않자 청부를 맡기기에 이르렀고 결국 살인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채 씨의 유족들은 이 씨의 주장에 정면 반박하고 나섰다. 유가족은 ‘채 씨가 전 부인에게 돈을 빌린 적이 없는데 왜 거액을 빌린 것처럼 말하느냐’며 경찰서에서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 오히려 채 씨가 전 부인에게 받을 돈이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유가족에 따르면 전 부인 이 씨는 서울의 한 오케스트라 음향감독으로 지내며 채 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6개월이 지날 무렵 이 씨는 서울 모처에 커피숍도 개업했는데 당시 개업에 억대의 돈이 들어갔다고 한다. 돈이 없었던 이 씨는 시어머니의 전적인 지원으로 커피숍에 열었고 운영만 본인이 했다. 결별 뒤 카페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 씨는 1억 원에 가까운 빚을 지게 됐고 이는 고스란히 채 씨가 떠안았다. 대부분 커피숍의 원료공급을 해주는 업체에 대금을 제공하지 않아 발생한 것이었다.
주진화 형사과장은 “이혼 후 문제의 카페를 채 씨가 운영한 것으로 보이는데 유가족이 변호사 공증을 받은 자료 하나를 제출했다. 여기에는 두 사람의 이혼사유 몇 가지와 금전관계에 관한 내용이 있지만 사적인 부분이라 자세히 밝힐 수는 없다. 그런데 이 자료에는 채 씨가 아닌 전 부인 이 씨가 위자료를 지급하도록 돼있다”며 “총 7000만 원의 위자료를 채 씨에게 지급해야 하는데 일시불로 갚을 능력이 없으니 월 70만 원을 제공하라는 내용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 부인 이 씨는 “시어머니로부터 돈을 받은 사실이 없다. 커피숍 개업은 은행 대출을 받아 이뤄진 것”이라며 또 다시 반박을 했다. 이에 경찰은 전 부인 이 씨의 거래은행 등에 계좌추적영장을 보내는 등 진실을 밝히기 위해 돈의 흐름을 추적하고 있다.
또한 전 부인 이 씨는 “돈을 받아달라고 의뢰를 했을 뿐 납치부터 살인까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그가 채 씨의 죽음에 어디까지 개입했는지 여부는 경찰의 수사결과에 따라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주진화 형사과장은 “전 부인 이 씨는 폭행, 감금, 협박 이런 것까지는 원하지 않은 것으로 일단 나온다. 다만 피의자 이 씨가 말하기를 돈을 받기 위해서는 납치도 해야 되고 감금도 해야 되고 그런 것이 필요하다고 했을 때 (전 부인 이 씨로부터) ‘알아서 해라’는 답을 받았다고 해 정확한 사실관계를 파악 중”이라며 “현재는 이 씨 일당 3명과 이들을 사주한 전 부인에게 강도 살인과 감금교사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말했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
충격기·공기총… 날로 잔인해져
영화 <회사원> 스틸컷.
청부살인에 대한 정확한 통계가 발표되진 않았으나 경찰청은 지난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총 17건의 살인 교사 범죄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매년 1000여 건에 이르는 살인범죄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지만 2011년 한 해에만 14건의 살인교사 사건이 발생하는 등 가파른 상승세를 보여 불안감이 높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전문 살인청부업자 속칭 ‘히트맨(hitman)’이 국내에서도 활동하고 있을 것이란 추측도 제기될 정도다.
청부살인은 주로 금전문제나 치정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여기에 공기총, 전기충격기, 칼까지 동원되는 등 범행수법도 날로 잔인해지고 있다. 실제 지난 2012년에는 이혼을 요구한 아내의 사업체를 차지하기 위해 남편이 청부살인을 하기도 했으며 같은 해 3억 원 상당의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부인을 중국 칭다오로 보낸 뒤 지인에게 살인을 부탁한 사례도 있었다. 2008년에는 한 20대 여성이 내연남의 네 살짜리 딸을 살해해 달라고 청부했다 경찰에 붙잡혀 충격을 주기도 했다.
문제는 청부살인을 원천봉쇄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해킹에서부터 폭행, 감금, 납치, 살인까지 돈만 주면 원하는 부탁을 뭐든 들어주는 불법흥신소나 심부름센터가 난립해도 워낙 은밀히 움직이는 탓에 단속이 쉽지 않은 것. 겉으론 “그런 일 안 한다”며 청부를 거절하는 업자들도 뒤로는 고객의 연락처를 확보해 거래하는 방식으로 움직인다고 한다. 게다가 보통 청부를 맡길 때는 비밀보장 최우선이 돼야 하는 만큼 지인에게 부탁해 업자를 소개받는 방식으로 착수하기 때문에 사전에 정보를 입수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 최근에는 외국인 또는 불법체류자를 연결해주는 업체까지 등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부살인은 범행 당사자뿐만 아니라 이를 사주한 사람까지 똑같이 처벌을 받게 돼 있지만 이런 법도 돈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간단한 인터넷 검색만으로 누군가의 목숨이 좌지우지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