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7월 운반책 유 아무개 씨가 필로폰을 복대에 숨기고 김해공항을 빠져나가려다 적발됐다.
붙잡힌 유 아무개 씨(51)는 자신이 ‘운반책’이라면서도 “모두 다 내가 안고 가겠다”며 윗선에 대해선 철저하게 입을 다물었다. 유 씨에게서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한 검찰은 마약 성분 자체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마약 지문 감정’이라고 불리는 성분 분석은 마약의 순도와 녹는 점을 파악하는 기법이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사실이 발견된다. 비슷한 시기에 서울중앙지검에서 붙잡힌 오 아무개 씨(43)가 소지한 마약과 100% 일치하는 성분으로 판명 났기 때문이다.
전국에 마약을 대량 유통한 오 씨는 ‘김해 마약왕’으로 불리며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인물이었다. 오 씨의 검거 과정도 영화를 방불케 해 화제를 불러일으킨 바 있다. 검거될 당시 오 씨는 검찰과 2시간이 넘는 추격전을 벌였다. 고급 벤츠 차량을 타고 다니던 오 씨는 검찰이 탄 승합차를 빠른 속도로 따돌렸다. 하지만 오 씨 뒤를 은밀히 따라붙은 ‘경차’에 의해 결국 검거되고 만다. 오 씨의 눈을 속이기 위해 승합차에서 경차로 갈아탄 검찰의 기지가 먹힌 셈이다. 당시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경차 탄 검찰이 벤츠 탄 마약왕을 이겼다”고 회자됐다. 오 씨의 차량 트렁크에는 필로폰 370g과 단속을 대비한 고성능 망원경, 심지어 일본도까지 들어있어서 수사관들을 경악케 했다.
마약으로 드러난 유 씨와 오 씨의 연결고리는 조사를 하면서 더욱 자세하게 드러났다. 유 씨의 휴대폰 통화 내역을 복구하고 마약 거래 장부와 입금 내역을 들춰보니 유 씨와 오 씨의 거래 과정이 속속 나타났다. 단순한 거래 파트너를 넘어 ‘한 조직’인 것을 유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토대로 유 씨를 추궁하자 유 씨는 결국 조직의 실체를 인정하고 검찰에 모든 것을 진술하게 된다.
“윗선이 있습니다. 오 씨도 저도 ‘회장님’ 지시에 따랐을 뿐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김해 마약왕’으로 불렸던 오 씨보다 더 높은 ‘윗선’이 존재한다는 진술이었다. 유 씨는 회장님으로 정 아무개 씨(49)를 지목했다. 검찰은 정 씨를 추적해 경남 김해에서 정 씨를 마약거래혐의로 검거하기에 이른다.
‘회장’으로 불렸던 정 씨는 거대 마약 조직의 수장이었다. 보스가 회장으로 불리자 자연스럽게 조직도 ‘회장파’로 불렸다. 김해 마약왕 오 씨도 회장 정 씨의 비서 역할을 했다. 검찰 관계자는 “오 씨는 말 그대로 비서이자 행동대장이었다. 오 씨가 망원경과 일본도를 갖고 앞선에 나서고 운반책인 유 씨가 마약을 공급하면 정 씨는 배후에서 조용히 이 모든 것을 조종하는 역할을 했다”라고 전했다.
적발된 필로폰.
그러던 와중에 두 사람은 유 씨를 알게 됐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유 씨는 운수업체를 운영하고 무역업 등을 해서 많은 돈을 갖고 있었다. 조직폭력배와 관련 없이 김해 지역에서 사업을 확장하며 건실하게 살고 있었던 그에게는 단점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도박’에 심취했다는 점이다.
2012년 무렵부터 정 씨는 이러한 유 씨와 도박을 하며 친분을 쌓았다. 특히 두 사람은 스크린 골프 내기를 즐겨했는데, 처음에 소액으로 시작한 내기는 점점 횟수가 반복될수록 금액이 수십 배로 늘어났다. 내기로 시작하긴 했지만 실력에서 정 씨에게 밀려 매번 패배했던 유 씨는 점점 오기가 생겼다. 그러다 판돈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결국 유 씨는 전 재산을 거의 탕진할 만큼 돈을 날리고 만다.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는 바람에 낙담에 빠진 유 씨에게 정 씨는 솔깃한 제안을 했다. “사업을 도와주면 재산을 회복할 만큼 돈을 챙겨주겠다”는 것. 유 씨는 정 씨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마약 유통에 뛰어들게 된다. 건실한 사업가가 ‘마약 운반책’으로 둔갑하게 된 셈. 무역업을 해서 중국 쪽에 유통망을 확보하고 있었던 유 씨는 정 씨의 마약 사업에 날개를 달아줬다. 회장파의 전성기가 시작된 것이다.
회장파는 2012년 7월부터 2013년 말까지 1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서울, 부산, 포항 등 전국 각지 마약상에 필로폰 7kg을 팔아 넘겼다. 이는 23만 명이 동시에 투약할 수 있는 양으로 시가 ‘230억 원’어치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양이다. 국내에서 연간 적발되는 불법 유통 마약량이 20kg인 점을 감안하면 이중 3분의 1의 마약 유통을 회장파가 독점한 셈이다.
특히 운반책인 유 씨는 조선족 여성까지 동원하며 중국 칭다오 등지에서 마약을 들여왔다. 조선족 여성들은 팬티나 브래지어 등에 마약을 숨겨 세관의 적발을 피해왔다. 검찰 관계자는 “유 씨 역시 본인이 직접 마약을 들여오기도 했다. 마약을 숨기는 대표적인 방법이 항문에 숨기는 수법인데 유 씨가 이것 때문에 ‘고통이 심하다’고 검찰 조사에서 얘기하기도 했다”라고 전했다.
결국 마약 유통의 전성기를 누렸던 회장파는 검찰에 덜미를 잡히게 됐다. 현재 검찰은 7명으로 구성된 회장파 중 달아난 운반책 3명을 쫓고 있는 중이다. 검찰 관계자는 “밀수책이나 판매책이 따로따로 잡히는 경우는 많아도 이렇게 마약 조직의 몸통이 잡힌 경우는 드문 일”이라며 “최근 지방공항을 통해 마약을 들여오는 수법이 진화하고 있다. 중국 공안과 국내 유관기관과 협력해 이러한 마약 조직을 확실하게 검거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