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사 김심이 존재한다 해도 ‘정치 9단’인 DJ가 섣불리 속을 내비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정가의 일반적인 관측. 하지만 최근 들어 DJ의 바깥 행보가 눈에 띄게 잦아져 정치권으로 하여금 수읽기에 골몰하도록 만들고 있다. 더욱이 최근 정치권 일각에서는 DJ가 총선을 앞두고 측근들과 ‘호남투어’에 나설 것이라는 말까지 나돌고 있어 그 배경이 주목된다. 과연 DJ가 ‘묵언의 투어’를 통해 호남지역 유권자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걸까.
‘동교동’ 소식을 잘 아는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김 전 대통령(DJ)이 총선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 호남지역을 방문할 계획을 갖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이 계획은 ‘김대중 도서관’이 문을 연 다음부터 과거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비서들이 김 전 대통령에게 제안했다고 한다. 동교동계 측근이나 과거 청와대 비서진들과 함께 고향인 하의도(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 들렀다가 전남지역 대학에서 특별강연을 한 다음 5·18묘역을 참배하는 일종의 ‘호남투어’라고 들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 관계자는 “그렇지만 김 전 대통령이 제의를 받은 뒤 아직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진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관계자의 말처럼 만약 DJ가 총선에 즈음해 호남을 방문한다면, 그것도 현재 민주당에 남아 있거나 향후 민주당에 승선할 ‘DJ맨’들과 함께 방문한다면 그것은 호남 유권자에게 ‘김심’은 민주당에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며, 이는 곧 호남 표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DJ측 김한정 비서관은 ‘호남투어’ 계획에 대해 “하의도 방문 계획은 처음 듣는 얘기며 검토한 바도 없다”고 일단 부인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어떻게 얘기할 수 있겠느냐”며 “당장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 4·15총선을 불과 1백여 일 앞둔 가운데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점점 정치적 보폭을 넓히자 정치권이 김심을 잡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사진은 광주 5·18묘역. | ||
민주당 일각에선 DJ의 호남 방문 시기가 이르면 우리당 전당대회(1월11일)가 열린 다음인 1월 중순이거나, 늦을 경우 총선 직전인 3월 말쯤이 될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런 ‘호남 투어설’이 나도는 데는 지난 11월3일 ‘김대중 도서관’ 개관식 이후 DJ의 행보가 눈에 띌 정도 활발해진 것과도 무관치 않다는 게 정치권의 대체적인 시각. 지난 2월24일 퇴임 이후 아들 홍업·홍걸씨 문제와 대북송금 특검, 박지원 전 비서실장과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 등 측근들의 잇따른 구속, 민주당 분당사태 등으로 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했던 데다 건강도 여의치 않아 DJ는 그간 사실상의 ‘칩거 생활’을 해왔다.
그런데 11월 이후 DJ의 바깥 나들이가 부쩍 늘었고, 정치권에서 ‘김심’으로 해석될 만한 ‘정치적 발언’도 이어졌다. 지난 11월만 해도 3일 ‘김대중 도서관’ 개관식에 이어 16일엔 이강훈 전 광복회장 영결식에 참석했다.
12월 들어서는 더 ‘왕성한 활동’을 벌이면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특히 4일엔 민주당 조순형 대표와 함께 신임 인사차 방문한 민주당 지도부를 향해 “민주당 당원들은 참 현명하다”며 ‘특별한 관심’을 표명하기도 했다. 5일엔 단식투쟁을 마치고 병원에 입원한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에게 난 화분을 보내는가 하면 직접 위로전화를 걸었다. 대북송금 문제로 그동안 껄끄러웠던 최 대표에게 이 같은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자 정가에서는 “DJ가 현 정부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표현한 것 아니냐”는 추측을 낳기도 했다.
지난 10일엔 퇴임 후 처음으로 김석수·이한동 전 총리 등 재임 시절 각료와 청와대 수석비서관 등 60여 명과 만찬을 함께했다. 15일에도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열린 ‘동아시아포럼’(EAF) 창립 총회에서 연설했고, 저녁엔 ‘나운규 영화제’에 참석해 공로상을 받는 등 DJ의 ‘강행군’은 계속 이어졌다. DJ는 또 최근엔 동교동 도서관 집무실에서 옛 청와대 비서들이나 국내외 인사들과 자주 면담을 갖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렇게 행보에 탄력을 받은 상황에서 DJ의 활동 반경은 새해 벽두부터 더욱 넓어질 것으로 보인다. 1일에는 ‘김대중 도서관’에서 국민의 정부 시절의 각료들과 수석비서관 및 비서 등 1백여 명으로부터 신년 하례를 받는다. 5일엔 그동안 미뤄왔던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와의 만남도 가질 예정이다. 그리고 11일 우리당 전당대회가 끝나면 신임 지도부를 만날 가능성도 높다는 게 동교동 주변의 전언이다. 이를 놓고 정치권에선 DJ가 신년하례식을 계기로 ‘총선 정치’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는 게 아니냐는 추측이 오가고 있다.
▲ 조순형 대표를 비롯한 민주당 지도부가 지난 12월4일 김대중 전 대통령을 방문했다. 국회사진기자단 | ||
하지만 정치권의 한 인사는 “노무현 대통령이 ‘민주당을 찍으면 한나라당을 돕는 것’이라는 발언이 나온 지 며칠 지나지 않아 한꺼번에 (DJ의) 1월 스케줄이 쏟아져 나온 것을 보면 아무래도 DJ가 노 대통령의 발언을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우리당 전당대회가 끝난 다음에 새 지도부와 만난다는 것도 가능성이 있다는 것뿐이지 확실하게 만나겠다고 한 것도 아닌 걸로 안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선 DJ의 정치 스타일로 봤을 때 특정 정당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데 대체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한나라당의 한 중진의원은 “총선에서 호남 표는 아직도 DJ의 행보에 달려 있다. 그렇지만 DJ는 드러내놓고 민주당이나 우리당의 손을 들어주지는 않을 것이다. 조용히 움직이면서 호남에 연고가 있는 유권자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전하는 스타일을 취할 것이다”고 내다봤다.
우리당의 한 의원도 “DJ는 퇴임 이후 국내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는 대신 남북문제에 여생을 바치겠다고 했기 때문에 눈에 띌 정도로 누구의 편을 들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가 일각에선 민주당과 우리당으로부터 절박한 러브콜을 계속 받고 있는 DJ가 결국 양측의 ‘화해’를 주선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DJ 또한 한나라당이 어부지리를 누리는 구도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결정적인 시기에 중재의 메시지를 던질 가능성이 있다는 시각이다.
과연 ‘정치 9단’의 총선 메시지는 무엇일까. DJ의 행보에 점점 무게가 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