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의원이 ‘사고’를 친 것은 지난 8일. 소위 비노무현 및 반노무현파의 연합체인 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후단협) 회장인 김 의원을 일부 기자들이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로 찾아가 만난 자리에서였다. 기자들과 간단한 점심식사를 마친 뒤 커피를 마시던 김 의원은 “노 후보는 국민경선으로 뽑혔는데 왜 노풍이 쉽게 가라앉았느냐”는 질문을 받고 “국민경선이 아니라 국민참여 경선이었다. 자발적으로 참여한 국민이 몇 사람이나 되느냐. 대부분 후보들이 동원한 사기다”라고 불쑥 내뱉었다. 경선 당시에 “주말이면 4천만 전 국민이 내 입을 주시한다”고 자랑하던 김 의원의 입에서 나와서는 안될 말이었다. 민주당 내 친노파는 물론 비노그룹에서도 “심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그러나 당내에서 징계문제가 거론되자 김 의원은 다음날인 9일 기자간담회에서 “자꾸 건드리면 (국민경선의) 내용까지 까발릴 거야. 내가 선거관리한 사람이야. ○○하지 말라고 해”라고 격한 반응을 보였다. 김 의원의 ‘설화’에 대해 단순히 노무현 후보를 공격하다가 말 실수를 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경선 당시 한화갑 대표가 후보로 출마함에 따라 대표 직무대행까지 겸직했던 김 의원이 알고 있던 ‘경선의 진실’을 엉겁결에 털어놓은 것이라는 관측도 유력하다. 경선 당시에도 당 안팎에서는 갖가지 음모론과 동원론이 떠돌았다. 그중 가장 무성했던 풍설이 ‘새시대새정치연합청년회(연청)’ 동원론이다.
연청은 김대중 대통령의 장남인 김홍일 의원이 문희상 의원과 함께 지난 80년 결성, 87·92·97년 대선에서 밑바닥 조직으로 가동됐던 것이다. DJ의 핵심 친위조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 대통령의 측근인 정균환 원내총무도 연청 회장 출신이다. 연청은 지난 2000년 11월 당 기구 개편 때 공식조직으로 편입됐고 회원수가 10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경선 당시에는 3만5천여 명의 국민선거인단 중 연청회원은 당연직 대의원 등의 자격으로 1천여 명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선거인단 중 연청 회원 비율은 적지만 조직력과 바람몰이 능력 등으로 인해 경선 승패를 가늠해주는 한 축으로 작용했다는게 정설이다. 특히 노무현 후보가 광주에서 ‘노풍’을 일으키는데 연청이 절대적 역할을 했다는 후문도 적지 않다.
▲ 노무현 후보(오른쪽)가 당선된 뒤 김영배 의원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 ||
민주당의 한 인사는 “광주 경선에서 연청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언론사의 여론조사 등을 통해 노풍이 감지되기 이전에 연청조직과 권노갑 전 고문의 지지자들은 이미 이인제 의원 지지에서 노무현 후보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는 얘기가 파다하게 돌았었다.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김중권 전 대표가 맥없이 후보를 사퇴해서 영남표를 노 후보쪽으로 몰아주는 결과를 빚은 것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소위 김심 논란으로 요약되는 경선 동원 논란은 전혀 근거없는 주장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인사는 “동교동계가 이인제로는 한나라당 이회창을 꺾기가 불가능해 보일 뿐만 아니라 이인제가 김 대통령의 퇴임 이후를 보장해주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는 소문이 많았었다”고 덧붙였다. 반노 성향의 한 민주당 의원은 “노무현 후보가 경선에 돌입하기 전에 동교동계 핵심들을 만나서 경선에서 밀어주면 김 대통령의 퇴임 이후는 물론이고 동교동계의 당권을 보장하겠다는 식으로 약속하고 다녔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인제를 밀던 동교동계가 갑자기 노무현 쪽으로 돌아선 것을 달리 이해할 길이 없다. 김영배 의원이 사기극 운운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본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경선 중반전이던 지난 4월8일 당시 노 후보에게 연패하던 이 후보측은 연청 부산시지부 사무차장이라는 노인환씨의 ‘양심선언’ 메모를 공개, 김 대통령의 경선 개입의혹을 강력 제기하기도 했다. 노씨는 메모를 통해 “4월5일 오후 50여 명이 참석한 부산지역 연청 모임에서 문희상 의원이 ‘연청이 나서 제주도에서 한화갑 고문을 1등을 만들어 (이인제) 대세론을 눌렀고, 광주에서는 노풍을 연청의 힘으로 이끌어냈다’고 했다”고 말했다. 당시 이인제 후보측의 김윤수 특보는 “연청 회원은 10만여 명으로 이중 10% 가량이 국민경선 선거인단으로 참여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김영배 의원이 직접 언급한 경선 후보들에 의한 ‘동원 논란’도 적지 않았다. 1백90만여 명의 일반 유권자가 신청서를 제출해서 컴퓨터 추첨으로 3만5천여 명의 선거인단을 추려냈다는 게 민주당측의 공식 설명이지만 조직력과 자금력이 월등한 후보들은 자파 인사들을 대거 선거인단으로 등록시켰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었다. 조직력이 취약한 김근태, 정동영 후보는 타 후보측의 선거인단 동원에 대해 경선 초반부터 지속적으로 경고하기도 했었다.
당시 A, B후보는 서로 상대방을 겨냥해 “007가방(돈가방)을 들고 다니면서 선거운동을 한다”고 맹비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었다. “신청서 한 장을 받아오면 1만원을 준다” “신청서 1백장을 모아오면 해외여행을 시켜준다”는 식의 소문도 끊이지 않았다. 실제로 지방의 선거인단 신청서들이 뭉텅이로 서울에서 작성돼서 제출되거나, 자신도 모르게 선거인단에 포함된 사람들이 항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연히 선거인단 최종 확정은 매번 극심한 진통을 겪었다. 두 번째 경선 지역이었던 울산은 투표일 이틀 전에 선거인단이 절반 가량 교체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때문에 16개 시·도별로 실시된 경선은 대부분 선거인단 숫자가 막바지에 결정돼야 했다. 이밖에 경선 당시 이인제 후보측은 청와대 박지원 비서실장의 개입의혹, 한화갑 대표 등의 잇따른 사퇴의혹 등을 파상적으로 제기했었으나 어떤 것도 확인된 것은 없다.
이번 사태의 발단이 됐던 김영배 의원의 8일 발언은 표면상 후보 동원론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다. 경선 후보들이 선거인단을 동원했기 때문에 ‘사기극’이라는 논리를 폈을 뿐이지 ‘김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9일 발언에서는 “자꾸 건드리면 까발릴 거야”라고 언급, 다른 ‘내막’이 있음을 시사했다. 비노파의 한 의원은 “노무현 후보가 국민경선이라는 축제를 통해 탄생한 스타지만 막전과 막후는 다른 것 아니냐. 노 후보가 여론의 바람은 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물밑에서 정치권 내부의 논의와 타협이 진행됐다는 점 또한 일정부분 진실이라고 본다. ‘노풍’은 이처럼 순전하게 국민의 힘만으로 이뤄진 게 아니라 쉽게 꺼졌다는게 김영배 의원의 주장이라고 본다. 김 의원 발언은 일종의 자해행위이지만 헛소리는 아니다”라고 분석했다.
열쇠를 쥐고 있는 김 의원은 사태가 확산되자 후단협 회장직 사의를 표명한 채 일체 함구하고 있다.
전민식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