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가 일주일 만에 천해성 안보전략비서관 내정을 철회, 전례 없는 인사사고로 거센 후폭풍을 맞고 있다. 당사자인 천 전 내정자조차 그 사유를 모른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어 의구심을 자아내고 있다. 연합뉴스
천해성 전 내정자의 원 소속 부처였던 통일부 당국자들의 반응도 싸늘하다. 사태의 전말과 진상을 묻는 질문에 통일부 당국자들은 “우리가 뭘 알겠느냐. 청와대로 물어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청와대가 대변인을 통해 공식 브리핑을 했는데도 통일부 당국자들이 형식적으로나마 입을 맞춰주는 모양새도 취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특이한 반응은 이번 천해성 미스터리가 단지 청와대 비서관 한 명의 인사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천해성 미스터리에서 박근혜 정부 ‘인사참사’의 시발점이었던 ‘최대석 미스터리’의 암울한 기운이 느껴진다는 얘기다. 최대석 이화여대 교수는 박근혜 정부 초대 통일부 장관 영순위로 거론됐지만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외교안보통일분과 인수위원으로 활동하던 중 갑작스럽게 사퇴했고, 현재까지도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천해성 미스터리가 암울한 전조로 여겨지는 이유는 우선 역대 정부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황당한 인사 사고이기 때문이다. 장·차관이나 청와대 수석, 비서관 등이 내정됐다가 국회의 인사청문회 등의 검증 장벽에 막혀 낙마한 사례는 부지기수였지만, 임면권자인 대통령이 자신의 인사 결과를 스스로 거둬들인 사례는 찾기 힘들다. 당사자인 천해성 전 내정자조차 자신의 내정철회 사유를 정확히 모른다는 얘기가 나오는 현 상황은 누가 봐도 특이한 것이다. 심지어 일각에선 대통령의 재가를 받기도 전에 천 전 내정자의 내정 사실이 공표됐던 것 아니냐는 해석까지 나올 정도다.
이번 사태가 박근혜 정부 출범 때부터 꼬리표처럼 따라다니고 있는 ‘불통 이미지’를 한층 더 강하게 만들었다는 점도 앞으로의 전망을 어둡게 하는 요인이다. 신설된 안보전략비서관에 처음으로 내정된 사람이 갑작스럽게 교체된 것도 문제이지만, 이보다 더 큰 비난을 자초한 것은 청와대의 어설픈 해명 등 사후 대응이었다. 한 청와대 관계자조차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얘기를 해명이라고 내놓은 게 더 큰 문제”라며 “이런 식의 소통방식은 국민들에게 ‘그냥 그렇다면 그런 줄 알라’는 고압적인 태도로 비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 효과가 한방에 다 사라지게 됐다”고 말했다.
이번 천해성 미스터리를 그냥 넘길 수 없는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는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외교·안보 라인의 강·온파 대립설에 근거한다. 과거 노무현 정부에서도 대북정책의 핵심 인력으로 활동했던 천해성 전 내정자가 온건론을 주장하다가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을 비롯한 군 출신 강경파들에게 밀려나고 말았다는 얘기다.
지난해 6월 남북 실무접촉에서 우리 측 수석대표로 참석한 천해성 실장. 연합뉴스
김규현 국가안보실 1차장은 외교부 출신이지만 김장수 실장이 국방부 장관으로 재직할 때 국방부 국제협력관으로 일했다. 천해성 전 내정자의 뒤를 이어 통일부 통일정책실장을 맡게 된 김기웅 국장, 천 전 내정자 대신 안보전략비서관에 내정된 전성훈 통일연구원장 등은 홍용표 통일비서관과 함께 모두 인수위 외교안보통일분과에서 일했다. 당시 이 분과 간사가 김장수 실장이었다. 김관진 국방부 장관뿐 아니라 남재준 국가정보원장, 박흥렬 청와대 경호실장 등 군 출신 인사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터에 ‘김장수 라인’이라 불러도 될 법한 인맥이 형성되고 있는 셈이다.
한 정치권 인사는 “인사 참사, 불통 이미지 등은 박근혜 정부에서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는 일이지만 외교·안보 라인이 강경파 일색으로, 더욱이 특정 인물의 인맥으로 채워지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구조적으로 ‘다른 목소리’가 제기될 수 없게 되면 상황에 대한 판단과 전략, 정책 방향 등이 편향성을 띨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장성택 처형 후 북한의 불안정성이 커지면서 박 대통령이 국가안보실의 위상을 대폭 강화했다는 점은 이런 우려를 더 크게 만든다. 박 대통령은 이명박 정부에서 명맥만 유지했던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다시 상설화하면서 국가안보실장이 NSC 상임위원장을, 국가안보실 1차장이 NSC 사무처장을 겸하도록 했다. 박 대통령 집권 첫 해인 2013년 안보 분야에 집중했던 국가안보실이 사실상 외교·안보 전반을 아우르는 컨트롤타워로 위상이 높아진 것이다.
정치권의 다른 인사는 “대북 강경파는 현상 유지에는 강점을 발휘할지 몰라도, 상황을 변경시키는 데에는 약할 수밖에 없다”며 “이런 외교·안보 라인이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와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등을 통해 평화통일 기반을 구축하겠다는 박 대통령의 구상을 뒷받침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천해성 미스터리를 두고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하는 상황에 대해 새누리당의 한 관계자는 “인사 문제의 민감성을 감안할 때 공개할 수 없는 다른 이유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며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인사 검증 과정에서의 문제점 등 천 전 내정자가 생각지도 않은 다른 사유로 교체됐는데 청와대가 이를 알리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유야 어찌됐든 천해성 미스터리가 박근혜 정부에 두고두고 부담이 될 것이라는 데에는 많은 이들이 공감을 표하는 상황이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