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이 사건이 드러난 후 세인들의 관심은 이 사건에 연루된 인사들이 관계한 ‘베스트’라는 상류층 사교클럽에 모아지고 있다. 피의자와 피해자들 모두가 ‘베스트’의 회원들이었던 것.
여기에 상류층 사교클럽을 엿보고 싶어하는 세인들의 호기심도 자극했다. 그러면 이번 사건을 통해 혜성같이(?) 등장한 사교클럽 ‘베스트’의 실체는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이 회원이며, 클럽 안에선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검찰 조사 결과 최씨는 피해자 이씨에게 “N은행은 다른 은행보다 금리가 높은 편이고, 1년에 2∼3회 정도 고객을 위해 특별우대금리를 준다”고 속였다. 이런 식으로 2001년 12월부터 열다섯 차례에 걸쳐 무려 7백45억원을 가로챈 것으로 검찰 수사 결과 밝혀졌다.
피의자 최씨는 이씨로부터 돈을 받을 때마다 사전에 위조해둔 정기예금 및 약속어음 증서를 건네줬다. 이에 이씨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는 것. 하지만 그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던 셈이다.
그런데 수사 결과 피의자 최씨의 ‘먹이’는 비단 이씨뿐만이 아니었다. 최씨가 구속됐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최씨에게 사기를 당했다는 피해자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의 피해 액수도 모두 1백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사기를 당했다고 검찰에 알려온 사람들은 피의자 최씨를 정식 고소하지 않고 있다는 점. 그래서인지 검찰 주변에서는 갖가지 의혹이 나돌고 있다.
사정이 이렇자 검찰 주변에서는 사기 피해자들이 ‘검은 돈’을 최씨에게 맡겨 ‘돈 세탁’을 부탁했기 때문에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다는 의혹이 불거지고 있다. 아니면 자신들의 신분이 노출되느니 차라리 돈을 찾지 않겠다는 뜻으로도 해석되고 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수백억원을 가로챈 혐의를 받고 있는 최씨와 사기당한 피해자들이 같은 상류층 클럽의 멤버였다는 점이다. 이들이 ‘친목을 다진다’는 미명 아래 모였던 클럽은 바로 ‘베스트’. ‘베스트’는 이번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몇몇 사교계 전문가들만 알고 있던 ‘비밀’ 사교클럽이었다.
사교계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소식통은 “‘베스트’라는 클럽이 생겼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한 것은 2001년 초쯤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 돈 많은 집안 자제들과 고속득 전문직 종사자들이 모이는 클럽이 생겼다고 알려졌다”면서 “처음에는 ‘베스트’라는 이름인줄 몰랐다가 나중에야 그 모임이 베스트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전했다.
여느 상류층 사교모임과 마찬가지로 ‘베스트’도 보안 유지에 철저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밀스럽게 모임을 가졌던 것만 봐도 이 모임의 행태를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베일에 가려졌던 베스트의 멤버들은 누구인가.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굴지의 대기업 오너 집안의 자제들은 없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다만 상당한 재력을 갖춘 중견급 재벌의 2·3세들이 이 모임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변호사, 회계사 등 고소득 전문직 종사들과 함께 언론인도 포함됐다는 것.
‘베스트’는 서울의 사립 명문고인 S고 출신들이 주축이 돼 처음 결성됐다가, 이후에 또 다른 공립 명문고인 S고 출신들이 합류한 것으로 사교계에는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 모임은 이들 명문고의 이니셜을 따 ‘베스트’ 혹은 ‘SS클럽’으로 부르기도 한다.
사교계에서는 베스트 멤버가 20명 안팎이라고 알려져 있다. 베스트의 역사가 짧은 데다, 회원수가 그 이상 불어나면 사교계에도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지만, 베스트가 그 정도 수준은 아니었다는 것.
이번 사기 사건의 피해자인 이씨는 사립 명문 S고 출신. 이씨는 자신의 모교가 포함된 학교법인 S학원 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부친이 대주주로 있는 S기업의 전무로 일하고 있다. 기자는 여러 경로를 통해 이씨와의 인터뷰를 시도했으나,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회사측에선 “전무님은 외부에 있다”고만 반복했다.
피의자 최씨의 고등학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평소 잘 알고 있던 또 다른 재벌 2세 이아무개씨의 소개로 ‘베스트’ 멤버가 됐던 것으로 검찰 수사에서 밝혀졌다. 뒤늦게 회원으로 가입했음에도 그는 미국 명문대를 졸업한데다, 외국계 은행에 근무한다는 이유로 멤버들 사이에서는 ‘금융전문가’로 통했다는 게 검찰측 설명. ‘베스트’의 총무를 맡은 그는 회원들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고. 그렇지만 결국엔 회원들의 거액을 가로채면서 뒤통수를 쳤다.
베스트 회원 가운데 7억여원을 사기당한 변호사 김아무개씨는 피해자 이씨와 함께 다른 공립 명문 S고를 졸업했다. 현재 한 법무법인 대표이기도 한 김씨와 연락을 취했으나, 사무실 관계자로부터 “휴가를 갔다”는 답변만 왔다.
이밖에 최씨에게 사기당한 재벌 2세 김아무개씨와 변호사 최아무개씨 등도 모두 피해자 이씨와 동창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현재 외부와 연락을 끊은 채 세칭 ‘잠수함’을 탄 상태. 어떤 식으로든 이번 사건과 관련해 자신의 이름과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꺼리기 때문으로 보인다.
베스트도 여느 상류층의 사교클럽과 마찬가지로 친목도모와 정보교류를 표방했다고 피의자 최씨는 검찰에서 진술했다. 재벌 자제들이 속한 사교클럽 내부 사정을 잘 아는 관계자는 “처음엔 자신의 유학생활 등으로 화제를 삼다가 나중에 서로 친해지면 재테크에 대해 정보를 교류한다”며 “베스트 사건도 이 과정에서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상류사회 클럽의 연간 회비는 대략 3천만∼5천만원 정도 된다”며 “베스트도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들은 주로 강남지역을 무대로 비밀 회합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교모임을 주선하는 업체의 관계자는 “고위 자제들의 모임인 베스트는 폐쇄적인 클럽으로 소문 나 있었다”라며 “강남 논현동과 압구정동, 청담동 등에 있는 카페를 통째로 빌려 모임을 가졌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베스트 회원은 남성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남자고등학교 출신들의 모임인 까닭. 그럼에도 회원이 되려고 베스트의 문을 두드리는 사교계 여성들도 많았다고 한다. 각종 사교모임에 자주 나가는 카피라이터 정아영씨(가명·여·31)는 “베스트 회원들이 재력과 실력을 갖춘 데다 ‘외국물’을 먹었다고 소문이 나면서 회원으로 가입하려는 커리어우먼들이 상당히 많았다”고 전했다. 실제로 전문직 여성 가운데 베스트 회원으로 골인한 경우도 있다는 것.
한때 ‘최고’를 의미했던 ‘베스트’(best) 모임은 이제 ‘최악’의 뜻인 ‘워스트’(worst)로 바뀌어야 할 운명에 처했다. ‘자신들만의 성(城)’ 안에서 ‘돈 부풀리기’를 시도했다가, 사기치고 사기당한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우리 사회 상류층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또 한 차례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는 의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