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수씨는 미국으로 출국하기 전 기자들의 쏟아지는 질문에 “나는 김영완씨를 알지도 못하고 만난 적도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러나 그가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박씨는 또 언론에 보도된 지난 2일과 3일 말고도 몇 차례 더 정 회장과 만났다고 보도됐다. KBS는 이 내용을 근거로 “박씨가 대북송금과 현대비자금의 소위 ‘플러스 알파’와 관련해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고 덧붙였다.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박씨의 진술은 검찰 조사 전과 후가 달랐다는 얘기가 된다. 왜 그랬을까. 이를 포함해 박씨의 출국 후 그와 관련된 두 가지 주요한 의문점이 부각되고 있다.
첫번째 궁금증은 박씨가 왜 상중인 6일에 부랴부랴 출국을 했을까 하는 점.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검찰은 당초 6일 출국할 예정이던 박씨에게 출국을 당분간 보류시켜줄 것을 요청할 것이라고 했다. 박씨가 미국 시민권자이기 때문. 당시 검찰은 “정 회장의 조문 기간에 수사를 재개하면 여론이 어떻겠느냐”며 “일단 장례 절차가 마무리되는 대로 다시 관련자들을 소환해서 계속 수사를 재개토록 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즈음 일부 언론에서는 “박씨가 지난달 26일 입국하기 전 미국 현지에서 김영완씨를 수차례 접촉했다”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검찰로서는 이의 확인을 위해서라도 박씨에 대한 조사가 불가피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박씨는 당초 출국 예정일인 6일 오전 검찰 소환 조사를 서둘러 마치고 그날 오후 바로 미국으로 출국했다. 친한 친구의 발인도 보지 않고 상중에 쫓기듯이 공항을 빠져나간 것은 박씨 자신의 의지였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또 하나의 의문은 정 회장의 자살 직후 검찰이 보인 다급함이다. 정 회장의 자살로 온 나라가 충격에 휩싸여 있던 4일 밤, 검찰은 급히 박씨를 소환 조사했다. 당시는 검찰의 강압적인 수사 분위기로 정 회장이 자살의 길을 택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가 강했던 상황. 검찰로서도 이런 여론에 상당히 당황해했던 것은 물론이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사고 당일날 밤 경찰 조사를 마친 박씨를 바로 소환 조사하는 무리수를 감행했다.
검찰 일각에서는 정 회장이 자살 직전 박씨를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눴고, 그 대화 내용 중에 검찰 수사 내용이 대거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보고 이의 보안을 위해 박씨를 서둘러 불러 들였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그러던 중 지난 11일 미국 LA에 거주하는 한 언론인으로부터 취재진은 상당히 중요한 말을 전해 들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박씨가 회사 직원 및 주변 지인들에게 “검찰이 하도 출국을 종용하는 통에 정 회장의 발인도 못 보고 왔다”며 상당히 불만스러워했다는 것. 특히 그는 “검찰 조사에서 상당히 수모를 당했다”는 말도 털어놓았던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 발언은 사실일까. 취재진은 사실 확인을 위해 미국 LA의 박씨 자택에 전화 메시지를 여러 차례 남겼으나, 박씨는 끝내 응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검찰측에서는 다소 어이없다는 반응. 한 검찰 관계자는 “검찰에서 박씨를 서둘러 출국시킬 이유가 뭐가 있느냐”며 “박씨의 출국 날짜는 정 회장의 자살 전 이미 한 차례 연기하면서 6일로 잡혀 있었던 상황이었고, 그는 두 차례의 소환 조사를 모두 받고 정상적으로 출국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만약 박씨의 이 같은 발언이 사실이라면 위에서 제기한 두 가지 의문점에 대한 밑그림도 대충 그려진다. 검찰로서는 박씨를 취재 현장에 계속 노출시키는 것이 불안했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던 것. 사고 전날밤 박씨는 정 회장으로부터 많은 내용을 전해들었을 수도 있는 주요 당사자인 것이다.
또한 “검찰 조사 과정에서 상당히 수모를 겪었다”는 박씨의 불만 또한 검찰이 정 회장과의 대화 내용을 다그치는 과정에서 다소 강압적인 분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의심되는 측면이다.
검찰이 다소 무리해가면서까지 박씨를 급거 소환해서 이틀새에 조사를 벌인 점에 대해 대검 중수부측은 “박씨가 2000년 대북송금 당시 현대상선 미주본부장을 지낸 점 등으로 미뤄보아 현대 비자금 사건 개입 여부가 주목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박씨는 정 회장의 자살 전까지만 해도 전혀 검찰로부터 그같은 조사의 필요성을 듣지도 못했던 터였다.
검찰은 또한 “박씨가 현대의 비자금 세탁을 주도하고 미국으로 도피한 김영완씨와 정 회장간의 전화연락을 주선했다는 의혹이 있다”고 의심했으나, 조사 이후 “별다른 혐의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사실상 조사를 종결시켜 버렸다.
이로써 대북송금과 비자금 의혹에 핵심적인 열쇠를 쥐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김영완씨에 이어 박씨까지 미국으로 건너간 지금 우리의 검찰 수사는 두 명의 미국 시민권자들의 자발적인 협조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