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통령은 남재준 원장 경질 카드를 언제 꺼내느냐를 두고 장고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박은숙 기자
“책임질 사람이 있다면 책임지는 것이 당연하다.”
경기지사 출마를 선언한 유정복 전 안전행정부 장관이 지난 2월 13일 한 라디오에서 간첩사건 증거조작과 관련된 질문에 답한 말이다. 이는 여권 내에서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친박계 핵심이자 박 대통령 ‘복심’으로 통하는 실세 유 전 장관이 남재준 국정원장 사퇴론을 거론했기 때문이다. 여권에서 친박 인사가 남 원장 해임을 꺼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유 전 장관의 발언이 남다르게 받아들여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당 지도부와 청와대는 일단 진화에 나섰다. 주류 역시 말을 아끼는 한편 남 원장을 향해 공세를 취하고 있는 비주류를 향해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치고 있다. 황우여 대표는 “박근혜 대통령이 엄정한 수사와 상응하는 사후 조치를 강조한 만큼 사전 문책론은 혼란을 불러올 수 있다”며 “검찰 수사 결과를 기다린 후 책임 소재에 따라 엄격히 책임을 논하는 게 온당하다는 것이 당의 입장”이라고 밝혔다. 청와대는 남 원장 경질 가능성이 여권 내에서 불거지고 있는 것에 대해 자중을 당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황 대표 발언은 이를 반영한 것이란 평가가 나왔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주류 역시 비주류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 포착된다. 공개적으로 말은 못하고 있지만 남 원장의 경질 필요성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 앞서의 유 전 장관 발언은 이러한 기류가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한 친박 중진 의원은 “검찰 수사가 남 원장에게로 향할 것은 분명하다. 현직 국정원장이 수사를 받을 경우 이는 고스란히 박 대통령 짐이 된다”면서 “남 원장이 민간인 신분에서 수사를 받는 게 훨씬 보기 좋은 그림 아니겠느냐”라고 되물었다.
또 다른 친박 의원도 “남 원장이 더 이상 국정원을 이끌고 가기는 힘들 것 같다. 남 원장이 증거 조작에 관여하진 않았다고 하더라도 국정원의 사후 대처는 분명 잘못됐다. 사법체계 근간을 뒤흔들 수도 있는 사건인 만큼 남 원장이 신속히 책임지는 태도를 보여줬으면 한다”고 주문했다. <일요신문> 취재 과정에서 접촉한 대부분 친박 관계자들 역시 이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박 인사들이 남 원장 거취 문제에 대해 함구하고 있는 것은 박 대통령 의중을 살피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인사에 있어서만큼은 최측근들조차 여지를 주지 않는 박 대통령 스타일상 굳이 남 원장을 언급해 눈총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박 대통령이 정계 입문 후부터 지금까지 여러 차례 인사를 통한 난국 돌파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피력해왔다는 점, 남 원장에 대한 박 대통령 신뢰가 유달리 두텁다는 점은 친박 인사들로선 입을 열기가 쉽지 않은 대목들이다. 몇몇 정치 전문가들은 친박이 수세에 몰려 있는 남 원장을 적극 변호하지 않는 것 자체가 박 대통령을 향한 ‘침묵의 시위’일 것이란 분석을 하기도 한다.
여권 핵심부에서도 친박에서의 남 원장 비토 움직임을 감지하고 여러 채널을 통해 박 대통령에게 이를 보고한 것으로 전해진다. 청와대 정무 관계자는 “정치권에서 논의되고 있는 남 원장 문책론을 박 대통령도 예의주시하고 있다. 그것과는 별개로 박 대통령 역시 (남 원장 경질을) 심각하게 고민 중인 것으로 안다”면서 “윤진숙 전 장관 사례를 보라. 이번은 다를 것”이라고 털어놨다.
국정원을 바라보는 여권 핵심부 시선이 곱지 않은 것도 남 원장 해임 가능성에 무게를 더하고 있다. 일요신문 DB
박 대통령이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남 원장을 안고 가지는 않을 것이란 얘기다. 지난 2월 초 박 대통령은 부적절 발언으로 도마에 오른 윤진숙 전 해양수산부 장관을 전격 해임한 바 있다. 여론 악화가 심상치 않자 조기에 대응한 것인데 이를 두고 정치권에선 박 대통령 인사 스타일이 바뀔 것이라고 점친 바 있다.
특히 간첩 증거조작 사건이 64 지방선거에서 대형 악재로 작용할 것이란 여권의 우려는 박 대통령으로서도 간과할 수 없었을 것이란 게 정가의 관측이다. 권대우 정치컨설턴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다룬 영화 <변호인>이 큰 성공을 거뒀다. 국민들이 과거 독재 정권 하 권력기관 행태에 대해 분노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증거조작이 사실로 드러나면 그러한 구태가 지금도 이뤄지고 있다는 것에 국민들이 충격을 받을 것이다. 이는 지방선거에서 여권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국정원을 바라보는 여권 핵심부 시선이 곱지 않은 것도 남 원장 해임 가능성에 무게를 더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취임 첫해 국정원 대선개입 논란으로 국정 운영에 차질을 빚었다. 집권 2년차를 맞은 박 대통령이 또 다시 불거진 국정원 발 의혹에 발목이 잡혀선 안 된다는 게 이들의 판단이다.
박 대통령의 한 핵심 참모는 사석에서 기자에게 “남 원장을 더 이상 감싸고 갈 수 없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면서 “시급한 민생 현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국정원에서 자꾸 문제가 생겨 박 대통령이 안타까워하고 있다. 빨리 털어야하지 않겠느냐. 핵심은 남 원장 사퇴다. 현재 박 대통령은 (남 원장 경질) 시기만을 저울질하고 있다”라고 귀띔했다.
박 대통령은 남 원장 경질 카드를 언제 꺼내느냐를 두고 장고에 들어갔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여론을 환기시킬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시점을 찾고 있는 것이다. 앞서의 박 대통령 핵심 참모는 “남 원장 경질로 출구전략을 마련하자는 데엔 박 대통령도 공감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섣불리 했다간 그 화살이 박 대통령에게로까지 날아올 수 있다. 또 너무 지체했다간 국면을 되돌리기 어려울 수 있다”면서 “늦어도 4월 중순은 넘기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
여권 ‘물타기 작전’ 또 써먹나 증거 조작엔 ‘질끈’ 간첩 사건엔 ‘발끈’ 정치권에서는 청와대가 남재준 국정원장 경질 후 간첩 증거조작 사건을 ‘채동욱 전 검찰총장 혼외자식 건’과 비슷한 프레임으로 몰고 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채 전 총장 혼외자식 보도가 처음 나온 후 야당은 그 배경이 석연치 않다고 주장했다. 국정원 댓글 수사를 의욕적으로 밀어붙이던 채 전 총장을 내치기 위해 특정 세력이 의도적으로 관련 내용을 언론에 흘렸을 것이란 얘기였다. 그러나 세간의 관심은 온통 혼외자식 존재 여부에 쏠렸고, 결국 채 전 총장은 낙마했다. 간첩사건 증거조작 의혹이 불거지자 여권 일각에선 “사건의 본질은 간첩이냐, 아니냐에 있다”는 논리로 대응해야한다는 견해가 대두됐다. 국정원 측 역시 비슷한 입장이었다. 청와대가 기대하고 있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설령 증거가 일부 조작됐다 하더라도 피고인 유우성 씨 간첩 혐의를 더욱 부각시키면 그 후폭풍을 상쇄할 수 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여권이 자살 시도를 했던 국정원 협력자 김 아무개 씨가 남긴 유서의 일부 내용을 주목하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김 씨는 유서에서 증거조작을 시인하면서도 마지막 부분에 “유우성은 간첩이 분명하다. 증거가 없으니 처벌이 불가능하면 추방하라”는 글을 남겼다. 국정원의 한 인사는 “핵심은 유우성 씨가 간첩이라는 것이다. 입증 과정에 문제가 다소 있었다 하더라도 본질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한 야당 중진 의원은 “설령 유우성 씨가 간첩이라 치더라도 조작된 증거를 바탕으로 했다면 처벌하는 데 신중을 기해야 한다. 과거 불법적인 공안 수사로 얼마나 많은 피해자가 나왔느냐”라고 꼬집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