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선홍 감독
# 쇄국축구의 족쇄
작년 시즌을 보내면서 황선홍 감독이 가장 듣기 거북해 했던 이야기가 있다. ‘황선대원군’이라는 별명이었다. 축구 팬들은 포항이 팀 전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는 용병을 쓰지 않고도 좋은 성적을 내는 걸 빗대 조선시대 말기 쇄국정책을 썼던 흥선대원군과 황선홍의 이름을 절묘하게 합성해 이런 표현을 만들어냈다. 물론 포항의 축구 역시 쇄국정책과 맞물려 ‘쇄국축구’로 불렸다.
사실 황 감독은 적어도 한 명 이상의 외국인 선수 영입을 희망했다. 지난해 겨울부터 올해 초까지 구단 수뇌부와 여러 차례 담판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항상 “노(No)”였다. 모기업 포스코의 경영 악화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뿐이었다.
그러자 축구계에서도 수많은 소문들이 떠돌았다. 황 감독이 답답한 구단 정책에 불만을 품고 포항을 떠날 것이라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황 감독은 남았다. 현역 선수 시절, 포항에서 맹위를 떨쳐 레전드로 기억되는 자신이 팀이 어려울 때 남아야 한다는 책임감이 용병 수급을 못하는 아쉬움보다 더욱 컸다.
“나도 감독인데, 최고까지는 아니더라도 준수한 외국인 선수를 영입해 좀 더 좋은 축구를 펼치고픈 욕심이 왜 없겠느냐. 외국인 선수가 없이 2년 연속 시즌을 보내는 건 분명 답답하고 서글프지만 언제까지고 가슴만 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올해도 황 감독은 어쩔 수 없이 ‘쇄국축구 시즌2’를 시도 중이다. 그런데 전력은 뚝 떨어졌다. 작년 포항은 정규리그에서 63골을 넣었다. 이 가운데 1/3 가량을 챙겨준 이들이 전부 포항을 떠났다. 20골 이상을 합작한 박성호-노병준-황진성 등이 사라졌다. 20골 정도면 최소 6승을 추가할 수 있는 기록이라는 게 황 감독의 설명이었다.
지난 8일 K리그 개막전 포항 스틸러스-울산 현대 간 경기에서 울산 김신욱과 포항 김광석이 공중볼을 다투고 있다. 이날 포항은 0-1로 패했다. 연합뉴스
다시 한 번 황 감독은 지난 시즌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제로(0) 톱’ 카드를 꺼내들 참이다. 스스로 이를 자신의 히든카드라고 했다. 특정 공격수를 세우지 않고 모든 선수들의 공격 본능을 최대한 이끌어내는 게 관건인 이 전술은 스페인이 유럽과 세계를 제패할 때 사용한 전략이었다. 하지만 포항과 스페인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스페인은 워낙 걸출한 공격수들이 많은 반면, 포항은 ‘울며 겨자 먹기’로 도입한 탓이다. 포항에 스트라이커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고무열-조찬호-배천석-신영준-김승대 등 포워드(FW) 포지션으로 등록한 선수들이 있다. 단, 무게감은 다소 떨어진다. 이들 중 몇몇은 미드필더 자원이었다. 동계훈련부터 지금까지 줄곧 황 감독이 부르짖는 것 역시 다양한 포지션 소화가 가능한 ‘멀티 플레이’와 ‘탤런트 기질’이다.
# 변방도 투자하는데
최근 포항은 태국 부리람으로 2014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이하 ACL) 조별리그 원정을 다녀왔다. 태국 프로축구의 맹주를 자처하는 부리람 유나이티드와의 대회 예선 2차전에서 포항은 2-1로 승리를 거뒀다. 정말 쉽지 않았다. 찌는 듯한 무더위와 일방적인 홈 팬들의 열광 속에 어려운 90분을 보냈다.
황 감독은 ACL에 대해 “지도자를 하면서 유일하게 우승을 맛보지 못한 대회”라면서 “정말 우승하고픈 욕심이 크다”고 털어놨다. 선수로 뛸 때 황 감독은 포항이 지금까지 올린 AFC 주관 클럽 대항전 우승 경력(3회) 중 2회의 타이틀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ACL이 아닌, 아시아 클럽 챔피언십 시절이다. 사실 황 감독 이외에도 ACL에 나서는 국내 프로팀 대부분이 “최대 목표를 꼽자면 당연히 아시아 정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포항은 어디에도 비중을 두지 못하고 있다. 목표를 명확하게 설정할 수 없다. 지금의 전력이 아시아를 석권할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여름 이적시장이 열리면 또 어떻게 상황이 바뀔지는 몰라도 지금은 아니다.
포항은 ACL 예선 2차전 태국 부리람과의 원정경기에서 2-1 진땀 승리를 거뒀다.
더욱이 ACL 예선에서 격돌하게 된 상대팀들은 만만치 않다. 대회 조추첨이 끝난 뒤 가장 쉬운 상대로 꼽혔던 부리람만 해도 굉장하다. 사령탑부터 국제적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셀타비고와 레알 라싱 산탄데르를 이끌었던 스페인 출신 알레한드로 메넨데스 감독이다. 용병들의 국적도 스페인, 잉글랜드, 일본 등 다양했다. 1970년 창단한 부리람의 투자도 아낌이 없다. 메인스폰서가 동남아 최고의 맥주 제조업체인 창(Chang)이다. 당연히 지원은 엄청나다. 부리람은 최근 3년간 태국 무대 3관왕을 두 번이나 달성했고, 지난해에는 무패 우승을 차지했다. 현지 최고 인기 클럽이었다. 적어도 부리람은 축구의 변방이 아니었다.
여기에 포항의 또 다른 상대인 연봉만 60억 원대로 추정되는 우루과이 특급 공격수 디에고 포를란이 버티는 세레소 오사카(일본)의 반격도 무시무시하다. 오히려 최근 들어 가장 강력한 투자를 하는 산둥 루넝(중국)이 그나마 가장 해볼 만한 상대로 비칠 정도다.
태국 방콕을 거쳐 육로로 5시간 이상 소요되는 부리람에서의 혹독한 4박 6일을 보낸 황 감독의 입에서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포항 선수단 일행 중 누군가는 “부리람도 저렇게 투자하는 걸 보니 너무도 마음이 아프다”라고 했다. 2013년이라는 큰 산을 넘어 2014년이라는 훨씬 큰 산을 마주한 포항은 이래저래 힘겹기만 하다.
태국 부리람=남장현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