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잉글랜드의 프리미어리그 소속 구단들이 유럽대항전 세 대회의 트로피를 모두 가져갈 수도 있는 상황이다. 컨퍼런스리그가 창설된 2021-2022시즌 이래 잉글랜드 구단이 동시에 3개 대회에서 모두 결승에 오른 것은 처음이다.
최고 권위 대회인 챔피언스리그는 경쟁이 치열하다. 이번 시즌 프리미어리그 6개 팀이 리그 페이즈를 뚫고 16강에 올라 눈길을 끌었으나 결국 4강까지 오른 팀은 아스널 하나였다. 레알 마드리드, 파리 생제르맹,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등 전통의 강호들을 극복해 내지 못했다.
지난 역사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챔피언스리그에서 지난 20년간 프리미어리그 구단의 우승 횟수는 5회에 그친다. 기회는 더 많았으나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 등을 상대로 무너졌다. 우승 5회 중 3회는 프리미어리끼리 맞붙은 결승에서 나왔다.
하위 대회의 경우 다소 상황이 다르다. 최근 들어 프리미어리그 구단이 결승에 올라 우승까지 차지하는 케이스가 많아지고 있다. 특히 창설 5년 차를 맞은 지난 네 번의 컨퍼런스리그에서는 프리미어리그 구단이 2회 우승(웨스트햄, 첼시)을 차지했다.
#지갑 두께가 만든 격차
프리미어리그의 자본력은 빅리그로 불리는 스페인 라리가, 독일 분데스리가 등과 격차를 벌린 지 오래다. 잉글랜드 1부리그는 프리미어리그로 간판을 바꿔단 1992년 이후 상업적 성공을 거듭해왔다. 잉글랜드 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관심을 받는 리그로 변모했다. 자연스레 중계권과 스폰서 수익 등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스타플레이어가 점점 더 모여들었다.
이는 현재 리그 내 선수단 가치에서도 격차를 만들었다. 이적 시장 정보 사이트 '트랜스퍼마크트'에 따르면 프리미어리그 내 선수들의 시장가치 합계는 125억 8000만 유로(약 22조 원)다. 시장가치 10억 유로(약 1조 7470억 원) 이상의 구단만 4개다.
반면 라리가는 56억 3000만 유로(약 9조 8340억 원), 이탈리아 세리에A는 53억 3000만 유로(약 9조 3100억 원), 분데스리가는 50억 2000만 유로(약 8조 7660억 원), 프랑스 리그앙은 43억 8000만 유로(약 7조 6480억 원)를 기록 중이다. 이들 4개 리그에서 선수단이 10억 유로 이상의 가치로 평가받는 팀은 레알 마드리드, 파리 생제르맹, 바르셀로나 3팀뿐이다. 바이에른 뮌헨, 인터밀란 등은 이에 미치지 못한다.
단순 선수단 가치에서만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이 쓰는 예산의 격차는 더 벌어지기도 한다. 컨퍼런스리그 결승에 진출한 크리스털 팰리스는 이번 시즌 두 차례 이적 시장에서 총 1억 4500만 유로(약 2532억 원)를 지출했다. 에베레치 에제를 7000만 유로(약 1222억 원)에 가까운 거액에 판매, 수익을 올리면서 예년에 비해 지출이 늘었다.
반면 결승전 상대인 스페인의 라요 바예카노는 이적 시장에서 700만 유로(약 122억 원)만을 사용했다. 한 대회 결승전의 맞대결 상대라기엔 민망한 격차다. 라요의 이번 시즌 최대 지출은 중앙 공격수 알레망을 영입하면서 투자한 450만 유로(약 78억 원)였다. 팰리스의 경우 예르겐 스트란 라르센 한 명의 영입에만 4970만 유로(약 866억 원)를 쏟아 부었다.
유로파리그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애스턴 빌라는 이번 시즌 이적 시장에서 7050만 유로(약 1229억 원)를 썼다. 상대팀 프라이부르크는 3270만 유로(약 570억 원)에 그쳤다. 팰리스와 라요만큼의 격차는 아니지만 두 배 이상의 차이를 보였다.

팰리스의 경우 리그 중하위권을 오가는 팀이다. 2013년 프리미어리그로 승격한 이후 단 한 차례도 10위 이내 성적을 기록한 적이 없다. 지난 시즌에는 12위를 기록했고 이번 시즌은 그보다도 낮은 순위에서 경쟁하고 있다.
그럼에도 금전적 위상만큼은 타 리그 상위권 클럽 못지않다. 이번 시즌 영입한 측면 공격수 예레미 피노(이적료 3000만 유로)의 이전 소속팀은 비야레알이다. 직전 시즌 라리가 5위에 오른 상위권팀의 에이스를 팰리스가 품은 것이다.
이전부터 이 같은 현상은 지속돼왔다. 프리미어리그는 최하위권팀조차도 큰돈을 굴릴 수 있게 됐다. 상위권의 경우 유럽 내 경쟁력이 유지되고 있으나 하위권으로 갈수록 프리미어리그가 독보적인 형국이다.
승격팀인 리즈 유나이티드, 번리 등 규모가 작은 구단들도 이번 시즌을 준비하면서 1억 유로(약 1749억 원) 이상을 썼다. 선수들은 돈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 과거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이적이 현실에서 이뤄지고 있다. AC밀란(이탈리아), 라치오(이탈리아), 호펜하임(독일) 등 각국 상위권 팀에 있는 선수들이 프리미어리그의 승격팀으로 이적하는 선택을 했다. 반면 라리가 승격팀 레반테는 선수 영입에 550만 유로(약 96억 원)를 쓰는 데 그쳤다. 오히려 승격에 힘을 보탠 선수를 타 팀에 빼앗기며 이적료 수익이 올랐다. 이적 시장에서 30만 유로(약 5억 원)의 흑자를 냈다.
앞서 지난 2021년 유럽 축구는 '슈퍼리그' 창설 움직임으로 떠들썩했다. 현대의 리그 체계로는 상업적 성공 등을 지속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유럽 내 20개 빅클럽이 자신들만의 리그를 창설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유럽 현지의 팬들과 각국 축구연맹, UEFA 등의 반발로 실현되지는 못했으나 적지 않은 파급력을 가져왔던 계획이었다.
하지만 프리미어리그는 자체적으로 '슈퍼리그'로 변모하는 모양새다. 2015년 17억 파운드(약 3조 4290억 원) 내외의 중계권 수익을 올리던 프리미어리그는 지난 10년 사이 이를 거의 두 배로 끌어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자연스레 각 구단 수익도 늘어났다. 스폰서십, 유니폼 판매 등 상업적 수익의 성장세는 더 가파르다.
현대 스포츠에서 상업적 성공에 성적이 꼭 따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 중요성은 점점 더 강조되고 있다. 프리미어리그는 연이은 수익 증대로 타 리그를 따돌리고 있다. 최상위권에서는 여전히 유럽을 선도하는 빅클럽과 경쟁하고 있다. 하지만 중위권 이하에서는 판이 다르다. 중하위권 구단조차 타 리그 상위권 구단에 앞서는 재정 능력을 자랑한다. 유로파리그, 컨퍼런스리그에서 잉글랜드 구단의 존재감이 커지는 현상은 일시적 돌풍이라기보다 축구 자본 지형이 바뀐 결과에 가깝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