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5일 전격 경질돼 이임식에 참석한 윤영관 전 외교부 장관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정찬용 청와대 인사수석은 15일 윤영관 장관 경질 발표를 하면서 “보안을 요하는 일부 정보들을 사전 유출시킴으로써 정부의 대외 외교 정책에 훼손과 혼선을 초래했다”면서 “이런 사실에 대한 조사 과정에 대해서도 또다시 이를 언론에 누출하는 등 정부의 기강을 흔드는 일을 자행했다”고 말해 이를 뒷받침했다.
당초 청와대가 국가 외교 안보와 관련된 사안이어서 조용히 처리하려 했다가 장관 전격 경질까지 간 데는 외교부 해당 직원들이 마지막까지도 청와대 조사에 대한 비판적 여론을 형성하려는 언론플레이에 급급한 데 대한 ‘응징’ 성격이 짙다.
노대통령이 14일 연두 회견에서 유독 이번 사건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격앙된 어조로 ‘인사 조치’를 예고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청와대가 ‘열받은’ 진짜 이유가 바로 외교부의 언론플레이였다는 게 청와대 관계자들의 한결같은 설명이다. 이들의 증언을 토대로 이번 파문의 전말을 추적해봤다.
[첫보도]
이번 파문이 시작된 계기는 지난 11일 KBS <9시 뉴스>의 보도였다. KBS는 “청와대 민정수석실과 국가정보원이 외교부 대미 외교라인 10여 명에 대해 대통령에 대한 실언을 했는지 여부를 집중 조사했다”고 보도했다.
KBS는 이어 “이 같은 집중 조사가 이뤄지면서 대미 외교라인은 일손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면서 “용산기지 이전 관련 대미 협상에 나서야 하지만 이번 조사로 사기가 크게 저하된 상황”이라고 외교부측 입장만 고스란히 전달했다.
이 보도만 놓고 보면 다분히 조사를 받던 외교부 직원들이 살아남기 위해 의도적으로 조사 사실을 흘린 것으로 오해받을 여지가 적지 않았다. KBS 보도가 나간 직후 청와대 민정수석실 관계자는 곧바로 해당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하려 했으나 당시에는 전화 연결이 안 됐다고 한다.
청와대 민정수석실 관계자는 “우리는 조사가 해당 직원들 문제에 그치지 않고 참여정부,더 나가서는 대미 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어 가급적 조용히 처리하려고 했었다”면서 “오히려 우리가 먼저 언론에 조사 사실을 밝히고 협조를 요청하려고도 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렇지만 KBS는 우리에겐 단 한 차례 확인 전화도 없었다”고 했다.
▲ 지난 14일 신년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 이때까지만 해도 청와대엔 ‘관용론’이 대세였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KBS 보도 직후 12일자 조간 신문은 일제히 KBS보도를 그대로 인용하며 청와대측에 상당히 비판적인 논조를 보였다. ‘청와대가 외교부를 조사할 권한이 있느냐’는 투였다.
실제 12일자 조간 신문 제목을 살펴보면 한결같이 청와대 조사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담고 있었다. ‘盧, 심기 건드린 괘씸죄’(동아) ‘사석 발언까지…과잉대응 논란’(국민) ‘靑, 외교부 군기잡기 나섰나’(조선,중앙) ‘靑, 외교부 제압 나섰나’(한국) 등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 한결같이 청와대가 사적인 발언까지 문제 삼아 과잉 대응을 하고 있다는 식의 기사였다.
이 같은 현상은 이날 대부분의 외교부 출입 기자들이 기사를 작성하면서 외교부 직원의 발언을 주로 인용했고 반면 청와대는 기자들 취재에 함구로 일관한 데서 비롯됐다. 외교부 직원들은 “술자리에서까지 하고 싶은 말을 못한다면 그게 과연 사람 사는 동네냐”면서 이 잡듯 외교부를 뒤진 청와대 조사 방식 등을 거론하면서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특히 이들은 이번 조사가 정보유출이나 대통령에 대한 험담 문제가 아니라 대미 외교정책 노선을 둘러싼 NSC 자주파와의 ‘정책적’ 갈등에서 비롯된 것인 양 ‘물타기’를 시도했다는 게 청와대 시각이다.
윤태영 청와대 대변인은 12일 오후가 돼서야 “외교사항과 관련해 일부 공무원이 묵과하기 어려운 수준의 부적절한 언사가 있었고, 때때로 직무관련 정보가 누설되고 있어 그 부분에 대해 (민정수석실에서) 조사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다음날 조간 신문에는 여전히 외교부 직원들의 불만과 정치권의 비난이 도배질됐다.
이 때문에 “술자리에서 한 말까지 조사를 하고 기자의 전화통화 내역까지 뒷조사했다”는 비판에 직면하면서 청와대는 상당히 코너에 몰리게 됐다. 야당도 일제히 “유신독재하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라며 강력 비난하고 나선 상황이었다.
[전세 역전]
이 같은 상황은 13일 조간 신문을 본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정면 반격을 가하면서 급반전되기 시작했다. 기자들 접촉을 극히 꺼리던 민정수석실 관계자는 이날 아침 한 석간신문에 “도저히 그냥 참고 있을 수가 없다”면서 “몇 가지 사실이 아닌 주장을 바로 잡아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른다.
이 관계자는 그러면서 외교부 직원의 부적절한 발언이 ‘사석’이 아닌 공식 회의석상에서 반복적으로 이뤄졌음이 확인됐다면서 구체적인 사례까지 공개했다. 그러면서 일부 국가 안보와 관련된 ‘정보 유출’ 행위도 있었다고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밝혔다.
민정수석실도 자칫 외교부 직원들의 ‘플레이’에 청와대가 욕만 먹고 완패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 때문이었는지 적극적으로 언론플레이에 나선 것이다. 민정수석실이 대통령에 대한 외교부 직원들의 위험 수위를 넘는 발언과 함께 ‘국가안보’와 관련한 정보 유출 사실을 언론에 흘리면서 언론 논조도 다소 중립지대로 옮아가는 듯했다.
이에 따라 청와대도 점차 공개 수위를 높였다. 오전 10시 윤 장관 경질 발표가 이뤄지기 직전 청와대 민정수석실 관계자는 “아직도 외교부 직원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언론플레이만 하고 있다”며 분노를 표출했다.
청와대는 그래도 분이 안 풀렸던 모양이다. 정찬용 인사수석은 윤영관 장관 경질 발표 직후 청와대 출입 기자들과 점심을 같이하면서 “노 대통령과 NSC 핵심들은 가방끈이 짧아서…” “자주파는 갈아마셔버려야 한다”는 등의 ‘공개하기 힘든’ 부적절한 발언 내용까지 공개해 ‘확인 사살’까지 했다. 정 수석의 마지막 일침으로 양측간 언론플레이는 힘을 가진 청와대의 완승으로 끝났다.
결국 외교부 일부 직원들은 조용히 있었으면 그냥 ‘구두 경고’ 정도로 끝났을 일을 어설프게 언론플레이를 했다가 된통 당한 격이 됐다. 실제로 그동안에도 이 같은 정보 유출 등에 대해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몇 차례 조사를 거쳐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그때마다 ‘구두 경고’ 정도로 넘어갔다고 한다.
[초강수 노림수]
5일 윤 전 장관의 사표를 수리하기 직전까지도 청와대의 대체적 기류는 “설마 장관까지 바꾸겠나”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당초 청와대 일부 참모들은 노 대통령이 14일 연두회견 때까지도 외교부 직원들에 대한 중징계를 직접 천명하지 말도록 건의했다고 한다. 오히려 노 대통령이 관용을 베풀 경우 국민적 지지가 상승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 회견 직후에도 여전히 외교부 직원들은 언론을 상대로 한 플레이만 주력했고, 이것이 청와대의 기류를 강경으로 완전히 기울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날 저녁 청와대 고위관계자가 윤 전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사표를 종용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물론 청와대의 강수는 코앞에 닥친 총선을 앞두고 자칫 공무원들의 기강 해이가 심각해질 수 있다는 점도 감안한 듯하다. 재신임 카드까지 던진 상황에서 정치권 기류에 민감한 공무원들을 미리 다잡을 필요가 있다는 인식 때문이라는 것이다. 노 대통령으로선 이 같은 강수가 향후 실보다 더 많은 이득을 가져올 것이라는 손익계산을 한 것으로 보인다.
조은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