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가 2세 이재용씨의 편법상속 의혹에 대해 검찰이 수사 유보쪽으로 무게를 싣고 있다. 사 진은 지난해 한국시리즈를 관전하는 이재용씨. | ||
“검찰 내부에서 나라 경제를 살펴가며 수사를 해야 한다는 ‘경제상황론’이 검찰은 법대로 수사해 처벌하면 그만이라는 ‘정도 수사론’을 이긴 결과다.”
검찰이 최근 ‘삼성 에버랜드 편법증여 의혹’고발사건에 대한 연내 처리 방침을 뒤집어 장기 수사체제로 전환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그 배경을 놓고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 등 논란이 일고 있다. 서울지검의 한 간부는 지난 13일 공식 브리핑 시간에 에버랜드 수사와 관련한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면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등 피고발인들에게) 배임액이 50억원 이하여서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이하 특경가법)상 배임죄를 적용할 수 없다면 사실상 형사처벌이 어렵다”고 밝혔다.
그의 발언은 한동안 특경가법보다 처벌 수위가 낮은 일반 형법상 업무상배임죄 적용 가능성을 배제했다는 점에서 보다 ‘강경한 수사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잘못 해석됐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검찰 수사팀의 진의가 ‘가중처벌’ 보다는 특경가법상 배임죄의 공소시효가 3년 이상 남은 점을 근거로 ‘수사 유보’쪽에 무게를 실은 것임이 분명해지고 있다.
배임액이 ‘50억원 이하’일 때 적용 가능한 형법상 업무상배임죄의 공소시효는 올해 12월로 끝나는 반면, ‘50억원 이상’일 때 적용하는 특경가법상 배임죄는 공소시효가 10년이어서 2006년 말까지 남아 있다. 따라서 배임액이 ‘50억원 이상’일 경우만 처벌할 수 있다는 전제는 올해를 넘겨 수사할 수 있다는 논리로 귀결된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왜 에버랜드 사건이 다시 문제가 되는지 사건의 발단부터 되짚어보자. 에버랜드 사건은 지난 2000년 6월29일 곽노현 방송통신대 교수 등 법학교수 43명이 “이건희 회장 등이 에버랜드 전환사채(CB)를 턱없이 낮은 가격에 발행해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며 이 회장과 에버랜드 이사진 등을 검찰에 고발하면서 불거졌다. 곽 교수 등은 “삼성측이 이 회장과 장남 재용씨(삼성전자 경영기획팀 상무) 사이의 편법 재산 상속을 위해 이런 일을 꾸몄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지난 1996년 10월 에버랜드(당시 중앙개발) 이사진은 자사의 62.5% 지분에 해당하는 전환사채를 주당 7천7백원에 발행했다. 에버랜드의 주식가치는 이보다 훨씬 높아 전환사채를 인수하기만 하면 엄청난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에버랜드의 주주인 삼성 계열사들은 전환사채 인수를 포기했다. 실권된 전환사채는 제3자인 재용씨와 그의 동생들이 96억원에 사들였고, 같은 해 12월 주식으로 바꿨다.
당시 에버랜드는 비상장사여서 주식의 적정가격을 산정하기 어렵지만, 회사의 자산가치는 약 4조3천억원에 달했던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결국 재용씨와 그의 동생들은 단돈 96억원으로 수조원에 달하는 회사의 1대 주주가 됐고, 반대로 기존 에버랜드 주주들은 가만히 앉아서 그만큼의 손해를 본 것이 된다.
하지만 곽 교수 등의 고발장은 그 뒤 3년여 동안 햇빛을 보지 못했다. 검찰은 “그동안 서울지검 특수부가 각종 ‘게이트’에 휘말리는 바람에 에버랜드 사건은 수사할 여력이 없었다”고 주장했지만 이를 곧이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어쨌든 올 초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 정부’ 출범 이후 검찰은 에버랜드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소환조사를 본격화하는 등 종전과 다른 행보를 보여왔다. 이에 대해 수사팀은 “배임액이 인정되면 특경가법 적용이 가능한 ‘50억원 이상’일 것이 분명하지만 혹시라도 나중에 재판부가 배임액 산정을 달리해 ‘50억 이상은 인정하기 어렵다’고 할 것에 대비해 일단 업무상배임죄를 기준으로 연말까지 기소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고 밝혀왔다.
검찰의 이런 기류는 최근까지 유지돼 지난달 중순경에는 전환사채 발행에 관여한 전직 삼성 계열사 임직원들을 소환조사하기도 했다. 특히 검찰은 12월 중 수사를 끝내기로 한 ‘로드맵’에 따라 이달 말부터 이사급 이상 현직 임원들을 차례로 부르기로 하는 등 수사 강도를 높일 것으로 관측돼 왔다.
그런데 불과 며칠 사이에 검찰 분위기가 확 바뀐 것이다. 이에 대해 검찰의 에버랜드 수사를 예의주시해온 시민단체 등은 “고발된 지 3년이 넘도록 처리를 미룬 채 시간만 끌어온 검찰이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시간을 더 끌려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특수부 검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검찰 설명대로 공소시효가 3년이 남았다고 쳐도 지금까지 수사를 미뤘으면 서둘러 할 생각을 해야하는데 가급적 천천히 하겠다는 태도가 엿보인다”며 “다른 사건들 같으면 이렇게 하겠느냐”고 일침을 놨다.
더욱이 검찰이 최근 어려운 경제사정을 감안해 수사를 미룬 것으로 알려지면서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검찰 내부에서는 “가뜩이나 수출 부진과 대검 중수부가 주도하는 SK 비자금 사건 수사 등으로 기업들이 바짝 얼어붙어 있는 마당에 거의 유일하게 수출 전선에서 선전하고 있는 삼성에 칼을 대는 것은 모양새로나 시점상 좋지 않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 관련해 서울지검의 한 부장검사는 “나라가 살아야 검찰도 있는 것인데 국가 경제가 어찌되든 수사를 하겠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수사 유보’ 방침에 동조했다. 반면, 참여연대 등은 “검찰의 이번 수사는 삼성그룹 자체를 처벌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변칙 상속을 위해 배임행위를 한 개개인의 책임을 묻기 위한 것”이라며 “검찰은 법대로 수사를 하면 되고, 정치권 등에서 해야 할 정책적인 고려까지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또 시민단체들은 “똑같이 비상장 주식을 이용한 변칙 증여가 문제가 된 SK 최태원 회장을 기소한 검찰이 삼성 경영진에게만 관대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형평성에도 어긋난다”며 “에버랜드 수사가 유야무야되면 앞으로 다른 재벌기업 수사는 무슨 명분으로 하겠느냐”고 우려를 나타냈다.
다른 한편으로, 순수한 법률적 관점에서 검찰 논리를 비판하는 견해도 있다. 한 검찰 관계자는 “SK 분식회계 사건 때 재판부는 에버랜드처럼 비상장사인 워커힐 호텔의 주식 스와핑과 관련한 경영진의 배임혐의에 대해 ‘비상장주식의 적정가격을 산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특경가법 대신 형법의 업무상배임죄만 인정했다”며 “에버랜드 사건 역시 재판부의 판단에 따라 배임액수가 50억원 미만으로 결론날 수도 있는데 수사팀이 특경가법 적용만 가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비판과 지적들에 대해 검찰 수사팀은 “공소시효에 여유가 있다는 판단에서 여유를 갖고 진득하게 수사하겠다는 것이지 수사를 포기하겠다는 것은 아닌 만큼, 결과를 갖고 판단해 달라”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이 수사 일정을 변경한 진짜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삼성그룹은 겉으로는 내색을 하지 않고 있으나, 속으로는 “잘된 일”이라며 쾌재를 부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측 사정에 정통한 한 법조인은 “삼성측은 모두 원칙주의자로 소문난 신상규 3차장과 채동욱 특수2부장으로 이어지는 현 수사팀에서 수사 결론이 나는 것을 원치 않는 분위기였다”며 “결과적으로 일단 시간을 벌고 보자는 삼성측 의도가 관철됐다”고 말했다.
이진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