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형 해운업체들 선박 이미지 합성.
수년째 이어지는 해운업 불황으로 국내 상위 해운업체들이 흔들리고 있다. 업계 3위였던 팬오션은 지난해 6월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신청했다. 4위 대한해운은 이미 법정관리를 통해 주인이 바뀌었다. 한진해운은 업계 1위를 지키고 있지만 지난해 말 기준으로 부채비율이 1444.7%에 이른다. 업계 2위 현대상선 역시 지난해 말 기준으로 부채비율이 1397%에 육박하며 부분 자본잠식에 들어갔다. 그동안 SK에너지를 비롯, 나름 SK그룹사의 안정적인 운송 물량을 갖고 있다고 평가받아 온 SK해운 역시 사정은 다르지 않다.
이들 대형 해운업체들은 경영난 해소를 위해 사업 매각 및 자금 지원 등을 통한 자구책을 내놓고 있지만,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고 있다. 이에 그들이 기존의 중점 사업 분야에서 눈을 돌려 비교적 쉽게 자금이 들어올 수 있는 다른 지역으로 사업의 무게 추를 옮기고 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대형 해운업체들이 그동안 중점적으로 취급해온 해운사업은 미주나 유럽 등지의 원양 해운이었다. 중국, 일본, 홍콩, 동남아시아 등 근해(아주역내) 운송은 중견 해운업체들이 주로 맡았다. 그러나 해운업체들의 경영사정이 어렵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 2012년 말부터 2013년 초를 기점으로 대형 해운업체가 기존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던 근해 운송에 사업적 무게를 싣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대형 해운업체들이 근해 운송에 대형 선박을 투입해 한 번에 많은 물량을 싣기 시작했고, 이에 경쟁이 심해지고 운임이 낮아져 기존의 중견 선사들에게 타격을 입히고 있다는 점이다. 중견 해운업체들은 대형 해운업체들이 시장 질서를 흔들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견 해운업체 A 사 관계자는 “전 세계적으로 원양 해운 선박의 크기를 키우는 추세다. 한진해운이나 현대상선 등 국내 대형 해운업체도 선박 사이즈를 키워왔다. 그러다보니 기존의 원양 해운을 하던 선박이 남게 됐다. 그런 선박들이 아시아 인근 해운 시장으로 진입한 것”이라며 “그런 선박들은 원양에서는 작은 편에 속하지만 근해 해운에서는 대형이라 싼 가격에 많은 양을 실을 수 있게 됐다. 공급 과잉으로 저가운임이 남발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중견 B 사 관계자는 “대형 해운업체들이 동남아시아 해운 시장은 규모가 작아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가, 정작 불황으로 자신들이 경영사정이 어려우니까 근해 해운까지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형 해운업체들의 말은 다르다. 한진해운 관계자는 “원양 해운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동남아 등 근해 운송도 과거부터 조금씩 해오던 사업이다. 근래 들어 근해 해운업을 강화하거나 공격적으로 확장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현대상선 관계자 역시 “중견 해운업체들의 근해 해운 시장 침해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그런 문제가 있었다면 이미 한국선주협회나 한국근해수송협의회 등에서 자정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겠느냐”고 반문했다.
한편 대형·중견 양측 모두 직면한 더 큰 문제는 오히려 외국 해운업체들의 압박이라는 데는 입을 모았다. 앞서의 A 사 관계자는 “세계 5위 해운사인 중국 코스코나 대만의 에버그린 등 아시아국의 해운업체들이 큰 규모를 앞세워 국내 해운업체들을 압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국내 해운업계 1, 2위를 차지하는 한진해운과 현대상선도 국제시장에서는 8, 15위 수준을 유지할 뿐이다.
심지어 세계 해운업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3개 업체들이 동맹을 맺어 글로벌 시장을 지배할 준비까지 하고 있다. 세계 1, 2, 3위 컨테이너선사인 머스크(덴마크), MSC(프랑스), CMA-CGM(스위스)가 연합해 만든 ‘P3네트워크’가 지난 3월 24일 미국 연방해사위원회(FMC)에 출범을 공식 승인받은 것이다. 이들의 선복량(적재능력)은 260만TEU로 전 세계 해운물동량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올해 2분기부터 이들은 250여 척에 이르는 선박을 투입해 전 세계적으로 운송물량을 확보해나갈 것으로 알려졌다.
B 사 관계자는 “P3의 연맹 회사들은 모두 유럽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이제 승인을 받은 단계이기 때문에 이들이 어떻게 사업 영역을 확대해나갈지는 알 수 없다”면서도 “하지만 P3 업체들이 연합을 한 목적이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선사들에 대한 견제라는 해석이 나오는 만큼 아시아 해운 시장에 진출하지 않겠느냐. 이들마저 아주역내 시장에 뛰어들어 대규모 물량운송과 저가운임으로 경쟁한다면 한진해운, 현대상선 등 대형 해운업체뿐만 아니라 중견 선사들도 버티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재계에서는 해운업이 올해 상반기만 넘기면 다시 살아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러나 글로벌 해운 시장이 덩치를 키우는 상황에서 국내 해운업체들이 외국 해운업체들과 겨뤄 경영난에서 벗어나는 것은 둘째 치고 생존할 수 있을지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P3뿐만 아니라 중국 등 아시아 해운업체들도 해운동맹을 통해 대형화를 계획하고 있다. 그런데 국내 해운업체들은 경영난 타개를 위해 핵심 사업들마저도 매각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한진해운과 현대상선도 올해 초 알짜 사업이라고 할 수 있는 액화천연가스(LNG) 전용선 사업부 등을 시장에 매물로 내놔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해운업이 좋아진다고 해도 국제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지는 걱정”이라고 말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