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을 이겨던 사람들은 대부분 암을 친구처럼 익숙한 존재로 받아 들이는 긍정적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방사선 치료이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여행 등 취미생활을 즐기는 것도 좋다고 한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내용과 관련없음. 일요신문 DB
1. 암과 친구가 된 사람들
“참 신기하죠. 내 몸에 암이 있다는 것을 몰랐을 땐 아무렇지도 않게 잘 살아와놓고 유방암 진단을 받으니 그렇게 절망적일 수가 없었어요. 사실 그전부터 암과 함께였는데 말이죠.”
일주일 밤낮을 울고서야 깨달음을 얻었다는 유 아무개 씨(여·57)는 그때부터 암을 바라보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한다. 유 씨는 “완치판정을 받았지만 언제 다시 재발할지 모르는 게 암이에요. 평생을 전전긍긍하며 사느니 암과 친구가 되자 마음먹었죠. 내 몸에 사는 조금은 고약한 세입자이긴 하지만 소유권만 넘겨주지 않으면 어쩌겠어요. 이제 안방은 굳게 지키고 암이란 세입자와 잘 살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해요”라며 지금은 행복하다고 말했다.
물론 암을 나의 일부로 인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암 선고를 받으면 사람들은 대부분 ‘왜 하필 내게…’라며 일단 절망하며 회피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런 무기력을 이겨내고 암을 인생의 동반자이자 친구로 받아들인 사람들도 많다. 부모님에 이어 자신도 암에 걸린 박 아무개 씨(여·43)도 그런 경우다.
“부모님이 동시에 위암 환자가 되고 난 1년 후 저 역시 위암 판정을 받았어요. 부모님은 당신들 탓이라고 난리가 났었죠. 하지만 전 부모님 덕분에 이미 암과 친해졌는지 긍정적인 생각만 하려 노력했어요. 암이란 녀석이 유독 우리 가족을 좋아하니 친구가 돼보자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어요. 비록 충격이 크셨던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오랜 설득으로 아버지도 생각을 달리하셔 저와 장난도 치며 암을 이겨내고 있습니다. 저를 보고 암 환자 모두가 힘을 냈으면 좋겠어요.”
2. 취미생활에 빠진 사람들
바쁜 일상에서 늘 ‘나중에’로 미뤄뒀던 취미생활을 암에 걸려서야 실천하는 사람도 많았다. 암을 인생의 업그레이드 기회로 활용하는 사람들이다. 암이 인생의 종말이 아니라 제 2의 인생을 설계하기 위한 새로운 출발점으로 보는 시각이다. 또한 새로운 취미는 여러모로 투병생활에 도움이 된다. 고통스러운 통증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진통제가 되어주고 색다른 경험으로 삶의 활력소가 되기도 했다.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로 유방암 3기 진단을 받은 박경희 씨도 그랬다.
“레지던트 시절 암 진단을 받고 슬프고 억울하고 때론 절망적이기도 했어요. 가장 힘들었던 것을 불안한 감정이었죠. 하지만 마냥 슬퍼만 할 순 없어 집 근처 백화점 문화센터를 다니며 그림, 손뜨개질, 꽃꽂이 등등 가리지 않고 열심히 배웠어요. 그동안 보고 싶었던 드라마와 영화도 몰아보며 즐겁게 지내도록 노력했어요.”
현재 박 씨는 일상생활에 복귀한 상태로 완치를 기다리는 3년 차 생존자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앞만 보고 달렸던 김 아무개 씨(30)도 위암 3기 판정에 가장 먼저 은행을 찾았다. 김 씨는 “적금을 깨 정말 사고 싶었던 자동차를 샀어요. 여행이 취미인데 시간과 돈 때문에 항상 미루기만 했었는데 그럴 이유가 없어졌죠. 비록 첫차를 샀다는 기쁨을 맘껏 누리진 못했으나 여행을 떠날 때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행복했어요. 여행의 즐거움으로 방사선 치료의 고통을 이겨냈고 이제 곧 완치판정을 받습니다”라고 말했다.
3. 가족과 함께하는 사람들
암은 인간을 공포로 내몬다. 자신에게만 찾아온 불행에 대해 슬퍼하고 분노한다. 당연히 사람들도 멀리하게 된다. 사랑하는 가족들도 원망하며 미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을 이겨낸 사람들에게 가족이란 존재는 ‘꼭 살아야 하는 이유’ 그 자체다. 100명의 투병기에 가족이 언급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정도였다. 2004년 위암으로 길어야 6개월을 살 수 있다는 판정을 받은 김 아무개 씨(50)는 잊고 살았던 아버지가 가장 먼저 생각이 났다고 한다. 딱 자신의 나이에 위암 판정을 받으시고 불과 석 달 만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 절망에 빠져 손 쓸 틈도 없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며 김 씨는 “절대 나는 그래선 안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의 곁엔 사랑하는 아내와 두 자녀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신처럼 우리 아이들도 평생 후회 속에 살지 않게 당신이 도와줘”라는 아내의 한마디도 큰 힘이 됐다. 김 씨는 그들의 바람대로 마지막까지 가족들을 위해 최선을 다한 ‘행복한 가장’이 되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생존율 10% 미만의 확률에 모든 것을 걸었던 김 씨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가족들의 든든한 기둥이 되어주고 있다.
그토록 바라던 대학의 입학통지서를 받아든 이튿날 위암 판정을 받은 김 아무개 씨(여·24)도 오로지 부모님을 위해 힘든 항암치료를 이겨냈다. “사람들은 대학도 못 가고 연애 한 번 못해보고 죽게 됐다며 슬퍼했지만 난 그런 것엔 미련이 없었어요. 피를 토하는 딸을 바라보던 부모님의 눈빛, 당신이 대신 죽게 해 달라 기도하는 부모님의 목소리만 보고 듣고 이를 더욱 악 물었죠. 부모님의 딸이니까, 그러니까 더 살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4. 의료진과 하나 된 사람들
“갑상선암입니다. 당장 수술해야 합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불과 7개월 앞두고 양궁대표팀을 이끌었던 문형철 감독(56)은 청천병력과 같은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4년을 준비한 선수들에게 폐가 될 수 없었던 문 감독은 모든 것을 의료진에게 위임했다. 그렇게 문 감독은 자신이 몇 기 암인지도 모른 채 수술대에 올랐다.
문 감독은 여러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수술도 병원 문이 열기 전인 오전 8시에 받을 정도로 시간이 없었어요. 하지만 의료진을 믿었기에 수술을 앞두고 별 걱정은 하지 않았어요. 그 믿음은 다 잘 될 거라는 생각, 이렇게 죽지는 않을 것이란 막연한 자신감이 생기게 했어요. 명대로 살겠지 싶은 초연한 마음을 가지는 데도 도움이 돼 내가 해야 할 일에 더 몰입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죠”라고 말했다.
같은 해 대장암 3기 진단을 받은 이해인 수녀(여·68)도 치료를 결정한 뒤론 의료진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해인 수녀는 이름이 알려진 덕분인지 여기저기서 암에 좋다는 갖가지 좋은 식품과 무료로 고쳐주겠다는 민간치료센터의 제안이 넘쳤다. 하지만 좋은 음식들은 지인들에게 나누어주고 너무 비싼 선물은 돌려보냈다. 자신은 오로지 주치의의 지시에 따른 표준 치료만 받았다. 의료진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위의 두 사람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극복수기에서도 의료진에 대한 믿음은 상당히 중요한 부분으로 작용했다. 어디서 치료를 받든, 한 번 결정한 의료진은 끝까지 믿어야 스스로도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또한 주변의 여러 가지 충고에 쉽게 마음을 바꿔 치료효과가 검증되지 않은 민간요법을 시도하다 병이 악화되는 일도 막을 수 있었다.
5. 감사함을 잊지 않는 사람들
내게 남은 인생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범사에 감사하는’ 대범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대부분 그렇지 않다. 원망과 탄식 속에 자신의 모든 것을 절망의 구렁텅이 속으로 몰아넣는다. 하지만 시련은 인간을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그런 게 인간이다. 암이라는 모진 시련을 받는 사람들도 그렇다. 이해인 수녀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투병을 시작하면서는 불안하고 두려워하기보다 죽음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느낄 시간이 내게 주어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 시간을 즐겨야겠다고, 죽음을 즐겁게 준비하는 시간으로 삼겠다고 마음먹었죠.”
그리곤 모든 일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수술이나 치료 때문에 극심한 고통을 앓고 난 후에는 스스로 신발을 신고 걸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고통을 줄여주는 약이 있다는 것도 고마운 일이었으며 마음을 편히 해주는 음악 한 소절에도 절로 감사한 마음이 넘쳤다. 유서도 쓰고 영정사진도 찍어 놓으면서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되새기는 것이다.
대장암 4기로 이해인 수녀보다 병증이 심각했던 전 아무개 씨(35)도 “기본을 실천하고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혹자는 치료는 의사가 하는 거지 암을 치료하는 데 마음가짐이 뭐가 중요하느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암 환자를 바로 곁에서 보는 의료진들은 하나같이 그 일상의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하루에도 수십 명의 암 환자를 만나는 한 대학병원 영상의학과 간호사는 “암도 환자의 성격을 닮는 것 같다. 우리끼리 ‘순둥이처럼 해맑은 환자는 암세포도 착해서 약발도 치료발도 잘 받는다’는 말을 자주 한다. 누구나 암 치료는 고통스럽다. 하지만 의료진에게 무작정 짜증을 내는 환자가 있는가하면 연신 감사 인사를 전하는 분도 있다. 그게 어찌 쉬운 일이겠느냐마는 기왕에 닥친 일이라면 암과 즐겁게 같이 사는 방법을 생각해보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게 치료효율 면에서는 훨씬 낫다. 어차피 누구나 죽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
암 환자들의 버킷리스트 2. 평소 꿈꾸던 직업 가져 보기-꿈이 하루쯤 이뤄져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아보는 것. 3. 돌잔치-수술 후 1년째 되는 날을 ‘돌’로 정하고 자축하기. 4. 여행-가장 고전적인 방법이지만 가장 마음에 와 닿는 힐링 효과. 5. 마음껏 먹고 놀기-암 환자들이 바라는 것은 의외로 단순하다. 6. 고향집(태어난 곳) 가보기-추억은 언제나 삶의 활력을 줄 수 있다. 7. 호스피스 자원봉사 해보기-자신보다 더 절박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생명의 소중함을 경험해본다. 8. 템플 스테이-나를 조용히 되돌아보는 것은 암 환자들이 맨 처음 해야 할 중요한 ‘리셋’과정. 9. 가족사진 찍기-얼마나 많은 가족들이 모여서 사진을 찍었을까. 10.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소원 하나 들어주기-그냥 받기만 했던 가족들의 사랑에 대한 작은 보답 하나쯤. |
꼭 지켜야 할 3대 금기 스스로를 괴롭히지 마라 암 판정을 받은 후 건강관리를 못했다는 자책감을 갖지 말아야 한다. 자책감은 암을 이겨내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이다.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혼자가 되지 말라 암세포보다 무서운 존재가 있었다고 말한다. 바로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이다. 2009년 위암 3기 판정을 받은 박 아무개 씨(54)는 투병 초반엔 “내게 왜 이런 시련이 왔을까”라는 생각에만 빠져있었다. 극심한 우울감에 사람들을 만나는 것조차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결국 대인기피증까지 생겨 병원에 가는 일마저 힘겨워지는 상황에 이르렀다. 박 씨는 “친구들이 절 살렸습니다. 아무리 밀어내도 친구들이 번갈아 찾아와 정신과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도와줬어요. 차츰 밖으로 나오니 가족, 친척들과도 대화를 많이 하게 됐고 그때부터 치료 효과도 눈에 띄게 좋아졌어요. 아마 그대로 뒀으면 암이 아닌 자살로 생을 마무리 했을 지도 몰라요. 심한 충격과 고통스러운 치료 생활을 혼자 견디긴 힘들어요. 무조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어야 해요”라고 말했다. # 자책하지 말라 암 환자 대부분은 투병 초반에는 복합적인 감정을 느낀다고 한다. 불안, 우울, 공포, 분노는 물론이고 몸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자책감마저 든다고. 이 자책감은 암을 이겨내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이다. 극복 의지를 애초부터 잘라버리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2004년 간암으로 중국에서 간 이식 수술까지 받은 송지헌 아나운서(63)도 마찬가지였다. 송 아나운서는 “처음엔 자책감에 괴로웠으나 이내 생각을 달리 했지요. 암은 누구나 걸릴 수 있는 병이다. 비록 몸 관리는 안 했으나 그렇다고 혹사를 시키거나 괴롭히지도 않았다고 생각했어요. 그저 저는 열심히 살았을 뿐이라고 다독였죠. 그랬더니 암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이겨내기 쉬웠어요”라며 스스로를 괴롭히지 말 것을 당부했다. # 포기하지 말라 26살, 젊은 나이에 위암 3기 판정을 받은 김 아무개 씨(32)는 수술 이후 항암치료를 받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몸은 김 씨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온갖 부작용에 결국 항암치료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 김 씨는 “부모님께서 저와 눈을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살이 빠졌었어요. 곧 죽을 아이 같아 보기 두려우셨다고 해요. 그런데 전 제가 스스로 포기가 안 되더라고요. 이렇게 짧게 살다가기 억울했어요. 항암치료 대신 의지만으로 이겨내자 다짐했죠. 스트레스를 최대한 받지 않으려 노력했고 당당히 완치 판정을 받았어요. 포기하지 말라는 평범한 한마디가 최고의 치료제였죠”라고 말했다. [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