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4일 김원기 의원에게 정치담당특보 임명장을 주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 ||
노무현 대통령 당선의 1등 공신이었던 문희상 비서실장이 물러나고, 대신 그 자리에 CEO(최고경영자) 스타일의 대학 총장(연세대)인 김우식 실장이 차고 앉았다. 또 ‘왕(王) 수석’으로 불리며 사실상 ‘청와대 2인자’의 파워를 행사했던 문재인 민정수석의 후임엔 노 대통령과 동향(경남 김해)으로 검찰 출신인 박정규 변호사가 임명됐다. 노 대통령과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엽기 수석’이란 애칭으로 불리던 유인태 정무수석은 아예 후임을 보지도 못한 채 물러나게 됐다.
이번 청와대 비서실 개편은 여권의 이른바 ‘총선 올인’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지만, 향후 여권 내 역학구도를 점쳐볼 수 있는 몇 가지 포인트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노 대통령 집권 1년차에 청와대를 삼분(三分)했던 문 전 실장-유 전 수석의 정무그룹과 문 전 수석 중심의 부산그룹, 이광재 전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정점으로 한 386그룹이 모두 퇴조한 것은 주목할 대목이다.
여권에서는 이른바 ‘노무현 코드’를 상징하는 이들의 퇴조가 정권의 정체성 문제를 불러오는 한편 ‘권력 공백’을 불러오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특히 대통령의 측근들이 총선에 ‘올인’한 결과, 여권 내 ‘코어(Core·핵심) 그룹’의 구심력이 떨어질 것이라는 걱정도 곁들여지고 있는 상황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관리형 또는 실무형의 성격이 강한 김우식 실장 체제의 청와대 비서실이 총선이라는 격랑의 시기에 제대로 대처할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는 여권 인사들도 적지 않다. 이들은 정무와 국정관리 기능을 함께 수행한 1기 청와대 비서실과 달리, 2기 비서실은 국정관리 기능만으로 영역이 축소된 채 정무기능 등은 ‘청와대 밖 비서실’에서 담당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여권에서 노 대통령에 대한 ‘비공식 보좌’와 관련해 가장 관심을 모으고 있는 인물은 열린우리당 김원기 의원이다. 지난 1월11일 ‘정동영 체제’의 공식 출범과 함께 2선으로 물러난 김 의원은 지난 4일 대통령 정치특보로 임명되면서 여권 내 위상이 강화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여권 일각에서는 그의 정치특보 임명을 놓고 “여권 신주류의 몰락 속에서 위기감을 느낀 김 의원의 자구책이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지만, “노 대통령의 ‘정치 사부’인 김 의원이 드디어 제 자리를 찾았다”는 평가가 훨씬 많았다.
실제 노 대통령은 김 의원에 정치특보 임명장을 주면서 “제가 정치고문으로 예우해 모시겠다. 저도 수시로 자리를 청하도록 하고, 김 특보께서 자리를 청하시면 항시 면담의 문을 열어놓겠다”며 힘을 실어줬다. 김 특보는 일단 총선과 그 이후 여권의 정무분야를 총괄지휘하는 역할을 맡을 것으로 보인다.
여권 관계자들은 우선 김 특보가 총선 이전엔 선거와 관련한 난제를 푸는 ‘해결사’(Trouble Shooter) 노릇을 할 것이라 말하고 있다. 실제, 김 특보는 문재인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총선 징발’ 필요성을 노 대통령에 강력하게 주장해 일단 문 전 수석을 청와대에서 물러나게 하는 데 성공했다. 아직 ‘총선 불출마’ 입장인 문 전 수석을 선거에 나서게 하는 것도 결국은 김 특보의 몫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총선 후 김 특보의 역할은 열린우리당의 총선 성적표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원내 과반 확보’를 위한 정계개편 작업의 ‘막후 조율사’일 것이란 예상이다. 김 특보도 일찌감치 “총선에서 원내 1당이 된 뒤 합당이든 정책연합이든 다른 세력과 제휴해 과반의석을 확보, 참여정부가 추진하는 안정 속의 개혁을 이뤄야 한다”과 좌표를 밝힌 바 있다.
▲ 문재인, 유인태 전 수석과 문희상 전 비서실장(왼쪽부터)이 14일 신임 비서실장 등에 대한 임명장 수여식에서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이미 ‘후계자’ 반열에 성큼 다가선 정 의장의 독주가 총선 후에도 계속되는 상황이 벌어질 경우, 노 대통령이 집권 2년차 부터 ‘레임 덕’을 맞을 수 있는 만큼 김 특보가 방어막으로 기능할 것이란 얘기다.
여권 주변에서는 총선 후 김 특보가 정 의장 체제에 밀려 2선으로 후퇴한 당내 중진들과 노 대통령 시니어 측근그룹, 청와대 출신 386 측근들을 규합해 정 의장 중심의 주류측과 맞설 것이란 관측도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 총선 공간에서 노 대통령이 출사표를 던진 측근들을 통해 권역별로 선거국면을 직접 관장할 것이란 분석도 나오고 있다.
예를 들어 ▲수도권=문희상 전 비서실장(경기), 유인태 전 정무수석(서울) ▲영남=김정길 열린우리당 상임중앙위원, 문재인 전 민정수석(부산)-김혁규 전 경남지사, 김두관 전 행자부 장관(경남)-이강철 열린우리당 외부인사영입단장(대구·경북) ▲호남=김원기 정치특보(전북)-염동연 전 대선후보 정무특보(광주·전남) ▲강원=이광재 전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정만호 전 청와대 의전비서관 등이 노 대통령과의 ‘핫 라인’을 통해 공백상태에 빠진 청와대 내 정무기능을 대체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한때 청와대 등을 거점으로 여권의 핵심 파워그룹으로 위세를 떨쳤던 노 대통령의 386 측근들은 이 전 실장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향후 정치적 영향력 유지에 크게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이 전 실장의 경우 이번 청와대 개편에서 ‘은사’인 김우식 연대 총장을 비서실장으로 적극 밀어 관철시켜 여전히 ‘실세’임을 과시했지만, 서갑원 전 정무1비서관-김만수 전 보도지원 비서관-박범계 전 법무비서관 등 청와대 출신과 정윤재-최인호-송인배씨 등 ‘부산파’들은 총선에서 당선되느냐 여부에 따라 부침이 엇갈릴 것이란 예상이 나오고 있다.
특히 이들 중 상당수는 열린우리당 내에서 견제가 심해 공천을 받기가 쉽지않은 데다 지역구에서의 경쟁력도 기대에 훨씬 못 미친다는 견해가 많아 고전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노 대통령 측근 그룹들은 정 의장 주변을 중심으로 총선까지 노 대통령과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려는 움직임이 구체화되고 있는 데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지난 1월11일 전당대회 이후 이른바 ‘정동영 효과’로 열린우리당이 정당지지도 1위를 계속 고수하면서 이 같은 현상이 계속될 경우 총선 결과에 따라 정 의장의 독주 강화로 이어질 것이란 우려에서다.
이들은 특히 최근 노 대통령 사돈 민경찬씨의 6백53억원 거액 펀드 모금 의혹과 좀처럼 오르지 않고 있는 노 대통령 국정지지도 등을 계기로 이 같은 경향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게다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노 대통령의 열린우리당 조기입당을 주장했던 정 의장이 15일엔 “열린우리당은 노 대통령이 입당을 약속하고 지지를 선언한 당이다. 입당 절차와 시기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며 총선 이후로 입당을 늦출 수도 있다는 뜻을 밝히자 발끈해 하는 분위기다.
노 대통령의 열린우리당 내 한 측근은 “당 지지율이 괜찮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최근 당내 분위기가 ‘노 대통령이 적극 도와주지 않아도 된다’는 선을 넘어 ‘노 대통령이 선거에 부담이 된다’는 데까지 이어지고 있다. 아무리 당정 분리라지만 노 대통령이 ‘3월 중 입당’ 의사를 밝혔는데 정 의장이 이를 깔아뭉개는 듯한 말을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며 불만을 토로, 향후 노 대통령 입당 문제를 놓고 여권 내에서 적지 않은 논란이 일 것임을 예고했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