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인석 전 사정비서관 | ||
양 전 비서관이 뜬금없이 ‘일신상의 이유’를 들어 청와대에 전격 사표를 제출한 것은 지난 2월2일. 청와대는 곧바로 지방으로 떠난 양 비서관의 사표를 수리하지 않고 연차휴가로 처리했으나, 그의 결심을 되돌리지 못했다. 당시 청와대 주변에서는 그의 돌출 행동이 마침 불거진 ‘민경찬 펀드’ 의혹과 상관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양 전 비서관은 같은 달 중순 한 일간지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이전부터 쉬고 싶었을 뿐이며, ‘민경찬 펀드’나 검찰 인사 문제와는 무관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양 비서관이 옷을 벗기까지 여러 가지 고민이 있었으나, 지난 1월 말 강금실 장관과 검찰 인사와 관련해 마찰을 빚은 것이 직접적인 단초가 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당시 양 비서관은 강 장관이 2월 정기 검찰 고위간부 인사를 앞두고 파격적인 인사안을 마련하자 문재인 민정수석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을 설득해 ‘인사 보류’ 결정을 이끌어냈는데, 이 과정에서 강 장관과 부닥쳤다는 것이다.
강 장관이 단행하려다 무산된 인사 초안에는 송광수 검찰총장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검사장급 2명 정도를 한직으로 방출하는 것을 포함해 상당히 파격적인 인사 구상이 담겨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검찰의 한 소식통은 “당시 법무부 인사안에는 대검의 일부 검사장을 지방 고등검찰청의 차장 이하급으로 좌천성 전보를 시키는 내용까지 포함돼 있었다는 게 정설”이라며 “당사자들에게는 일종의 사형 선고나 다름 없는 인사안이었다”고 전했다.
검찰 관계자는 “올해부터 검사의 직급이 폐지돼 검찰총장을 제외한 나머지 검사들은 이론적으로는 동등한 관계가 되고, 검사장급 간부와 일선 청의 평검사가 서로 직책을 바꿔 맡는 것도 가능해졌다”며 “하지만 지금 당장 검사장 몇 명을 찍어서 ‘하방’하는 것은 ‘본때 인사’로밖에 볼 수 없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해당 검사장들은 강 장관이 검찰 개혁의 일환으로 추진중인 검찰 감찰권의 법무부 이관 등에 제동을 걸거나, 강 장관의 ‘오른팔’로 불리는 L검사에 대해 각종 비위 의혹을 받고 있음을 들어 징계를 추진한 것과 관련해 ‘좌천 대상’에 올랐다는 것이 검찰측 분석이다.
▲ 송광수 검찰총장 | ||
송 총장은 강 장관에게 불법 대선자금 수사를 진행중인 대검 중수부 수사팀의 인사 이동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정기 인사를 단행할 경우 중수부 수사팀이 상대적으로 인사상 불이익을 당하는 격이 되고, 총선을 앞두고 대규모 검찰 인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4월 총선 이후로 인사를 연기할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고 한다.
또한 송 총장은 이미 알려진 대로 양 전 비서관을 통해 청와대측에도 협조를 구했다.
이에 문재인 수석과 양 비서관 등은 강 장관의 구상대로 인사를 단행할 경우 법무부와 대검이 정면 충돌해 엄청난 파문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보고, 노 대통령에게 인사 연기를 정식 건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측은 검찰 인사가 자칫 대선자금 수사 정국에 영향을 미쳐, 불필요한 논란을 빚을 수 있다는 판단도 한 것으로 보인다.
그 뒤 노 대통령은 강 장관이 청와대에 들어와 인사안을 보고하자 “이번에는 대검 의견을 존중해 총선 이후에 인사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전했고, 강 장관은 당초 계획을 바꿔 지난 1월29일 공석을 채우는 수준의 ‘소폭 인사’를 하는 선에서 검찰 고위직 정기 인사를 매듭지었다.
어쨌든 이 일로 강 장관과 양 비서관의 관계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강 장관측은 ‘(양 비서관이) 검찰 시각에 경도돼 검찰 개혁 차원에서 구상한 정기 인사를 무산시켰다’며 양 전 비서관을 심하게 질책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당시 강 장관의 일부 참모들은 “대검이 ‘인사 보류’를 강력히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대통령 주변의 불법 대선자금을 수사하는 ‘우월적 지위’에 힘입은 바 크다”며 분개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양측에 끼어 상처를 입은 양 전 비서관이 끝내 사표를 던지고 말았다는 것.
양 전 비서관의 한 지인은 “사실 양 비서관은 이 일이 있기 전부터 자신의 어정쩡한 위치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었다”며 “강 장관과의 갈등이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격’이 돼 거취를 결정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양 전 비서관은 과거 정부 때는 검찰의 정치권 사정 수사 등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막강했던 사정비서관의 위상이 참여정부 들어 급격히 축소되면서 마땅한 역할을 찾지 못해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청와대는 최근 양 전 비서관의 사표를 수리하고 후임으로 신현수 대검 마약과장을 임명했다.
이에 대해 송 총장은 지난달 25일 출입 기자들이 오찬 석상에서 ‘이번 인사는 총장의 승리라는 얘기가 있다’고 하자 “제발 그런 소리하지 마라”며 손사래를 쳤다. 법무부측도 대외적으로 대검과의 인사 갈등 문제가 불거지지 않도록 ‘입단속’을 하고 있는 눈치다.
▲ 강금실 법무장관 | ||
강 장관측은 기본적으로 검찰 개혁을 위해서는 학연·지연 등을 고리로 똘똘 뭉쳐 있는 기득권 세력과 상대적으로 차별을 받아온 ‘마이너그룹’ 간의 권력 교체, 또는 권력 공유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장관의 인사권을 최대한 활용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관 취임 이후 세 차례의 크고 작은 인사를 통해 서울대와 고대 출신들 대신 마이너그룹인 연세대와 성균관대 출신 간부들이 크게 약진한 것도 이 같은 인식을 반영한 것임에 분명하다.
반면 송 총장측은 강 장관이 통상 검찰 인사 때 총장과 ‘내실 있는’ 협의를 해온 관행을 깨고, 검찰 개혁의 이름 아래 일방적인 인사를 하고 있다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대검이 지난해 통과된 검찰청법 개정안에 ‘총장의 인사협의권’을 넣기 위해 엄청난 심혈을 기울인 것도 이런 피해의식 때문.
결과적으로 양측의 갈등은 검찰 조직에 대한 장악력으로 이어지는 인사권을 둘러싼 ‘파워게임’인 셈이다.
이를 지켜보는 검찰 구성원들의 심기가 편할 리가 없다. 한 검사는 “이제 강 장관과 송 총장은 ‘보신탕집 회동’을 다시 하더라도 관계 개선을 하기 어려울 것 같다”며 “이러다 보니 자연히 검사들 사이에서도 강 장관과 송 총장에 대한 호불호가 갈려 서로 말조심을 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지난해 개업한 검찰 출신의 한 변호사는 “강 장관의 총선 출마설이 한창 나돌 때 송 총장 측근들은 내심 강 장관의 출마를 기대한 반면, 강 장관 지지 그룹은 장관 유임을 희망하는 등 두 기류가 확연히 구분됐다”고 말했다.
일단 빠르면 5월에 단행될 검찰 인사의 향배는 총선 결과에 크게 좌우될 전망이다. 여당이 승리할 경우, 강 장관은 국민적 인기와 노 대통령의 재신임을 바탕으로 당초 구상한 ‘개혁 인사’를 강하게 밀어붙일 공산이 크다.
거꾸로 여당이 참패할 경우, 노 대통령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강 장관 역시 운신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고, 검찰 인사안도 안정지향적으로 수정될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더해 검찰 주변에서는 여당 일각에서 ‘총선 동원령’에 불응한 강 장관 책임론을 제기할 경우 강 장관이 아예 검찰 인사를 못하고 옷을 벗는 최악의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평소 정치에 무관심한 검사들도 4월 총선을 주의 깊게 관찰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진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