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심근경색 증세로 입원 중인 지난 12일 오후 서울 삼성서울병원 로비에 설치된 텔레비전에서 관련 뉴스가 전해지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애플의 창업주였던 스티브 잡스는 생전에 최대 히트작인 ‘아이폰’의 콘셉트, 기술, 디자인까지 세세하게 직접 챙겼다. 사무실 인테리어와 소소한 일상 취미까지 자신의 섬세한 창의력을 가미시키기 위해 애쓰는 ‘단독경영’ 스타일의 경영자였다. 홀로 애플을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잡스가 세상을 떠난 뒤 애플은 아직 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혁신적인 후속작이 나오지 않은 상황이고, 시장의 관심도 예전만 못하다. 일각에선 이 회장의 경영공백이 길어질 경우, 삼성그룹도 ‘잡스가 없는 애플’의 모습과 비슷해질 것이란 걱정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삼성그룹 주변에선 “이 회장과 잡스는 전혀 다른 경영스타일이어서 비교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반응이 더 많다. 이 회장도 삼성그룹 내 영향력이 잡스 못지않게 절대적이지만, 오랫동안 계열사별 독립경영 방식을 취해왔기 때문에 경영 공백으로 인한 충격이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특히 ‘삼성 시스템’으로 알려진 체계적인 경영문화가 안정적인 경영기조를 유지하는 토대로 인식되고 있다. ‘이 회장-미래전략실-계열사 사장단’을 주축으로 하는 삼성그룹 경영체제를 그룹 내부에서는 ‘삼각편대’로 지칭하기도 한다.
그중 그룹의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의 역할에 재계는 주목하고 있다. 계열사 75개, 임직원 42만 명, 연간 매출 330조 원 규모인 삼성그룹 전반의 업무를 조율하는 미래전략실은 100여 명의 상주 인력을 두고 비서실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주력 계열사인 삼성전자도 권오현 부회장, 윤부근 사장, 신종균 사장 3인이 각자 대표이사로 소비자가전(CE)·IT무선(IM)·부품(DS), 3개 사업부문을 맡아 마치 개별 회사나 다름없이 독립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시장의 반응도 잡스의 애플과는 사뭇 다르다. <뉴욕타임스>는 “이건희 회장의 건강 악화가 삼성에 미칠 영향은 스티브 잡스의 영향만큼 크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회장이 입원한 이후 삼성그룹의 각 계열사 주가는 대부분 상승세를 기록했다. 삼성그룹의 경영승계 과정이 가속화되면 삼성가의 지분가치가 더욱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감이 반영된 것이기는 하지만, 잡스의 건강 악화로 애플 주가가 맥을 못 춘 것과는 사뭇 다르다. 이 회장으로 인한 ‘건강 리스크’를 시장이 크게 우려하지 않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럼에도 삼성그룹의 앞날이 ‘퍼거슨 로드’가 될 가능성에 대한 경계감은 재계에 상존하고 있다. 알렉스 퍼거슨이 감독직을 떠난 뒤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 역대 최악의 성적을 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와 비유하는 시나리오다. 재계 관계자는 “맨유에서 바뀐 것은 감독 딱 한 명뿐인데, 실적은 하늘과 땅의 차이라면 결국 수장이 누구냐가 관건이라는 얘기”라며 “삼성그룹에서 그간 이 회장이 해온 역할을 보면 그런 맨유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리더십 시험대에 오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임준선 기자
이 부회장은 올해 들어 해외 비즈니스 거래선 및 정·재계 인사들과의 만남에 주력하는 등 글로벌 경영에 속도를 붙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지난 1월에는 미국 최대 통신회사인 버라이즌의 로웰 매커덤 회장의 초대를 받고 미국에 다녀왔으며, 2월에는 중국 베이징에서 왕양 중국 부총리와 만났다. 지난 4월에는 아버지 이건희 회장을 대신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의 조찬에 참석해 삼성그룹을 대표했다. 이 부회장이 공식 후계자로서 전면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선 이 부회장이 처한 경영환경은 결코 녹록지 않다고 지적한다. 삼성그룹은 현재 세계 시장에서 또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지 기로에 서 있다. 삼성전자는 매출액과 순이익이 지난해 3분기에 정점을 기록한 후 올해 1분기에는 스마트폰 사업에서 다시 미국의 애플이 추격해 들어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룹이 추진해온 ‘미래 먹거리’인 신수종 사업의 향방도 아직은 불투명하다. 이 회장은 스마트폰 이후의 시대를 대비하기 위해 지난 2010년 ‘태양전지, 발광다이오드(LED), 2차전지, 의료기기, 바이오제약’을 5대 신수종 사업으로 선정해 2020년까지 23조 원을 투자키로 했으나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는 못하고 있다. 이 부회장에 경영승계를 탄탄하게 해줄 관건이 신수종 사업에서 구체적인 실적을 내는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삼성그룹이 5대 신수종 사업 중 태양전지 비중은 줄이고, 의료기기와 바이오제약 사업은 비중을 키우는 등 일부 내용을 수정할 가능성을 거론하고 있기도 하다. 4년 전 신수종 사업을 선정했을 때와는 시장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 부회장은 지난 4월 9일 중국에서 열린 보아오포럼에서 참석해 의료·헬스케어 사업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그룹이 주변의 우려를 불식시키려면 새로운 먹거리가 될 신사업에 대한 가시적인 성과를 서둘러 창출해 내야 한다”며 “이것이 이 부회장에 대한 시장의 우려를 걷어내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웅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