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천심사에서 탈락한 낙천자들이 집단 반발하는 등 후유증이 적지 않아 각 당은 이들에 대한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1월27일 보도사진전에 온 조순형 민주당, 최병렬 한나라당, 정동영 열린우리당 대표. | ||
제 아무리 공천을 잘해봐야 어제까지 한솥밥을 먹으며 경쟁했던 공천후보가 결과에 불복해 무소속이나 다른 정당 간판을 달고 출마할 경우 낭패를 보기가 십상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총선에선 역대 어느 때보다 ‘물갈이’ 여론이 거셌던 데다 공천자 선정도 여론조사나 경선 등 예전에 없던 방식이 도입되면서 낙천자들의 움직임도 예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열린우리당 등 주요 정당들은 이 같은 사정을 감안해 공천심사의 객관성과 투명성을 강화해 낙천자들의 ‘승복’을 이끌어 낸다는 방침이지만 이미 곳곳에서 파열음이 나고 있는 상태다. 특히 이전과 비교해 현역 의원들의 탈락비율이 월등히 높아진 한나라당과, ‘호남 물갈이’를 놓고 당내에서 격랑이 일고 있는 민주당은 낙천자 문제가 총선 가도에 최대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평가다.
열린우리당은 아직 낙천자들의 이탈 움직임이 구체화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경선에서 영입케이스의 경쟁력 있는 후보들이 떨어지는 경우가 허다해 이들에 대한 예우와 관리에 골머리를 앓기는 마찬가지다.
낙천자들의 반발이 가장 거센 곳은 역시 격심한 당 내분을 겪고 있는 한나라당. 공천 갈등에서 촉발된 내분사태가 최병렬 대표 퇴진, 새 지도부 선출로 이어지면서 낙천자들을 관리할 여유를 찾기가 불가능한 형편이다.
특히 ‘공천 혁명’을 내세운 현역 물갈이의 집중타깃이 된 영남권 의원들과 친 이회창계 의원들을 중심으로 낙천자들끼리 무소속 연대 또는 ‘제2의 민국당’을 만드는 등 집단 대응할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그러나 낙천자들의 이 같은 반발은 앞으로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칼질’을 주도하고 있는 김문수 당 공천심사위원장이 “현역의원을 최소한 50여 명 이상 교체하겠다”고 공언하고 있기 때문. 당내에서는 벌써부터 공천에서 배제돼 ‘독기’를 품은 현역 의원들이 자신의 당선 대신 한나라당 후보를 낙선시키기 위해 무소속으로 ‘응징 출마’하는 최악의 사태까지 예견하고 있다.
낙천자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을 공천에서 배제시킨 당 공천심사위의 결정을 ‘기획된 음모’ ‘특정세력의 사당화 기도’라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이 같은 기류는 안기부 자금 총선 사건과 불법 대선자금 문제로 당내에서 ‘청산대상’으로 몰린 김영삼 전 대통령(YS), 이회창 전 총재 측근들에게서 두드러진다.
▲ 박종웅 의원(왼쪽), 나오연 의원 | ||
또 이 전 총재의 측근으로 대선 당시 당 후원회장을 맡았던 나오연 의원(경남 양산)과 사무총장을 지낸 김기배 의원(서울 구로 갑)도 자신의 공천 탈락을 ‘이회창계 죽이기’로 받아들이며 역시 무소속 출마를 준비중이다.
이 전 총재 측근그룹에선 또 그의 경기고 후배인 박원홍 의원(서울 서초 갑)과 김일윤 의원(경북 경주) 등도 낙천 대열에 포함됐다.
한나라당은 이 전 총재 측근들에 대한 ‘공천 학살’을 계속 강행할 예정이어서 당 일각에선 서청원 전 대표(서울 동작 갑)와 하순봉 의원(경남 진주), 서 전 대표의 측근인 박종희 의원(경기 수원 장안)의 낙천도 예상되고 있다.
영남권 낙천자들의 움직임도 주목의 대상이다. 앞서 언급한 YS, 이회창계에 직·간접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는 이들은 박승국 의원(대구 북구 갑)이 간사역을 맡으면서 연대를 활발히 모색중이다.
백승홍(대구 중구) 김만제(대구 수성갑) 박시균(경북 영주) 김일윤(경북 경주) 이원형-임진출-박세환(이상 전국구) 등 대구·경북(TK) 의원들과 권태망(부산 연제) 박종웅(부산 사하 을) 나오연(경남 양산) 등 부산·경남(PK)의원 등이 결합, 만만치 않은 세를 과시하고 있다.
이 중 박승국 의원은 지난 2월27일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낙천에 대한 울분을 직설적으로 표시해 눈길을 모은 바 있다. 그는 이날 무소속 출마를 작심한 듯 최병렬 대표와 동료 의원들 앞에서 “이제까지 한나라당을 위해 충성을 다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한나라당을 저주하는 데 앞장설 것이며 (한나라당은) 총선에서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악담’을 퍼붓기도 했다.
이처럼 낙천자들의 탈당-무소속 출마 움직임을 바라보는 당 지도부는 “안타깝지만 달랠 사람도, 그럴 능력도 없다”는 입장이다. 퇴진이 임박한 최 대표가 나서기도, 그렇다고 당 공천심사위가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지도부 공백’의 후유증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부산의 한 재선 의원은 “당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공천심사위가 영남권을 너무 흔드는 것 아닌지 우려스럽다. 2000년 4·13총선을 앞두고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와 신상우 전 국회부의장, 김윤환 의원 등 거물들을 낙천시키고도 별다른 데미지를 입지 않았던 것은 이회창 총재라는 확고한 중심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지금은 그와 상황이 전혀 다른데 무턱대고 ‘칼질’만 하는 것 같다.
여권이 영남 교두보 확보를 위해 ‘올인’하고 있는데 낙천된 의원들이 무소속으로 나설 경우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한마디로 공천심사위원들이 무정부주의적 사고를 하고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고 우려감을 표시했다.
영남을 중심으로 요동치는 한나라당과는 달리 민주당은 텃밭인 호남이 ‘낙천자 변수’에 크게 영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분당 사태로 졸지에 야당으로 전락한 이후 다선 중진들에 대한 당 안팎의 교체 요구가 거센 반면 당사자들은 이에 전혀 개의치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호남에선 2000년 총선에서도 민주당 공천을 받았던 김봉호(전남 해남-진도) 한영애(보성-화순) 임복진(광주 남구) 조찬형 의원(전북 남원-순창) 등 4명의 현역의원이 무소속으로 각각 나선 이정일 박주선 강운태 이강래 후보에게 패배한 바 있다.
‘호남 발(發) 공천 후유증’의 조짐은 공천방식에 대한 이견부터 ‘특정인 배제’ 논란까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광구 동구과 전남 장흥·영암, 전남 순천 등 일부 지역구에서는 지구당 상무위가 후보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현역의원에게 유리한 전 당원 경선방식을 일방적으로 채택해 ‘체육관 경선’ 등 불공정 논란이 제기된 바 있다.
이들 지역의 경우 구해우 전 SK 상무(광주 동구) 박준영 전 청와대 공보수석(전남 장흥·영암) 등 경쟁력 있는 영입인사들이 각각 김경천 김옥두 의원과 공천경합중이며 결과에 따라 낙천자가 무소속 출마할 가능성이 크다는 예상이 나오고 있다.
순천의 경우 김경재 의원이 서울 강북 을로 지역구를 옮기면서 특정인에게 유리한 경선방식을 상무위가 선택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공천 경쟁에 뛰어든 조순용 전 청와대 정무수석이 크게 반발하며 무소속 출마도 불사하겠다고 나선 상황이다.
또 광주 북갑(김상현 의원)의 경우도 최근 실시한 1차 여론조사가 대외적으로는 일반 유권자 상대 여론조사로 알려졌으나, 실질적으로는 ‘당원 50%-비당원 50%’ 여론조사로 치러졌다는 이의가 제기되면서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이밖에 배기운 의원과 최인기 전 행자부 장관이 경합중인 전남 나주의 경우도 양 진영이 감정싸움까지 벌이며 경합중이어서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 한화갑 전 대표(위 왼쪽), 박상천 전 대표. 김성호 의원(아래 왼쪽), 박범계 전 법무비서관 | ||
한 전 대표의 경우 수도권 출마를 선언했다가 경선자금 문제로 구속영장이 청구되자 현 지역구(전남 무안·신안)로 U턴하면서 사정이 갈수록 꼬이고 있다. 지난 2월22일에는 민주당 공천을 신청했던 김성철 전 국민은행 부행장이 한 전 대표의 U턴 결정에 반발해 탈당과 함께 열린우리당에 입당했다.
또 서삼석 무안군수와 무안군 의회 의원 등도 민주당을 탈당해 열린우리당에 입당, 한 전 대표측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박 전 대표의 경우는 현 지역구(전남 고흥)가 선거구 인구하한선(10만5천명) 미달로 인접한 전남 보성과 통합되면서 골치가 아파졌다. 보성은 박 전 대표의 고교(광주고)-대학(서울대 법대)-검찰 후배인 박주선 의원의 고향.
나라종금과 현대건설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돼 ‘옥중 출마’를 선언한 박 의원은 이번에 지역구(전남 보성-화순)가 통합되면서 박 전 대표와 경합이 불가피하게 됐다. 박 의원은 명예회복 차원에서 반드시 출마하겠다는 입장이어서, 이미 열린우리당으로부터 ‘표적 공천’ 대상으로 지목된 박 전 대표의 발걸음을 무겁게 하고 있다.
열린우리당의 사정은 앞선 두 야당과는 출발점이 다르다. 2야는 어쨌든 중앙당이 경쟁력 있다고 판단한 후보를 ‘낙점’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면, 열린우리당은 반대로 중앙당이 사실상 지지한 후보가 경선에서 떨어지면서 사단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 본격 도입한 ‘완전개방형 국민참여경선’에서 참신성과 지명도를 갖춘 인사들이 오랫동안 밑바닥에서 표밭을 다져온 ‘토착 후보’들에 밀려 줄줄이 탈락하고 있다는 얘기다.
당내 핵심 386의원인 김성호 의원(서울 강서 을)이 지난 8일 실시된 국민경선에서 노현송 전 구청장에 패배한 데 이어 같은 달 22일에는 ‘총선 올인’ 차원에서 영입한 권오갑 전 과학기술부 차관과 역시 영입인사인 박정 부대변인(박정 어학원 대표)이 각각 경기 고양 덕양 을, 경기 파주 경선에서 최성 전 청와대 행정관, 우춘환 전 민주당 지구당 위원장에 졌다. 경제칼럼니스트인 김방희 전 MBC 라디오 진행자도 서울 서대문 을에서 같은 날 고배를 마셨다.
또 2월28일에도 대전 서구 을 경선에서 박범계 전 청와대 법무비서관이 학원 이사장 출신인 구논회 후보에 패배한 데 이어 영입케이스인 최창환 전 <이데일리> 대표와 이평수 수석부대변인도 각각 서울 은평을과 경기 부천 원미 갑 경선에서 나란히 토착후보인 송미화 전 서울시 의원, 김기석 전 민주당 직능위원장에 압도적 표차로 주저앉았다.
열린우리당은 이처럼 영입인사들이 대거 낙천자 처지가 되면서 이들에 대한 예우와 관리에 고심이 깊은 상황. 일부에서는 비례대표로 옮겨 활로를 모색해 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미 뜻을 두고 점찍은 인사들의 반발이 거세 여의치 않은 실정이다. 그렇다고 DJ 시절처럼 낙천자들을 공기업이나 정부 산하단체에 내보내기도 어려워 이래저래 난감한 형편이다.
2000년 16대 총선 공천작업이 이뤄질 무렵엔 ‘당대의 실세’인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이 자신이 먼저 불출마를 선언한 후 낙천 대상 현역 의원들을 서울 신라호텔 커피숍으로 하나 둘씩 불러 주저앉히는 이른바 ‘저승사자’ 역할을 한 바 있다.
권 전 고문은 당시 낙천한 현역 의원들에게 재외공관장이나 공기업 이사장 등의 자리를 제시해 공천을 포기하도록 했고, 실제 약속을 대부분 이행해 “역시 권 고문”이란 평가를 받은 바 있다.
열린우리당은 일단 공천 갈등을 조정하기 위해 노무현 대통령의 핵심측근인 염동연씨를 정무조정위원장에 임명했지만 문제가 제대로 풀릴지는 의문이다. 낙천자들을 달랠 유무형의 수단이 거의 없어진 이상 기껏해야 같이 ‘통음(痛飮)’해주며 달래는 것 등 외에는 별다른 대책이 없기 때문이다.
염 위원장도 이를 염두에 둔 듯 “악역을 맡았다. 말이 조정위원장이지 경선 불복자 또는 당 추천 전략지역에서 탈락한 사람들을 달래는 일이 주된 업무다. 매끄럽게 일처리를 해야 할 텐데 걱정”이라고 말했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