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TV 속 용의자 모습. 모자를 눌러 쓴 남성은 피가 묻은 헝겊으로 오른손을 감싼 채 아파트 단지를 태연히 빠져나가고 있다.
지난 20일 9시께 대구 달서구 상인동 한 아파트 화단에서 맨발에 반바지 차림을 한 권 아무개 씨(여·20)가 쓰러진 채 인근 주민에 의해 발견됐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119 구급대원은 권 씨가 부상을 입은 것을 확인하고 병원으로 이송하기 위해 구급차로 옮겼다. 권 씨는 숨 쉬는 데 지장은 없었지만 오른쪽 골반을 다친 데다 체온까지 낮아진 상태였다.
그런데 병원 이송 중 권 씨는 구급대원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다친 이유가 살인사건 때문이며 범인은 전 남자친구라는 것이었다. 단순 추락사고가 아닌 살인사건임을 인지한 구급대원은 환자 이송 중 경찰서로 급히 연락을 했다.
같은 날 9시 20분께 신고를 받고 피해 여성의 집으로 출동한 경찰은 싸늘한 주검으로 변한 여성의 부모 권 아무개 씨(56)와 이 아무개 씨(여·48)를 발견했다. 권 씨와 이 씨는 거실과 욕실에서 흉기에 찔린 채 숨져있었다.
경찰은 용의자를 추적하던 중 아파트 폐쇄회로(CC)TV에서 의문의 남성을 발견했다. 모자를 눌러 쓴 남성은 부부가 발견되기 10분 전인 9시 10분께 피가 묻은 헝겊으로 오른손을 감싼 채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수상한 점은 또 있었다. 숨진 부부가 발견되기 하루 전인 19일 오후 6시부터 부부가 거주하는 아파트 4층에서 다툼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는 것. 경찰은 이웃주민의 진술을 토대로 다툼소리가 들리기 시작할 즈음 시각의 엘리베이터 CCTV를 분석했고, 한 남성이 공구함을 들고 있는 장면을 포착했다. 화면 속 남성은 피해 여성 권 씨의 추락사고 직후 아파트를 빠져나가던 남성과 같은 인물이었다.
용의자를 특정한 경찰은 4시간 후 경산의 자취방에 머물던 범인을 체포했다. 대구 달서경찰서 형사과 양용환 계장은 “검거 당시 용의자는 만취상태로 오른손에는 병원에서 봉합수술을 받아야 할 정도로 큰 상처가 나 있었다. 흉기를 휘두르다 자신도 다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놀랍게도 범인은 피해여성 권 씨의 대학교 선배이자 전 남자친구였던 장 아무개 씨(24)로 밝혀졌다. 올해 2월 같은 대학에서 만나 연인관계로 발전했다는 두 사람. 그러나 장 씨는 술만 마시면 돌변해 권 씨를 폭행하고는 했다. 이에 권 씨 부모는 장 씨의 부모를 찾아가 “아들과 우리 딸이 만나지 않도록 해 달라”며 대학생 장 씨의 자퇴를 강력하게 요구했다고 한다. 결국 2달간의 짧은 만남을 끝으로 권 씨와 헤어지게 된 장 씨는 이에 앙심을 품고 잔인한 살인계획을 세웠다.
범행 당일 오후 5시 30분 장 씨는 배관수리공으로 위장해 권 씨의 집으로 들어갔다. 장 씨는 5분간 내부를 둘러보고는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50분 후 장 씨는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권 씨 집안으로 들어간 장 씨는 공구함에 미리 준비한 흉기로 화장실과 현관 등에서 권 씨 부부를 잔인하게 살해했다.
당시 집에 없었던 피해여성 권 씨는 오전 0시 30분께 귀가해 집안의 참혹한 현장을 마주했다. 장 씨는 범행직후 현장을 떠나지 않고 권 씨 부부의 시신 옆에서 술을 마시며 피해여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 씨는 피해자 권 씨를 흉기로 위협해 붙잡아 두었다. 악몽 같은 8시간이 지난 후 권 씨는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4층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탈출했다.
양용환 형사계장은 “장 씨는 집안에 다른 사람이 있는지 한 차례 살펴본 후 범행을 저지르는 치밀함을 보였다. 피해 여성도 생명의 위협을 느껴 베란다에서 뛰어내렸다”며 “장 씨는 피해자 부모가 만남을 반대해 이에 앙심을 품고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범행 동기는 조사 중”이라고 말했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
‘착한이미지’ 그가 왜? “사이코패스 아냐, 분노조절 장애” 피의자 장 아무개 씨(24)는 군 복무를 마친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평소 술을 마시면 폭력적인 성향을 보였다는 피의자 장 씨는 군 복무 당시에도 후임을 폭행해 처벌을 받은 전력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A 씨는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장 씨가 후임을 폭행해 한 번 영창을 다녀온 적은 있다. 신고만 접수돼도 영창을 가니까 폭력의 수위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없으나 평소 장 씨는 후임을 살뜰히 챙기는 착한 선임 이미지였다”며 “좀 욱하는 성격이 있어 선임과 한 번 싸운 적이 있지만 그때는 선임의 잘못도 있어 다들 이해하는 분위기였다. 단 한 번도 장 씨가 살인을 저지를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살인사건의 범인이 장 씨라는 것을 알고 당시 같은 부대에 있었던 전우들 모두 큰 충격을 받은 상태”라고 말했다. A 씨의 말에 따르면 장 씨는 평소 사리분별도 잘했고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런 장 씨가 어떻게 하루아침에 잔인한 살인마가 되었을까. 이와 관련, 표창원 범죄과학연구소 소장은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를 통해 흥미로운 분석을 내놨다. 표 소장은 “계획적인 분노표출을 한 장 씨는 사이코패스와는 상당히 다른 유형”이라며 “대구살인사건 용의자는 여자친구의 교제 반대를 곧 자기 자신의 인격이나 존재에 대한 거절 그리고 무시로 받아들이게 되는 심리 상태로 편집증, 분노조절의 문제가 있다”라고 진단했다. 장 씨는 성격장애나 인격장애 같은 정신과적 장애가 아닌 분노조절 문제를 안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 분노조절 장애가 심해질 경우 강력 범죄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이나영 이룸심리상담연구소 소장은 “분노조절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은 자신뿐 아니라 주변인까지도 힘들게 한다”며 “분노를 폭발시키는 사람과 분노를 안으로 삭이는 사람이 있다. 남성의 경우 직장에서 쌓인 분노를 가정에서 터뜨리는 경우가 많고, 여성은 분노를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아두다 우울증 등으로 치닫는 경우가 있다. 분노조절장애가 심해지면 자살 등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묻지마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고 말했다. [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