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두환씨는 추징금 2천2백5억원 중 7년이 지난 현재까지 약 5백33억원만 ‘납부’했다. 이것도 검찰이 강제집행하거나 부인 이순자씨가 대납한 것이다. | ||
검찰에 따르면 실제 대형 부패, 비리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유죄가 확정돼 수억에서 수천억대의 추징금을 선고받은 대상자 중 상당수가 추징금 납부를 미루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개중에는 ‘배 째라’식 버티기로 일관하는 고액 체납자들도 적지 않은 상황. 아예 추징금 징수 시효인 3년을 넘겨서 추징금을 한푼도 내지 않은 ‘철면피’ 미납자들도 있다. 과연 대형 사건에 연루됐던 ‘유명인사’들의 경우는 어떻까. 법원에서 유죄가 최종 확정된 주요 인사들의 추징금 납부 현황을 살펴봤다.
검찰에 따르면 추징금 미납액 1위는 신동아 그룹 계열사인 (주)신아원의 전 대표 김종은씨다. 김씨는 최순영 전 신동아 회장이 지난 96년에서 97년 사이 국내 4개 은행으로부터 수출 금융 명목으로 1억8천만달러를 대출받아 이 중 1억6천여만달러를 미국으로 빼돌리는 과정에 공모한 혐의를 받고 구속된 인물. 김씨는 지난 98년 12월 특가법상 사기죄로 기소돼 법원으로부터 추징금 1천9백64억원을 선고받았으나 현재까지 고작 36만원만 납부한 상태다.
김씨에 대해서는 추징금 환수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게 검찰측의 전언이다. 지난 99년 6월 보석으로 풀려난 김씨는 추징금을 변제할 만한 재산이 없으며, 주거지조차 불분명해 소재 파악도 제대로 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김씨에게 내려진 추징금은 공동 피의자인 최 전 회장과 함께 추징하기로 결정된 금액. 다만 최 전 회장의 혐의에 대한 대법원의 확정 판결이 아직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일찌감치 상고를 포기한 김씨에게 추징금 납부 책임이 우선 부여됐던 것이다. 즉 최 전 회장에 대한 대법원의 최종 판결에 따라 공동 추징금 액수가 변동될 수 있으며, 김씨와 최 전 회장의 추징 비율도 결정될 것으로 예상된다.
최 전 회장은 지난 2002년 1월 서울고등법원에서 계열사 불법 대출 및 외화 밀반출 혐의로 징역 3년과 추징금 2천1백92억원을 선고받은 뒤 그 해 2월7일 대법원에 상고한 상태. 또 최 전 회장은 지난 2002년 12월에도 외화 밀반출과 회사 자금을 이사회 결의 없이 신동아학원 등에 제공한 혐의로 기소돼, 지난해 11월 서울지법에서 징역 5년에 추징금 1천1백75억원을 선고받은 상황이다. 검찰은 아직 확정판결이 나지 않은 최 전 회장에 대해 예금보험공사를 통해 예금 인출 금지 조치만을 취해 놓은 상태다.
잘 알려진 것처럼 전두환씨도 1천6백억원대에 이르는 추징금을 미납한 상황이다. 지난 97년 추징금 2천2백5억원이 확정된 전씨는 무려 7년이 지났음에도 현재까지 약 5백33억원만 ‘납부’했다. 미납금은 약 1천6백71억원으로 전체 추징금의 4분의 1 정도만이 회수된 셈이다.
더욱이 현재까지 추징된 5백33억원 중 2백억원은 최근 대검 중수부가 전씨 비자금에 대한 수사 강도를 높이자 부인 이순자씨가 ‘울며 겨자 먹기’로 서둘러 대납한 액수다. 이씨는 지난 5월17일 채권 1백2억원과 현금 및 수표 28억원을 검찰에 납부했으며, 5월24일 동생 이창석씨가 검찰 소환 조사를 받자 그뒤 70억원을 다시 검찰에 냈다.
그 이전에 추징된 3백33억원도 모두 검찰이 강제집행절차를 밟아 어렵사리 회수한 돈이다. 검찰은 지난 97년 5월 비자금 사건 상고 직후 전씨의 재산 중 시가 1백88억원 상당의 무기명 채권 1백26장을 현금화해 추징했고, 이후 97년 10월 1백24억원 상당의 현금 자산을 추징했다. 2000년 10월과 12월에는 전씨의 벤츠 승용차(낙찰가 9천9백만원)와 1억1천만원 상당의 용평 콘도 회원권을 경매로 처분해 환수했다. 지난해 이후로는 10월과 11월 전씨의 자택 및 가재도구 등을 경매에 부쳐 약 18억원을 회수한 게 전부다.
반면 2천6백28억9천6백만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은 노태우씨는 전씨보다는 ‘납부’ 실적이 나은 편이다. 현재 노씨에 대해서는 2천78억원이 국고에 환수돼 5백30억원을 ‘낸’ 전씨와는 반대로 약 5백50억원만이 남아 있는 상태다. 그러나 노씨의 경우도 지난 2003년 1월 검찰이 노씨가 대통령 재직 당시 나라종금 등에 은닉한 비자금 2억7천여만원을 환수 조치한 이후 환수 실적이 거의 없는 상황이다.
지난 2001년 경부 고속철 차량 선정 과정 당시, 프랑스 알스톰사에서 거액의 수수료를 받은 혐의로 기소된 한국계 프랑스인 호기춘씨도 재판에서 확정된 추징금을 제대로 납부하지 않고 있다. 40억8천6백만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은 호씨에게서 현재까지 추징한 액수는 5천만원에 불과하다.
특히 호씨는 추징금을 물지 않기 위해 해외로 도피하려다가 꼬리를 잡힌 바 있다. 지난 2001년 10월 국적을 프랑스로 바꾼 호씨는 지난해 5월1일 위조 여권을 가지고 프랑스로 은밀히 출국하려다가 출입국관리소에 적발됐었다.
▲ 신명수씨, 이순국씨, 박건배씨 (왼쪽부터) | ||
이밖에 지난해 3월 회사 공금을 자회사에 불법 대여한 혐의로 구속된 후 항소심에서 보석으로 석방된 이순국 전 (주)신호제지 회장도 18억4천5백여만원의 추징금 중 4천5백여만원만 내고 약 18억원을 미납한 상태다. 재기를 모색중인 이 전 회장은 머지않아 검찰에 추징금 분납 허가를 요청할 것으로 전해졌다.
반면 경기은행의 퇴출을 막아달라는 요청과 함께 1억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던 임창열 전 경기지사는 추징금 1억원을 최근 완납했다. 그룹 연수원 매각 과정에서 거액을 빼돌린 혐의로 기소돼 추징금 1억원을 선고받은 박건배 전 해태그룹 회장의 경우 현재까지 5천5백만원을 납부한 상태. 추징금을 매달 5백만원씩 분할납부해온 박 전 회장은 올 연말까지 완납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증여세 포탈과 특가법상 알선수재 혐의 등으로 징역형과 함께 추징금을 선고받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두 아들과 처조카는 추징금 납부 실적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 대기업으로부터 각종 이권청탁 및 정치자금으로 47억여원을 받은 뒤 증여세를 포탈한 혐의로 지난 2002년 7월 기소돼, 지난해 5월 대법원에서 징역 2년, 추징금 2억6천만원이 선고된 김홍업씨는 이미 추징금을 완납했다.
지난 2002년 2월 ‘이용호 게이트’에 대한 특검 수사 당시 국가정보원 및 해군 등에 보물발굴사업 지원을 청탁하고 그 대가로 이용호씨에게서 돈을 받은 혐의로 기소돼, 지난해 6월 대법원에서 추징금 1억5천만원이 확정된 김 전 대통령의 처조카 이형택 전 예금보험공사 전무도 추징금을 완납한 것으로 밝혀졌다.
다만 지난해 체육복표 사업자 선정 과정에서 청탁 대가로 돈을 받은 혐의로 기소돼, 법원에서 1억6천만원의 추징금이 선고된 셋째 아들 홍걸씨는 아직 추징금 일부를 납부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 홍업씨의 ‘집사’로 지난 2002년 기업 감세청탁 및 뇌물 비리로 기소된 후 유죄가 확정돼 무려 20억6천만원의 추징금 납부 선고를 받은 김성환씨도 아직 추징금을 한푼도 내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DJ 정부 시절, 온 나라를 ‘게이트’충격으로 휩싸이게 한 장본인들도 역시 현재까지 추징금을 거의 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셋째 아들인 홍걸씨를 내세워 기업체들로부터 이권 청탁을 받고 10억원을 챙긴 혐의로 지난해 11월 대법원에서 추징금 4억5천6백10만원을 선고받았던 최규선씨는 아직 추징금을 납부하지 않고 있다.
지난 2000년 11월 자신이 대주주로 있던 동방금고와 대신금고 등에서 출자자 불법대출과 회사 공금 횡령 등을 통해 총 2천여억원을 빼돌린 혐의로 기소된 정현준 전 한국디지털라인(KDL) 대표의 경우도 마찬가지. 정씨는 지난 2001년 대법원으로부터 징역 9년과 추징금 10억원을 선고받았으나 미납 추징금이 약 9억9천9백98만5천원에 이른다. 검찰은 정씨의 추징금 납부를 ‘압박’하기 위해 구치소 영치금 약 1만5천원을 압류하기도 했으나 실효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신승남 전 검찰총장의 두 동생도 비슷한 케이스. ‘삼애 인더스’ 이용호 회장으로부터 대가성 금품을 받고 금융감독원에 부실채권을 매입해 달라는 로비를 벌인 혐의 등으로 기소된 신승환씨는 지난해 1월 대법원에서 징역 1년6월 및 추징금 2억1천6백66만원이 확정됐으나, 아직 한 차례도 추징금을 납입하지 않았다. 역시 알선수재 혐의로 지난 2002년 4월 서울고법에서 추징금 2억원이 확정된 신 전 총장의 여동생 신승자씨도 납부 실적이 전무한 것으로 전해졌다.
병역 비리와 관련돼 약 12억원을 받은 혐의 등으로 기소돼 지난 2002년 12월 대법원에서 징역 20년에 추징금 10억4천7백여만원이 확정된 박노항 전 원사도 추징금을 아직 한푼도 내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대법원 판결 이후 군사법원이 박씨의 추징금에서 4천5백85만여원(박씨가 받은 돈 중 군의관에게 들어간 로비자금)을 경감시켜 줬지만 아직도 약 10억여원의 추징금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의정부지검 관계자는 “본인을 포함해 가족 명의로 된 부동산이나 채권을 계속 조회·추적하고 있으나 추징금을 변제할 만한 재산은 아직 발견된 게 없다”고 밝혔다.
이처럼 고액 추징 대상자들의 추징금 납부가 지지부진한 가운데 불법자금 등의 사건으로 재판중인 안희정 신상우 최돈웅 박지원 권노갑 등 거물급 정치인들에게도 거액의 추징금이 구형된 상태라서 앞으로도 추징금의 실효성을 둘러싼 논란은 더욱 뜨거워질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