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패배로 인해 한국에는 기분 나쁜 징크스가 생겼다. 축제가 미리 공지되면 어김없이 패배의 쓴잔이 되돌아온다는 사실이다. 작년 6월 울산문수경기장에서 열린 이란과의 브라질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마지막 경기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월드컵 진출 기념행사가 예고됐었지만 결과는 0-1 패배였다. 불타는 밤을 보낸 건 한국이 아닌, 적지에서 실력으로 승리한 이란이었다. 그라운드 위에 태극기가 나부끼며 나름 성대한 행사가 펼쳐졌지만 자리에 참석했던 어느 축구인들도 웃을 수 없었다. 그렇게 브라질월드컵 아시아 예선을 책임졌던 최강희호는 ‘역대 최악’이라는 온갖 오명을 뒤집어쓰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축구 국가대표팀이 5월 28일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치른 튀니지와의 평가전에서 졸전을 펼치며 0-1로 패배했다. 경기를 마치고 열린 2014 브라질 월드컵 출정식.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1년여 만에 맞이한 튀니지 평가전도 관심은 많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물론 월드컵 본선 진출 실패의 가능성도 도사리고 있던 울산에서의 씁쓸한 상황보다 훨씬 편안했던 건 사실이었다. 튀니지 평가전에서 패한다고 하더라도 모든 희망이 꺾이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월드컵 출정식이었다. 다 차려놓은 잔칫상을 상대가 완전히 뒤엎은 셈이다.
“앞으로는 축제를 공지하지 않고 차라리 불시에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무리 친선전이라 하더라도 스포츠의 진정한 맛은 승리인데, 패한 뒤 축제를 하니 뭔가 잘못된 느낌”이라는 축구인 누군가의 발언은 그만큼 대표팀의 경기력이 실망스러웠음을 알렸다.
#최악의 변수 부상
결과도 결과였지만 불편한 징크스는 어김없이 반복됐다. 부상이었다. 튀니지전을 하루 앞두고 열린 공식 기자회견에서 홍 감독은 “결과도 중요하겠지만 꼭 전제돼야 하는 건 바보 같은 부상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김보경이 튀니지 선수의 태클에 걸려 넘어지는 장면.
하지만 벤치의 의지만으로는 해결할 문제는 아니었다. 우려는 또 현실로 이어졌다. 중앙수비수 홍정호(아우크스부르크)가 후반 초반 상대 공격수의 거친 태클에 왼쪽 발목(정확한 부위는 발목에서 발등으로 이어지는 곳)을 크게 꺾이며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고통을 호소하다 결국 들것에 실려 그라운드를 나가게 된 홍정호는 아이싱을 대고 목발을 짚고 경기장을 빠져나가야 했다.
사실 홍정호는 ‘메이저 대회’ 부상 징크스가 있다. 특히 2012 런던올림픽을 앞두고 부상을 입으며 올림픽 홍명보호의 최종엔트리에 낙마한 기억은 영원히 뿌리치고픈 순간이다. 대표팀 훈련 캠프에 입소할 때도 “솔직히 부상 트라우마가 아직 남아있다”며 거듭 주의를 기울였기에 안타까움의 시선은 훨씬 많아졌다. 한국 축구는 과거 대회 직전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여러 차례 겪었다. 1998년 프랑스 대회를 앞두고 잠실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 중국 평가전에서 공격수 황선홍(포항 스틸러스 감독)이 무릎 십자인대 파열로 대회 기간 내내 벤치를 지킨 기억이 있다. 남아공월드컵 직전에는 곽태휘가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벨라루스 평가전 중 무릎 인대가 파열돼 대표팀 최종엔트리 승선 직전 중도 하차했다.
월드컵에서 최정예 멤버들을 두루 데려가는 것도 반드시 필요하지만 이를 위해선 부상이 나와서는 안 된다. 국제축구연맹(FIFA)이 ‘월드컵 출전 선수 보호 기간’을 따로 규정한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다. 실제로 세계 각지에서는 4년 내내 좋은 몸놀림을 보여주다 월드컵 본선 직전에 다쳐 출전을 포기한 선수들의 사례도 허다하다. 결전을 앞두면 부상을 피하는 것도 요령이다.
#플랜B 확보하라!
구차철
홍 감독의 생각은 어쩌면 당연했다. 이미 월드컵 출전 32개국의 개괄적인 정보는 서로가 가진 상황. 그런데 과거 지역 예선 때와 월드컵 본선 체제에 돌입한 각국 대표팀들의 모습이 모두 같을 수는 없다. 선수들도 계속 바뀌어왔고, 팀 전술과 전략 역시 수시로 변경된다. 상대의 바뀌는 부분들을 사전 체크해 일찌감치 업데이트해야 하고, 반면 우리와 관련한 노출은 최소화해야 한다.
전력 노출을 꺼린 대표팀의 판단은 나쁘지 않았다. 튀니지 평가전에 나선 선수들의 유니폼에는 이름 영문 이니셜이 새겨져 있지 않았고, 등번호까지 FIFA에 등록된 명단과 완벽하게 달랐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내용은 졸전에 가까웠다. 홍명보호는 상대의 타이트한 밀집수비를 전혀 뚫지 못했다. 유례없는 스리백 수비라인을 가동한 튀니지의 ‘선 수비-후 역습’ 전략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사실 홍 감독도 소집 훈련 초기부터 ‘밀집수비 공략’에 대해 수차례 강조해왔다. 측면을 적극 활용할 것을 주문했지만 벤치의 지시는 제대로 맞아 떨어지지 않았다. 고집스럽게 단조로운 공격 루트로 일관했고, 어이없는 패스 미스로 화를 자초하기도 했다. 어렵게 잡은 찬스조차 세밀하지 않은 공격 전개에 번번이 잘렸다. 또 수비라인에서는 좌우 풀백들의 미스가 자주 부각돼 답답함을 안겼다. 홍 감독도 “전체적으로 세밀하지 못했고, 수비와 미드필드 공간도 지나치게 넓었다”며 아쉬움을 삼켰다.
이때 홍명보호에는 플랜B가 절실했다. 사전 준비한 전술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를 대비해 또 다른 전술 옵션을 가용해야 했지만 상황은 90분 내내 바뀌지 않았다. 선수들의 컨디션과 몸 상태를 점검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축구계에서는 홍명보호의 전술 선택의 폭이 지나치게 좁다는 비판적인 시선을 보낼 때가 종종 있다. 이미 갖춘 전략을 극대화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만에 하나’를 대비하는 자세도 필요한 요즘이다.
남장현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