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억6천만원을 3백7명에게 송금한 통장 내역. 공시가 나간 지 한 달도 안돼 통장은 ‘누더기’가 됐다. | ||
지난 6월 하순 ‘희망의 돈’ 공시를 내놓아 화제가 되었던 개인투자가 박주석씨(본지 633호 보도)는 과연 자신의 ‘공약’대로 불우한 이웃들에게 3억6천만원을 기부했을까. 지난 7월8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박씨는 희망의 돈을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지급한 내역을 공개했다. 박씨가 지급을 약속했던 기일인 7월10일이 이틀 남았지만 그는 이미 3억6천만원의 송금을 끝낸 상태였다.
박씨의 기부금을 받은 사람은 모두 3백7명, 1인당 평균 1백17만원이 돌아간 셈이다. ‘사연을 보낸 이들에게 진짜로 돈이 돌아갔을까’ 궁금해하는 기자에게 박씨는 3억6천만원이 빠져나간 은행통장을 보여주었다.
화제의 공시가 나간 직후인 지난달 23일 박씨를 만났을 때 이 통장은 빳빳한 새 통장이었다. 그런데 불과 보름 만에 통장은 손때가 묻고 구겨진 헌 통장이 되었다. 이렇게 통장이 헤어진 까닭을 묻자 박씨는 “통장을 주머니에 항상 넣고 다녀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답했다.
통장에는 사연을 보내준 사람들에게 송금한 내역이 빼곡이 인쇄돼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1백여만원의 돈이 지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송금 내역은 첫 통장의 페이지가 넘쳐 두 번째 통장으로 이어졌다. 입금하는 데 걸린 시간만도 도합 10시간이 넘는다고 한다.
박씨가 가져온 한 박스 분량의 사연들 또한 박씨의 기부를 입증하고 있었다. 박씨가 보여준 것 중 상당량은 희망의 돈을 받은 사람들이 보내온 감사의 이메일 편지였다.
“긴가 민가 했는데 정말 돈을 보내주셨군요. 정말 놀랍고 고맙습니다. 님의 은혜 잊지 않고 불행한 사람들을 돕는 데 힘쓰겠습니다.” 박씨의 돈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의 믿겨지지 않는 기부에 감동한 듯했다.
박씨의 돈을 받은 사람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박씨가 직접 정리한 지급내역에 따르면 장애인 가족의 집 개조 1건, 주거문제 1건, 종교단체를 통한 지원 2건, 학자금 8건, 장애인 11건, 공무원(사회복지사)을 통한 지원 1건, 지방의 노인 1건, 복지단체와 동사무소를 통해 추천받은 생활고 문제에 1백55건, 메일·팩스 사연 1백13명, 기타 어려운 사람 10건이었다.
박씨가 도움을 준 사연들을 살펴보면 생활고를 호소한 이들이 가장 많았다. 특히 병원비 때문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았다. 사연 중에는 재정의 열악함 때문에 해체될 위기에 처한 중학교 야구단에 기부를 호소하는 것, 당장 급한 학자금을 빌려줄 것을 호소하는 대학생 등 특이한 사연들도 적지 않았다. 구세군 앞으로 지급된 내역도 있었다.
▲ 사람들이 보낸 사연들. | ||
어떻게 짧은 시간 동안 그 많은 사연들을 검토해 기부대상자를 선정할 수 있었을까. 박씨는 이에 대해 “나를 제외한 3명의 담당자들이 밤낮으로 사연을 검토했다. 나는 일체 관여하지 않고 그들이 사연을 선정한 뒤에야 내용을 볼 수 있었다”며 피곤한 눈을 비볐다. 박씨는 “사연을 선정하는 책임자는 사회 연륜이 깊은 분이라 100% 신뢰했다”며 공정함을 피력했다.
‘혹시 돈에 욕심이 나 거짓 사연을 호소한 이들은 없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박씨는 사연이 선정된 대상자들마다 일일이 전화를 걸어 사실 관계를 물었다고 한다.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를 일일이 확인했기 때문에 장난이나 거짓말은 통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박씨는 특히 “진짜 사기꾼이나 돈 욕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힘들게 사연을 보내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며 사연을 보내준 사람들에게도 신뢰를 보냈다.
10만여 명이 넘는 ‘응모자’ 가운데 이렇게 ‘선택’된 사람은 불과 3백7명. 기부 대상자를 선정하는 과정 또한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박씨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전화 연락이 안 될 정도로 힘들게 사는 이들도 있었다. 다 도와주지 못하는 나의 한계 때문에 안타깝다”고 그간의 어려움을 내비쳤다.
그렇다면 과연 선택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박씨는 “원래 생활수준이 높고 능력이 있는 사람은 배제했다. 예를 들어 사업이 망해 재기자금 7천5백만원을 빌려달라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람은 그만큼의 생활수준을 그간 누려왔기 때문에 절실히 어려운 처지라 볼 수 없다”고 밝혔다. 박씨가 도와준 사람들의 대부분이 1백여만원의 돈을 받은 것에서도 그의 기부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이렇게 개별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보다는 복지재단처럼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춰야 더 적절한 곳에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져 보았다. 박씨는 오히려 “직접 사연을 받는 과정을 통해 절실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더 효과적이다”라고 답했다.
쉽게 납득되지 않는 박씨의 ‘기행’의 이유는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보내온 감사의 이메일을 보면 언뜻 이해가 될 법도 하다. “가족들끼리도 이렇게 하기 힘든데 어려운 사람을 도와줘 너무 고맙다. 나도 능력이 되면 다른 사람들을 꼭 도와주고 싶다.” 자신의 ‘희망의 종자돈’이 기부 대상자들을 통해 바이러스처럼 세상에 퍼졌으면 하는 게 그의 바람이다. 박씨는 앞으로도 이와 같은 ‘이벤트’를 계속 벌여나갈 생각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