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년 4월1일 김홍한 장군(오른쪽)이 홍인호 중령의 계급장을 달아주고 있다. | ||
홍 예비역 중령은 “당시 10·26 사태, 12·12 쿠데타, 5·18 광주항쟁 등 숱한 사건을 맞으면서 군부의 권력이 이른바 구(舊)군부에서 신군부로 바뀌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전두환 사령관의 의중을 읽고 모든 군내 인사조치를 총괄 책임졌던 김홍한 장군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전혀 조명되지 않고 있다. 사실상 신군부의 초석은 김 장군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는 당시 신군부의 대부격이었다. 전두환 노태우 등 그의 도움을 받지 않은 신군부 세력들이 없을 정도였지만, 84년 비명 횡사를 끝으로 그에 대한 평가는 일순간에 사라져 버렸다”고 밝혔다.
고 김홍한 장근은 지난 84년 7월12일 2군사령관 재직 당시 예하부대 순시 도중 헬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김 장군은 부산 출신으로 부산상고와 동아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31년생으로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과는 동갑이다. 별도 73년에 같이 달았고, 소장 진급도 77년에 같이했다. 하지만 그는 종합9기로 50년에 소위로 임관했다. 육사11기 출신인 전 사령관에 비해 5년이 빨랐다. 그래서 전 사령관은 김 장군을 장교 시절부터 평소 ‘형님’으로 불렀다고 한다.
특히 인사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던 전 사령관은 12·12 쿠데타 성공 직후 김 장군을 육본 인사참모부장으로 앉히면서 사실상 신군부 인사의 전권을 위임했다. 다음은 홍 예비역 중령의 증언이다.
“당시 전 사령관은 김 장군에게 ‘조직 인선에 관한 한 형님이 알아서 잘해 주십시오’라고 말할 정도로 전권을 위임했다. 당시 모든 작업은 김 장군이 스스로 기획한 것이거나 아니면 전 사령관의 언질을 받고 김 장군의 머리를 한 단계 거친 것을 내가 최종 정리해서 대통령과 계엄사령관에게 올릴 보고서를 만드는 형식이었다”고 밝혔다.
인사를 총괄하며 막강한 힘을 휘두르던 당시 육본 인사참모부실에 수많은 장교들이 기웃거리자 김 장군은 홍 중령의 책상을 아예 자신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오게 해서 둘만이 함께 인사 작업을 했다고 한다. 보안유지를 위해 철야 작업을 수시로 했으며, 때론 눈을 피하기 위해 삼각지 부근의 여관방을 잡고 일을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김 장군은 16개월 동안 인사참모부장으로 있으면서 모든 조직의 인사를 다 처리해 사실상 5공 정권의 기틀을 다졌다. 이후 81년 중장으로 진급해 6군단장(20개월), 참모차장(4개월)을 거쳐 2년 만에 별 4개를 다는 초고속성장을 거듭했다.
[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