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광수 검찰총장 | ||
특히 올해는 부정·부패 수사에서 검찰과 경쟁관계에 서게 될 공직자부패수사처(공수처)가 설립될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부정·부패 수사의 검찰 대표선수인 대검 중수부의 성적이 초라하다면 검찰로서는 당장 체면이 깎이는 것을 넘어 국내 최고 사정기관의 지위도 위협받게 될 우려가 있다.
최근 들어 송광수 총장이 이례적으로 중수부를 향해 불만을 표시하는 듯한 상황이 몇 차례 연출됐다. 지난 연말 있었던 대검 기자단과의 송년 간담회에서 송 총장은 법원 고위 인사와 만난 자리에서 오간 일화 한 토막을 소개했다. 이 법원 인사는 송 총장과 안대희 전임 중수부장에 관한 얘기를 나누던 중 “그럼 지금 중수부장은 누굽니까”라고 송 총장에게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송 총장은 “누가 있긴 있습니다”라고 답하며 웃었다는 것이다. 이 일화는 지금은 사람들이 중수부장이 누구인지도 잘 모를 정도로 중수부가 수사 성과를 못 내고 있다는 속뜻을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물론 당시 대화는 평소 농담을 자주 구사하는 송 총장이 유머감각의 일단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송 총장이 이 일화를 많은 기자들이 있는 공개된 장소에서 언급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그만큼 송 총장이 언론 등 검찰 외부에서도 현 중수부가 미흡하다고 보고 있다는 점을 의식하고 있다는 증거로 풀이되고 있는 것.
송 총장은 또 신년에 들어서도 기자들에게 “중수부가 지난 한 해 동안 충분히 내실있는 준비를 했으니 올해는 뭔가 보여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준비만 하면서 시간만 보내지 말라는 중수부에 대한 경고처럼 느껴지는 말이다. 여기에 그는 “‘큰 칼’(중수부)로 ‘작은 떡’(작은 사건)을 자르려니 잘 안된다”며 최근 큰 수사를 못하고 작은 사건에 얽매여 있는 중수부를 의식하는 듯한 언급도 덧붙였다.
이처럼 송 총장이 최근 들어 박상길 중수부장과 관련된 ‘뼈’있는 말들을 공개적으로 던지자 검찰 일각에서는 송 총장이 수사 실적이 부진한 중수부에 대해 불만이 큰 것이 아니냐는 얘기들이 나돌기도 했다.
실제 지난해 6월 박상길 중수부장이 안대희 고검장의 바통을 이어받아 중수부를 맡은 지 6개월이 넘었지만 아직 중수부 명성에 걸맞은 사건들을 처리해 내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중수부가 처리한 사건은 최근 아파트 건축 인허가와 관련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시킨 박혁규 한나라당 의원과 김용규 경기 광주시장 사건, 지난해 수뢰혐의로 구속시킨 백범 김구 선생의 손자 김진 주택공사 사장 사건이 전부다.
▲ 박상길 대검 중수부장 | ||
특히 송 총장은 지난해 검찰이 공기업 비리 수사에 역점을 두겠다고 공언한 바 있지만 주공 사장 등을 제외하고 공기업의 구조적 비리를 제대로 파헤친 수사가 거의 없다. 이는 대검 중수부는 물론 중수부와 쌍벽을 이루는 서울중앙지검 특수부도 마찬가지다. 서울지검 특수부도 지난해 9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현철씨를 구속한 이후 최근 들어 큰 수사를 하는 것이 없어 사실상 ‘개점 휴업’ 상태다.
이처럼 최근 들어 대검 중수부가 대형 사건을 처리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현 박상길 중수부장이 전임 안대희 고검장과는 달리 워낙 신중한 스타일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많다. 박 중수부장은 대검 중수 1·2·3과장과 서울지검 특수 1·2·3부장, 대검 중수부 수사기획관과 서울지검 3차장 등 특수수사 관련 모든 핵심 보직을 거쳤으며, 수사 능력을 인정받은,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다.
그러나 전임 안대희 고검장이 마구 칼을 휘두르며 사건을 스스로 키우는 스타일이라면 박 중수부장은 이미 벌어진 사건을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데 능통한 ‘관리형’ 특수통이라는 평이다. 그러다 보니 중수부장에 온 이후 대선자금 수사의 뒷마무리에 주력하고 새로운 대형 수사에 착수하는 데는 신중하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중수부의 ‘수사 부진’에는 박 중수부장의 수사 스타일뿐 아니라 최근의 정치·경제 상황 자체가 검찰이 큰 수사를 하기에 부적절하다는 이른바 ‘수사환경론’도 주요 원인으로 보인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수사라는 것이 리듬이 있는 것”이라며 “대선자금 수사에서 피크로 치솟았던 리듬이 하향 곡선을 긋는 것은 당연하고 아직도 그 연장선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대선자금 수사에서 정치권과 대기업들이 엄청난 타격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또 다시 이들을 타깃으로 하는 대형 수사는 검찰로서도 부담스럽다는 얘기다. 여기에 최근 경기가 어렵다는 점도 검찰이 큰 수사를 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로 꼽힌다. 큰 수사라는 것이 어차피 재벌 등 대기업과 정치권력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파헤치는 것인데 자칫 대규모 수사로 재계를 헤집어 놓으면 경영활동을 더욱 위축시켜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우를 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검찰의 한 중견 간부는 “대통령 측근비리 수사를 통해 웬만한 권력형 비리가 싹을 제대로 틔우기도 전에 대부분 적발돼 과거 DJ정권 시절의 게이트 같은 비리가 형성되기에는 아직 시기 상조”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 같은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송광수 총장이 중수부를 질책한다기보다는 외부에서 중수부에 가해지는 비난에 미리 쐐기를 박기 위해 일련의 발언을 한 것이 아니냐”는 정반대의 해석도 내놓았다.
어쨌든 현재 대검 중수부와 서울지검 특수부 등 검찰 핵심 수사조직의 이 같은 수사부진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우선 다음달로 예정된 평검사 인사를 앞두고 검사들이 새로운 수사에 착수하기보다는 그동안 해왔던 수사를 마무리하는 데 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4월에 있을 신임 검찰총장 임명을 앞두고 국회 청문회도 준비해야 하는 입장에서 검찰이 칼을 정치권에 향해 놓고 있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도 있다. 결국 대검 중수부를 비롯한 검찰의 대형 수사는 4월 신임 총장이 임명된 이후 검찰 고위간부진의 교체가 이뤄져 새 진용이 짜여지는 올 5월 이후에나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이진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