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1년 3월7일자 <매일신보>는 ‘명가후예(名家後裔)와 강도(强盜)’ 제하의 기사에서 김좌진 장군(왼쪽)이 떼강도의 일원이었다고 보도했다. | ||
일제 강점기 때인 1911년 8월21일 고등법원의 판결에 의해 23세의 청년 김좌진은 ‘강도범’으로 확정됐다. 반면 독립운동가인 백야 김좌진 장군의 연표를 살펴보면 그는 1911년 3월에서 1913년 6월까지 군자금 모금죄로 일제 경찰에 잡혀 수감생활을 했다고 나와 있다. 똑같은 사건을 놓고 어떻게 해서 ‘강도’와 ‘독립운동’이라는 극과 극의 결과가 나온 것일까.
물론 이는 당시 시대 상황에 따른 일본의 시각과 우리 시각의 크나큰 차이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일제는 어떤 명분으로 김 장군을 강도로 몰 수 있었을까. 이번에 법원도서관에 의해 공개된 일제 ‘고등법원판결록’의 번역본 제1권에 나와 있는 판결 전문과 당시 이 사건을 보도한 바 있는 <매일신보>, 그리고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측의 설명을 토대로 당시 사건 속으로 들어가 보자.
먼저 당시 ‘고등법원판결록’ 원문을 보면 이 사건에 대해 ‘强盜の件(강도의 건)’이라는 제목 아래 ‘명치(明治) 40년 형(形) 제95호’라는 사건 번호를 붙여 판결 내용을 밝히고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의 고등법원은 최종 상고심(3심)을 맡은 법원. 결국 고등법원은 1심과 2심 결과에 불복하고 상고한 김좌진측의 주장에 대해 “이유없다”며 그를 강도범으로 본 원심을 확정하고 만다.
하지만 이 판결문은 상고심이기 때문에 당시 경성지방재판소와 경성공소원 등에서 판결한 1심과 2심의 내용은 자세히 언급돼 있지 않다. 따라서 사건의 구체적 정황도 자세히 나와 있지 않다. 이 사건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당시 유일한 신문이었던 <매일신보>를 뒤져 봤다.
다행히 <매일신보>는 1911년 3월7일자에 이 사건을 ‘명가후예(名家後裔)와 강도’란 제목으로 제법 비중 있게 보도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당시 사건은 1910년 연말에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기사에는 “남부 갑동 김좌진, 북부 삼청동 안승구, 중부 상마동 민병옥, 안승구 가(家)에 유연(留蓮)한 조형원, 남정원, 북부 삼청동 김찬수, 북부 원동 박종원, 7인은 작년 겨울에 단도(短刀)를 가지고 북부 제동의 남정철씨와 서부 윤림동 우성모씨와 중부 청석동 신성균씨 등 집에 침입하여 금전과 물품을 강탈 분취(分取)하고, 그 후에는 중부 교동의 최용환 김종근 양씨(兩氏) 집에 침입하여 금전을 강탈하기로 공모하다가 미수(未遂)하였고…(후략)”라고 나와 있다.
이 기사에는 후반부에 관련 범죄에 연루된 혐의로 11명을 함께 거론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노와 임정 국무원 비서장을 지낸 최창식 등 독립운동가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당시 북부경찰서에 모두 연행됐다고 나와 있다.
이후 이 신문은 3월16일과 4월12일, 22일, 25일, 5월4일 등 여러 차례에 걸쳐 단신 기사로 이 사건의 재판 진행과정 등을 보도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7명의 강도범과 구분해서 공범으로 체포된 11명의 인사에 대해서는 사건에 직접적인 연관성이 부족하다고 하여 모두 무죄 석방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 외에도 안승구의 처 박아무개씨가 남편의 무죄를 호소하기 위해 혈서를 써서 경성지방재판소 검찰국에 보냈다는 내용과 공판 현장에 가족과 관계자 수백여 명이 운집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당시 <매일신보>는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발행되던 한국어 일간 신문이었기 때문에 김 장군을 시종일관 ‘7인의 강도범’ 가운데 한 명으로 소개하는 등 그 논조가 일제의 관점에서 보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 장군의 입장은 당시 판결문에 나와 있는 변호인단의 상고 내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당시 김 장군측의 변호인 김정목 변호사는 “피고 김좌진은 민병옥 안승구 등이 제의한 서간도로의 이주에 대하여 찬성은 하였지만, 그 이주비 조달을 위해 함께 강도하기로 한 일은 없기 때문에 본 사건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피고가 김종근에 대한 석탄 대금 독촉과 관련해서 또 다른 피고인 민병옥에게 김씨 가택을 알려준 바는 있지만 강도 행위를 찬조하기 위하여 지시한 사실이 없으며, 민씨가 자기 변명을 위해 (거짓) 진술한 것은 증인 김병로 등의 진술에 의해서도 명백히 밝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 장군의 일본인 변호인들인 이와모토와 키오 변호사는 “피고 김좌진은 피해자 김종근의 집을 알려만 줬을 뿐이므로 그 행위는 종범(從犯)임에도 불구하고, 수범(首犯)과 구분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피해자 김종근은 피고 김좌진의 증조부에 해당하므로 ‘제쇠(齊衰·친족이라 죄의 경감을 나타내는 말인 듯) 5월’에 해당한다”며 다소 소극적인 변론을 펴고 있다.
이 같은 변호인단의 주장에 대해 고등법원은 각각 “원심과 사실 인정, 증거 판단을 달리하여 자가독견(自家獨見)의 사실을 근거로 하고 있다”, “강도죄와 같은 것은 수종(首從)을 구분하지 않고 처벌해야 한다”, “친족간에 절도를 행한 자에 대하여 감형을 규정을 한 것은 강폭(强暴) 등과 같은 행위를 동반하지 않고 재물을 절취한 경우에만 해당한다”며 변호인의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
당시 사건에 대해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측은 “김 장군이 1911년 강도죄 혐의로 옥고를 치렀다는 사실은 이미 지난날 기념사업회 준비 과정에서 일제 치하 당시 신문 자료 등을 통해 확인한 바 있다”며 “당시에도 이는 일제의 독립운동 탄압 차원에서 빚어진 억울한 누명이라는 판단을 했지만, 이번 판결록 내용을 통해 다시 한번 확실하게 일제 사법부가 김 장군의 독립운동 활동을 막기 위해 억지로 꾸민 내용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기념사업회측은 그 근거로 “당초에는 김 장군을 포함한 7명의 떼강도들이 마치 5개의 집을 대상으로 집중적으로 강도짓을 저지른 것처럼 신문에 보도했지만, 사건 발생 약 8~9개월여가 지난 후의 고등법원 판결문에는 김 장군과 안승구 만이 피고로 상정되어 있고, 그 언급한 사건 역시 김종근씨 집 침입만 다루고 있다. 즉 다른 사건과 김 장군은 관련이 없는 것이다. 또한 또 다른 피고인 민씨의 거짓 진술에만 의존해서 김 장군이 자신의 증조부 집을 강도 대상으로 하라고 지시했다고 결정하고 있다. 그것으로 볼 때 민씨 등이 침입(?)한 집 가운데 마침 김 장군의 친족 집안인 김씨 집이 있자, 그것을 빌미로 김 장군을 연루시킨 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