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3월19일 경찰 총수로선 처음으로 허준영 경찰청장(오른쪽 두 번째)이 독도에 발을 디뎠다. 사진공동취재단 | ||
노 대통령은 지난 21일 법무부의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과거의 기득권과 습관을 바꾸고 새로운 것을 모색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며 “이것은 거부할 수 없는 변화의 흐름이며 검찰이 갖고 있는 ‘제도 이상의 권력’을 변화의 흐름 속에서 내놓을 것은 내놔야 한다”고 말했다.
검찰의 ‘권력 이양’을 통한 자기혁신을 강조한 이 같은 언급은 수사권 조정에 대한 노 대통령의 의지가 담긴 것으로 경찰은 파악하고 있다. 경찰은 이런 분위기를 끝까지 이어가 ‘결실’을 맺겠다는 각오가 대단해 보인다.
허 청장은 지난 19일 경찰청 출입기자단 간담회에서 의미심장한 사자성어를 동원해 수사권 조정에 대해 결의를 다졌다. 그는 “권한은 검찰이 갖고 책임은 경찰이 지는 ‘권검책경(權檢責警)’은 권한에 상응한 책임, 책임에 상응한 권한을 갖도록 조정돼야 한다”고 검찰에 직격탄을 날렸다. 수사에서 검찰의 지시를 받아야 하는 경찰 입장에선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을 법한 격한 발언이다.
검찰을 겨냥한 허 청장의 발언 수위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맞장 한번 붙어보자는 식이다. 허 청장은 송광수 전 검찰총장이 검찰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짠 맛을 잃은 소금은 내버려져서 짓밟힐 따름”이라며 ‘소금론’을 밝히자, “소금도 한 가지만 있으면 안된다. 굵은 소금, 가는 소금, 그리고 맛소금 등 여러 가지가 있다”고 역공을 취했다. 이 사회에서 검찰만 소금이 아니라 경찰도 소금이라는 논리다.
지난 1월 경찰청장에 취임한 그는 서울 종로구 신문로 경찰청장 관사에 감나무를 심었다. 그러면서 “올 가을에 감이 열리면 (경찰에게) 하나씩 나눠줄 생각”이라고 말했다. 수사권 조정을 올해 안에 매듭지어 ‘열매’를 경찰에게 선물하겠다는 의지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 최근 노무현 대통령도 허준영 경찰청장에 힘을 실어주는 분위기다. | ||
허 청장의 광폭행보도 주목된다. 경찰로서는 드물게 정치력과 보스 기질을 갖고 있다는 평을 받는 그는 경찰에 우호적인 여론조성을 위해 발벗고 나섰다.
그의 행보 앞에서는 항상 ‘경찰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그는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과 독도 도발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치솟자 독도를 방문했고, 4·19 기념일에는 서울 수유리 4·19 묘역을 방문했다. 내달 5·18 때에는 광주 망월동 묘역도 찾는다. 모두 경찰청장으로서는 처음 하는 일이다.
허 청장은 4·19 묘역에 참배한 뒤 “창경 60주년을 맞아 새로운 경찰로 새출발하기 위해 방문했다”며 “경찰에서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까지 만들어진 시점에서 경찰총수가 민주열사들의 묘역을 방문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독도 방문 때는 “지구상에 다케시마(竹島)는 없다”고 해서 네티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사이버상에는 허 청장을 이순신 장군 모습과 합성한 패러디 사진이 유행할 정도로 그의 인기는 상당하다.
경찰 지도부 한 관계자는 최근 한 사석에서 “4·19 혁명 때 이승만 정권 타도를 외쳤던 시민들에게 총을 쏘았던 경찰과 지금의 경찰은 완전히 다르다”며 “우리 스스로 원죄로부터 벗어났고, 이전의 과오에 스스로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민주 경찰로서 자신감의 표현인 셈이다. 과거 독재정권의 주구로서 국민의 비판을 받았던 경찰이 이제는 아니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허 청장은 지난 14일에는 리언 러포트 주한 미군 사령관로부터 오찬 초청을 받았다. 외무고시 14회 출신으로 외교관에서 경찰을 지원한 허 청장은 영어실력이 뛰어나다. 그 자리에서 허 청장은 “누가 가장 강한지(strongest) 아느냐”는 질문을 러포트 사령관에게 한 뒤 “세계에서 가장 강한 미군을 경비하는 경찰이 가장 강하다”고 스스로 답변했다.
허 청장의 행보는 주도면밀하다. 자신은 거침없이 자신감을 피력하면서 조직의 몸조심에도 빈틈이 없다.
검찰과의 치열한 여론 얻기 싸움에서 책잡힐 일을 하지 않겠다는 셈법이다. 실제로 경찰의 수사권 독립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검찰은 경찰의 비리와 부조리를 들춰내 경찰의 발목을 잡은 것이 사실이다. 이번에는 검찰에게 이 같은 빌미를 주지 않겠다는 경찰 수뇌부의 확고한 의지가 읽히는 대목이다.
최광식 경찰청 차장은 최근 “검찰은 검사와 검찰수사관을 포함해 6천 명이 조금 넘지만 경찰은 15만 명이 넘는다”며 “이 같은 거대 조직에서 한 명이라도 사고를 칠까 조마조마한 것이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지금처럼 민감한 시기에 국민의 지탄을 받을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허 청장의 행보에 대한 비판이 경찰 안팎에서 심심치 않게 제기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구경북(TK) 출신인 허 청장이 내년 6월 지방선거를 노리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3선 연임 제한에 걸려 있는 이의근 경북지사의 후임을 생각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허 청장의 핵심 측근은 “허 청장이 정치적 야심을 갖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수사권 조정에 실패할 경우 아무 일도 하지 못할 것”이라며 “허 청장은 해방 이후 60년에 걸친 경찰의 숙원인 수사권 조정에 인생의 승부를 건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허 청장이 수사권 조정 문제를 성공적으로 매듭 짓느냐, 아니면 좌절 하느냐에 따라 그의 향후 행보는 물론 경찰 전체의 명운이 엇갈릴 것으로 보인다.
이필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