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 외교·안보 라인에서 일했던 한 고위 공직자는 지난 7월 3일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간의 한중 정상회담 결과를 지켜본 소회를 이렇게 밝혔다. “순풍에 돛을 달자”는 시 주석의 발언이 보여주듯 두 나라가 ‘밀월’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친밀도를 높여가고 있지만 뭔가 부족한 게 있다는 평가가 깔려 있었다. 뒤집어 말하면 실질적인 진전, 가시적인 성과가 없다면 한중 간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도 한순간에 식어버릴 수 있다는 우려 섞인 반응이었다.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이 지난 3일 청와대에서 공식 기자회견을 열고 회담 결과를 발표하는 모습. 사진제공=청와대
박대통령과 시 주석이 이번 회담을 마치고 발표한 공동성명과 부속서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런 우려가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어정쩡한 타협’이라는 평가처럼 두 정상은 북한 핵과 일본 우경화 등 이번 회담의 핵심 관심사에 대해 깔끔하고 시원한 합의를 도출해 내지 못했다.
우선 두 정상은 북한의 핵 개발이 동북아 정세에 미치는 악영향에 우려를 표하면서 ‘북핵 불용’ 원칙을 재확인했다. 하지만 정작 공동성명에는 “양측은 한반도에서의 핵무기 개발에 확고히 반대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는 문구만 들어갔다. 공동 기자회견에서도 박 대통령은 “두 정상은 북한 비핵화를 실현하고 핵 실험을 결연히 반대한다는 데 뜻을 같이 했다”고 말했지만 시 주석은 “한반도의 비핵화 실현과 평화·안정 유지가 6자회담 참가국의 공동 이익에 부합한다”고 했다. 한국은 ‘북한 비핵화’를, 중국은 ‘한반도 비핵화’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얘기인 것 같지만 두 가지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다. ‘북한 비핵화’는 북한의 새로운 핵무기 개발이나 핵 실험에 반대한다는 의미와 함께 이미 개발됐을지도 모를 핵무기도 폐기돼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 정부가 줄기차게 주장해 오고 있는 내용이다.
이와 달리 ‘한반도 비핵화’는 북한 비핵화에 더해 한국의 비핵화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에 따르면 한국이 자위적 목적으로 핵 무장을 추진하는 것은 물론 미국이 한국에 핵우산을 제공하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자신의 앞마당 격인 한반도가 화약고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 중국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개념이다. 이런 현격한 의미 차이 때문에 이번 회담을 마치고 정부 당국자들은 “공동성명에 담긴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은 곧 북한의 비핵화를 의미한다”고 설명했지만, ‘그게 어떻게 같은 의미냐’는 기자들의 송곳 질문에 진땀을 빼야 했다.
박 대통령이 독일 순방 때 내놓은 대북 제안인 ‘드레스덴 구상’을 놓고도 한중은 시각차를 보였다. 박 대통령은 회담에서 시 주석에게 드레스덴 구상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이해를 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공동성명에는 “중국이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기울인 한국의 노력을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 실현을 지지했다”는 수준의 문구만 반영됐다. ‘드레스덴 구상 지지’라는 표현은 들어가지 않았다.
‘북한 비핵화’나 ‘드레스덴 구상 지지’라는 표현이 공동성명에 반영되지 않은 이유는 중국의 반대 때문이다. 북중 동맹 악화를 우려한 중국 측이 난색을 표하는 바람에 모호하고 어정쩡한 표현으로 타협한 것이다.
이와 반대로 일본 우경화에 대한 대응 면에서는 중국 측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중국 정부는 이번 회담에서 한중 양국이 공동으로 강력한 대일 메시지를 내기를 희망했다고 한다. 실제로 시 주석은 박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70년이 되는 2015년 양국이 공동으로 기념행사를 열자는 제안을 했다고 중국 언론들이 보도했다. 박 대통령은 이에 대해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중국과 손잡고 일본과 각을 세우는 것은 일본뿐 아니라 일본의 동맹국인 미국까지 자극할 수 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일본 문제에 대한 한국 정부의 신중한 태도는 한중 공동성명에도 영향을 줬다. 이번 공동성명에 일본의 우경화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전혀 담기지 않았다. 이번 회담 직전 일본 정부가 위안부 강제 동원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검증 결과를 내놓고 집단자위권 추진을 위해 헌법 해석까지 변경했던 점을 감안하면 의아하게 느껴질 정도다. 외교부 당국자들은 “정상회담을 통해 발표하는 공동문서에서 제3국을 언급하는 것은 외교적 관례에 맞지 않다”고 설명했다.
중국으로서는 한국의 이런 소극적 태도가 못마땅할 수밖에 없다. 비공개 회담에서 언급됐던 ‘종전 70주년 공동행사’ 아이디어가 중국 관영 언론을 통해 외부로 알려진 게 그 근거 중 하나다. 중국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한 새누리당 관계자는 “중국 사회의 특성상 관영 매체는 물론 민영 매체라 하더라도 정부의 뜻에 반하는 보도를 내보내기는 어렵다”며 “비공개 회의 내용이 관영 언론에 보도됐다면 그건 곧 중국 정부의 뜻이라는 의미”라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이 3일 청와대에서 정상회담을 했다. 사진제공=청와대
시 주석이 한중 정상회담 다음날인 7월 4일 서울대 강연에서 “20세기 상반기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중·한에 대한 야만적 침략 전쟁을 강행, 한반도를 병탄하고 중국 국토의 절반을 강점해 양국이 모두 큰 고난을 겪었다”고 강력 비난한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도 나온다.
결과적으로 이번 회담을 통해 한중 양국은 관계 발전의 한계선을 확인했다고 볼 수도 있는 셈이다. ‘한·미·일 3각 공조’를 포기할 수 없는 한국과 ‘북중 동맹’을 견지하려는 중국이 아무리 의기투합하려 해도 건너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 이런 한계선이 어정쩡하고 모호한 공동성명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는 박 대통령의 동북아 전략과 정책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위기 징후이기도 하다. 박 대통령의 동북아 전략은 ‘이중제북(以中制北·중국으로 북한을 제어한다)’과 ‘이미제일(以美制日·미국으로 일본을 제어한다)’로 요약된다. 이 두 가지 전략이 한꺼번에 폐기처분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게 박 대통령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요인이다.
‘이중제북’ 전략을 위기에 빠뜨리는 대표적인 요인은 온갖 압박에도 불구하고 계속되고 있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과 미일 동맹의 중국 포위 전략이다. 중국이 한국과의 관계 발전에 열을 올리자 북한은 점점 러시아 쪽으로 기울면서 중국에 대해 원색적 비난을 퍼붓는 것도 주저하지 않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미국은 한국, 중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집단자위권 추진을 환영하는 등 일본과의 동맹을 한층 더 강화하는 동시에 한국에 대해서도 MD(미사일방어체계) 편입을 압박하고 있다. 중국이 북한을 방치해둔 채 마냥 한국에게만 구애를 보낼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이미제일’ 전략도 위기에 처하긴 마찬가지다. 지난해 말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 노골적인 역사 왜곡으로 인해 미일 관계가 잠시 난기류를 만난 듯했지만, 이런 분위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개선될 기미가 안 보이는 재정난, 이라크의 정정불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압박 등이 모두 미국 정부를 다급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미국으로서는 일본의 역할 확대를 조장함으로써 동북아에 대한 부담이라도 더는 방법을 택하게 됐다. 미국을 통해 일본을 제어하려는 한국 정부의 전략이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는 셈이다. 오히려 한미 동맹과 미일 동맹을 하나로 묶어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전략이 중국의 팽창주의와 충돌하면서 한국은 점점 더 ‘미국이냐, 중국이냐’라는 곤혹스러운 선택으로 내몰리는 양상이다.
이 같은 사태 진전은 한국 외교가 맞닥뜨린 중대한 도전이자 박 대통령에게도 심각한 위협일 수밖에 없다. 동북아 정세가 ‘미·일 대 북·중’ 대결구도로 쏠리면 쏠릴수록 한국이 할 수 있는 일은 줄어든다. 이전 정부들과 달리 미국과 중국을 양 손에 잡고 절묘하게 줄타기를 해 온 박근혜 정부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외교 면에서는 역대 최고라는 평가를 받아 온 박 대통령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셈이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