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경령 전 서울지검 검사는 가혹행위를 방조한 혐의로 지난 5월26일 대법원서 징역 1년6개월이 확정됐다. 사진은 지난 2002년 11월 영장실질심사를 위해 법원에 출두한 모습. | ||
정부도 발 빠른 조치를 했다. 김정길 법무장관, 이명재 검찰총장이 경질되고 홍경령 주임검사가 바로 구속됐다. 조폭 내부의 잔혹한 살인이 부각되고 그들의 본거지인 창녀촌에 대한 집중단속이 계속됐다. 초겨울의 싸늘한 바람이 북한산 계곡으로부터 불어오는 주말의 오후였다. 산길을 가는 도중에 휴대폰이 울렸다. 처음 듣는 낮은 음성이었다.
“검찰청 고문살인사건 아시죠? 저 거기서 죽기 직전에 도망 나온 사람인데요, 지금 쫓기고 있습니다. 도와주십쇼.”
도망간 조폭 부두목이었다. 그는 한 기자가 나를 소개했다고 했다. 몇 시간 후 나는 모종의 장소에서 그를 만났다. 번들거리는 군용 점퍼를 입은 그는 각진 얼굴에 부리부리한 눈이었다. 식당을 하는 어머니와 룸살롱을 하는 누나가 옆에 있었다.
“나를 샌드백 치듯 몇 시간 두들겨 패고 수갑을 뒤로 채운 채로 콘크리트 바닥에 눕혀놓고 두 다리를 번쩍 들어 머리 쪽으로 젖혔어요. 등 뒤로 수갑 찬 팔목 뼈가 바닥에 눌려 부러질 것 같더라고요. 수사관이 다리 사이에 나온 불알을 주먹으로 까고 내 물건을 잡아당겼어요. 같이 잡혀간 후배는 맞아 죽었어요.”
변호사인 난 종종 그런 호소를 들었다. 대개 폭력배들이 폭력을 무서워하고 사기꾼이 사기를 당했다. 회계사 같은 전문가들은 옷을 벗기고 바닥에 누워 양팔과 다리를 하늘을 향해 들고 있는 기합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들은 초기에 면회가 금지됐다. 상처가 노출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변호사인 내가 찾아가 사진을 찍으려다 제지당한 적도 있었다. 교도관에게 증언하라고 하면 다른 곳을 쳐다보고 외면하기도 했다. 법정에서 주장해도 증거가 없다고 해서 고문은 거의 외면됐다.
그런데 이상하게 변호사인 나조차도 어떤 때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철저히 야비한 조폭들에게는 원색적인 폭력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라는 함무라비 법전대로 주먹 장사를 하는 그들은 어쩌면 먼저 맞아야 할지도 몰랐다. 변호사 생활이 이제 제법 된 나는 형식적 명분만 앞세워 함부로 행동하기보다는 선입견 없는 눈으로 사실 그 자체를 보려고 애쓴다.
“건달입니까? 어느 조직의 어느 급입니까?”
나는 신문 보도를 떠올리며 그들에게 물었다.
“지역건달이죠. 그런데 아직 중간급밖에는 안돼요.”
룸살롱을 한다는 누나가 당당하게 동생을 건달이라고 표현했다.
“어떻게 아들이 건달이 됐어요?”
내가 그 옆에 있는 그의 늙은 엄마를 보고 물었다.
“우리 아들이 군대 대신 의경으로 경찰서에서 근무했는데 순경시험을 보고 경찰로 들어갈까 아니면 건달 길로 갈까 고심했어요. 그러다가 조직에 가입해서 건달 길로 가기로 했어요.”
이미 그들에게 조폭이란 원색의 권력단체였다. 복잡한 법적절차에 얽매여 있는 경찰보다 더 편리하고 돈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이라는 의식이었다.
조폭 영화가 범람하고 두목들이 매력적인 영웅이 되면서 좌절한 십대들의 희망이 된 지 오래였다.
“그러면 변호비도 조직에서 나오는 겁니까?”
내가 거부감을 느끼며 확인했다.
“네. 뒤에서 선배들이 해준다고 그랬어요.”
누나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전 변호 안하렵니다. 건달 앞잡이가 아닙니다.”
내가 거절했다. 그때 갑자기 그의 엄마가 끼어들었다.
“아, 아니에요. 제가 엄만데 내 돈을 낼 겁니다.”
조직들은 그래서 항상 가족을 앞세워 변호사 사무실로 찾아갔다. 나는 검찰청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강한 호기심이 일었다. 검찰과 조폭 양쪽에서 하는 싸움의 이면을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구속된 강력부의 홍 검사는 집념가로 알려져 있었다. 장안동파 조직원이 상대방 조직원을 살해한 것을 수사해서 개가를 이룬 것이 검찰의 모범사례가 되기도 했다. 멀리 떨어진 전세아파트에서 출퇴근하는 시간이 아까워 한 달에 반은 사무실에서 자면서 수사하는 독종이라고 했다. 영구미제의 사건을 파헤치는 게 그의 보람이었다. 서울구치소에는 그가 구속한 인물이 많아 당국은 그를 성동구치소에 수감시켰다.
홍 검사가 수사를 하던 내용은 대충 이랬다. 1998년 6월25일 일산의 한 아파트에서 손목이 예리한 칼에 뼈까지 잘려 죽은 남자의 시체가 발견됐다. 죽은 남자는 조폭의 간부였다. 그 1년 4개월 후인 1999년 10월17일 새벽 마포구 주택가의 인적이 드문 골목에서 삼십대 중반의 남자가 사시미 칼로 열다섯 방을 맞고 절명했다. 경찰은 현장주변을 맴돌다가 사라진 ‘경기45’라는 흰색 프린스 승용차를 봤다는 진술만 확보했다.
전혀 관련이 없는 듯한 두 사건을 3년의 추적 끝에 홍 검사는 자백을 받았다. 첫째 살인은 교도소에 있던 조직의 보스가 비밀명령을 내려 그 심복이 살해한 것이라고 했다. 두 번째 살인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증인을 없앤 것이라고 했다. 내게 찾아온 남자는 현장지휘를 한 부두목이라고 했다.
“이제 검찰은 10년을 수사해도 증거를 못 잡아요. 절대 잡지 못한다니까요. 잡았던 아이들마저 다 풀어줘야 할 걸요.”
보스의 오른팔로 알려진 그가 자신 있는 표정으로 내뱉었다. 경찰서에서 근무했다는 그는 조사의 실무를 빠삭하게 꿰고 있었다. 그가 계속했다.
“검찰은 앞으로 저를 범죄단체 조직의 부두목 급으로 기소하고 싶어 할 테죠. 그렇지만 그것도 물 건너갔어요. 지금 조직원들이 전부 잠수해서 하나도 없는데 저를 어떻게 범죄단체 간부로 기소를 하겠어요? 진술할 참고인이 하나도 없는데 말이죠. 앞으로 검찰이 궁여지책으로 나를 사기도박이나 도박 개장죄로 얽어맬 거예요. 그것도 적당히 부인하고 버티면 무죄가 나온다고 제 위의 경험 많은 형님들이 알려줬어요.”
그들은 법망을 빠져나가는 데 발달된 지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결과만 있을 뿐 수단방법이나 선악의 관념이 없었다. 그들에게 재판은 참회의 장이 아니라 하나의 게임 판이었다. 그가 검찰을 비웃는 듯 한마디 덧붙였다.
“이번에 고문치사사건 참고인으로 검찰에 자진해서 들어갔더니 칙사 대접이더라고요. 대검 감찰부에서 고문을 하던 수사관과 대질했는데 그 수사관이 전혀 고문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오히려 내가 착각하고 있다고 말하더라고요. 하여튼 우리하고 질적으로 하는 짓이 똑같아요. 국가 소속 건달자격증만 가졌다 뿐이지. 그리고 처음에 날 잡아간 새끼 말이죠. 내가 일수를 거둔 돈가방을 차 안에 놔뒀거든요. 그게 지금까지 영 소식이 없어요. 모르는 척 가만있으면 슬쩍 먹을걸요.”
난 그의 말에 정이 떨어져가고 있었다. 나는 증거들을 이미 살펴보았다.
그는 자백을 했었다. 경찰 출신 건달이 단지 매가 무서워 불었다고 생각되지만은 않았다. 살해 현장에서 목격된 경기45의 흰색프린스는 그의 차가 맞았다. 또 그 프린스 안에서는 공범의 안경이 발견됐다. 홍 검사는 살인범 애인의 진술을 이미 확보해 놓고 있었다. 거의 완성된 수사에서 용의자를 죽여 버린 것이다.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자 자백했던 용의자들이 일제히 진술을 번복했다. 나는 그가 없을 때 가족들에게 증거들을 제시하면서 진실을 물었다. 조폭들은 변호사를 사건조작과 로비, 그리고 증거인멸을 시키는 도구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진실을 묻는 자체에 반발했다.
“살인을 부인하면 변호사가 그대로 주장만 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 가족이 정색을 하고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더 이상 그들을 대하기 싫어졌다. 나는 많은 걸 들여다봤다. 다른 조직원을 통해 그들의 뒤에서 치밀하게 하는 연출을 보았다. 조직은 시나리오를 미리 구상해서 참고인들의 말을 맞추게 하고 있었다. 그들은 당연히 진범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검찰의 눈길을 돌리기 위해 모텔 방에서 검찰의 예상 질문과 답변을 만들어 치밀한 예행연습을 시킨 후 조직원을 위장 자수시켰다.
그들은 고문치사로 약세에 몰린 검찰의 약점까지 잡고 여론을 이용하는 것 같았다. 난 그들을 단호히 거부했다. 슬슬 구치소 방을 바꾸어 달라는 등 무리한 요구와 트집이 있었다. 어느 날 눈이 날카로운 남자를 데리고 가족이 찾아왔다. 처음에 와서 애절하게 사정하던 그 눈빛이 일변했다.
“이거 죄송해서 어떻게 하죠?”
말은 최고로 점잖았다. 그만하면 예의를 차리는 편이었다. 조폭들이 실컷 이용하고 난 뒤 변호사에게 어떻게 한다는 건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그들이 돌아가고 난 후 사무장이 들어와 이렇게 말했다.
“현직에 있다가 막 개업을 한 변호사에게 간다고 하던데요. 그래야 약발이 좋아서 가는 거래요. 우리가 받은 돈은 불쌍하니까 발삯은 조금 공제하고 오늘부로 그 변호사 계좌로 보내달라고 하던데요….”
약간의 돈이라도 남겼으면 그들은 그래도 인심이 후한 편이었다. 그 얼마 후 그들은 보란 듯 자기네의 승리를 내게 자랑하러 왔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