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씨는 “아내와 아이들은 ‘문화생활 좀 하고 살자’고 하지만 내가 언제 그런 걸 해봤어야지. 여행도 한두 번이지, 이번 주말은 가족들과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쏟아냈다.
그러나 A씨의 고민은 그나마 ‘행복한’ 축에 든다. 적어도 다른 가장들이 ‘남성의 전화’에 쏟아내는 심각한 토로에 비하면. 국내 유일의 남성 고민 상담소인 ‘남성의 전화’(02-2652-0456)에는 하루에도 수십 건씩 ‘고민남’들의 상담 요청이 밀려든다.
10년째 ‘남성의 전화’를 운영하고 있는 이옥이 소장에 따르면 경제 문제로 인한 부부갈등이 상담의 상당수를 차지한다. 특히 요즘엔 여성들이 가정에 안주하려 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사회활동을 하면서 상대적으로 ‘작아진’ 남성들이 고민을 토로하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한다. 직장에서 차이고 가정에서 내몰린 가장들의 하소연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40대 초반인 B씨는 얼마 전 회사 구조조정으로 조기퇴직을 했다. 그러나 그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내로부터 이혼을 요구받았다. 회사에서 받은 퇴직금으로 아내와 함께 장사를 하려 했던 B씨에게는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아내는 아이들은 자신이 키울 테니 위자료로 살던 집을 달라고 했다. 이미 일자리도 구한 듯했다. 자신이 밤낮없이 밖에서 뛰는 사이, 집 안의 아내와 아이들은 낯선 사람이 돼 있었다. ‘나는 그저 돈 버는 기계에 불과했나….’ 이제 B씨는 회사에서 쫓겨나고 가정에서도 버림받을 판이다.
명예퇴직을 하고 다른 일자리를 구하고 있는 C씨. 그는 퇴직 후 아침밥을 제대로 먹어본 적이 없다고 고백한다. 직장도 없는데 일찍 일어나 “밥 달라”고 하기도 미안했지만, 얼마 전 아내에게 “아침 차려 달라”고 했다가 심한 구박을 당했기 때문이다. “당신이 뭐 하는 게 있다고 아침부터 밥 달라고 하느냐”는 호통에 울컥 가슴에서 뭔가가 치솟았지만 그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아내가 파트타임 일자리를 구한 요즘 C씨는 가사일도 도맡아 하고 있다. 아내와 아이들의 식사를 준비하는 것부터 설거지는 기본. 아내의 속옷까지 빨아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할 뿐이다.
‘남성의 전화’의 상담 사례에 따르면 이제 40대 남성에게 탄탄한 경제력은 기본이고 다정다감한 아빠와 남편의 역할은 필수다.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당하기 십상이고, 집에서 “재미없다”라는 말을 듣게 되는 순간, 아내와 아이들로부터 ‘왕따’당한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40대에 노후 준비를 시작한다고 했지만 이젠 40대에 웬만한 노후 준비가 끝나야 가장 대접을 받는 세상이 됐다.
이옥이 소장은 40대와는 달리 30대 남성들의 경우 자기보다 능력 좋은 아내와 사사건건 간섭하는 처가 문제로 고민을 털어놓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아직도 신혼인 30대 초반 D씨의 사례.
D씨는 요즘 아내에게 불만이 많다. 자그마한 가전제품 하나를 사더라도 아내는 꼭 장모에게 물어보고 산다. 명색이 가장인데 가정에서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결정은 장모가 하고 아내는 그런 장모의 결정을 자신에게 통보해줄 뿐이다. 장모도 그런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결혼하면서 집을 구할 때 처가에서 도움을 줬으니 그 정도 간섭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D씨는 마치 처가에서 더부살이를 하는 듯하다고 하소연했다.
30대 중반인 E씨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E씨 부부는 맞벌이로 친구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편이다. 아내와 함께 알뜰히 모아 어느 정도 기반도 다졌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아내가 이혼을 요구한다. 이유는 단 하나. 아내는 “내가 당신보다 돈을 더 많이 벌지 않느냐”며 “비전 없는 남자와 평생 살 수 없다”고 했다. 급기야 아내는 시집올 때 가져온 살림살이를 모두 가지고 나가버렸다. 처가도 이런 아내에게 “아직 젊으니 다시 시작하라”고 적극 지지하고 있다. E씨는 집 나간 아내보다 이혼을 부추기는 듯한 처가 식구들이 더 밉다고 한탄했다.
50대 초반인 F씨의 경우는 퇴직과 함께 아내가 이혼을 요구한 케이스. F씨가 회사를 그만두고 퇴직금을 받자마자 아내는 “이젠 나도 즐기며 살겠다”며 남편 퇴직금의 절반을 요구했다. F씨가 거절하자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혼하자”고 요구했다. 이혼하며 재산분할을 청구하면 절반은 자신이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인 듯했다. F씨는 오랫동안 갈등하다가 ‘정말 아내가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퇴직금의 일부를 줬다. 지금은 가정의 경제권까지 아내에게 내놓았다. 요즘 F씨는 아내가 또 어떤 것을 요구할지 두렵다.
50대의 상담전화는 다른 연령 층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편. 하지만 중년의 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심각한 사례들이 적지 않다. 이제까지 가부장적인 사고를 가지고 30대, 40대에 비해 안정적인 가장의 권위를 누리고 살아온 이들은 ‘아내의 갑작스런 ‘변심’을 이해 못한다. 더욱이 50대 남성 스스로가 시대에 따라 달라진 여성의 요구에 대해 문제의식이 거의 없다. ‘남성의 전화’에서도 이런 50대 남성들의 상담이 가장 어렵다고 한다.
30대 후반인 G씨는 요즘 집 나간 아내 생각만 하면 울화통이 터질 것 같다. 우연히 아내의 불륜을 알게 됐고, 이것 때문에 부부간 갈등이 시작됐다. 그러나 아내는 뉘우치는 기색이 별로 없다. 처가 쪽도 ‘요즘 여자가 외도하는 게 대수냐’는 식으로 E씨가 ‘이해’하길 강요한다. 아내는 처가로 간 지 한 달이 넘도록 아직 연락이 없다. 고민 끝에 그는 최근 ‘남성의 전화’를 노크했다.
이 소장은 지난 10년간의 상담 추이를 놓고 볼 때 여성의 외도와 매 맞는 남성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는 점에 우려를 나타냈다. 이 소장은 “한국여성은 아직도 가정과 사회에서 약자다. 하지만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면서 거꾸로 가정에서 고통받는 남성이 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의 여성들은 사회활동으로 인해 남편 외에 다른 남자와 만날 기회가 많아졌고 과거 권위적인 남편상을 인정하지 않는다. 세상과 자신의 아내는 변해가고 있는데 남성만 옛날 사고방식을 가지고 변화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이런저런 사연으로 고민을 털어놓는 남성들이 더욱 늘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이 소장은 “남성들도 가정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찾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이러한 갈등을 예방하기 위해선 부부 간 가사분담은 물론이고 평소 아내에게 배려하고 애정을 표현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