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천 군부대에서 발생한 총기난사사건 현장. | ||
하지만 군 당국과 유가족들은 사건의 진상 파악과 수사 기록 공개를 놓고 여전히 첨예하게 대립중이다. 유가족들은 사건 발생 초보다 더욱 강한 어조로 군 당국을 다그치면서 사건의 재조사와 구체적인 사건 기록 공개를 요구하고 있다.
일단 지난 8월에 이어 9월14일 열린 피고 김동민 일병에 대한 두 차례 재판도 군 헌병대와 군 검찰의 수사 내용을 재차 확인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군 검찰과 변호인 또한 법정에서 사고 당시 지나쳐버린 새로운 정황을 찾고 검증하는 것보다는 김 일병의 평소 부대 생활과 심리 상태, 그리고 사건 규명과는 직접 연관 없는 사실을 신문하는 데 치중하는 모습이다.
재판부 역시 김 일병에게 본인 범행 여부 정도만 확인할 뿐, 검찰과 변호인단이 증인으로 신청한 생존 사병들의 출석 요구까지도 취하해 오히려 “서둘러 이번 사건을 봉합하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의구심만 키우고 있다.
상황이 이렇자 유가족들이 지난 2차 공판에서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의혹을 담은 진술서까지 재판부에 제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난 6월23일 육군이 발표한 수사 내용의 일부는 증거력이 없다고 판단한 유가족들은 직접 현지에서 목격한 사고 현장 상황과 군 당국의 수사 발표, 그리고 군의 시신 검안서, 범인 검거 시간 등을 놓고 여러 의혹을 제기한 상태다.
과연 연천 총기 난사 사건에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또 다른 진상이 숨겨져 있는 걸까. 진술서에 나타난 유가족들의 주장을 정리해 보면 이렇다.
유가족들은 사고 현장, 사고 동기 및 경위, 증거물 항목에 관해 여러 가지 의혹을 제기했다. 우선 사고 현장과 관련해서 유가족들은 김아무개 중위와 조아무개 상병이 사망한 취사장과 식당, 체력단련실에서 발견된 혈흔에 대해 의문을 표시했다.
이 가운데 조 상병이 왼쪽 허벅지와 오른쪽 턱 두 군데 총상을 입고 사망한 취사장에는 정작 실제 혈흔이 묻은 지점이 단 한 곳이고, 그 혈흔이 마치 혈액을 쏟아 부은 것처럼 되어 있었다는 주장은 눈여겨 볼 부분.
만약 사실이라면 조 상병이 취사장에서 총격을 받은 것이 아니라 체력단련실 등 다른 곳에서 총격을 받은 뒤 취사장으로 이동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또한 이런 가정 아래에서는 체력단련실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김아무개 대위와 조 상병이 사고 직전 함께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된다. 상황에 따라서는 군 당국이 발표한 사고 당시의 장병들 위치에 대한 수사 결과가 통째로 뒤바뀔 수도 있는 대목이다.
유가족들은 군 당국이 실제 사고 현장에 식당, 체력단련실의 혈흔 자국 등을 표시하지 않았다면서 이는 군이 이 같은 의혹을 감추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냐는 주장을 펴고 있다.
총격과 수류탄 투척이 진행된 순서에도 이의가 제기됐다. 군 당국은 김 일병이 내무반에 수류탄을 투척한 뒤 복도와 상황실에서 총을 난사했고, 뒤이어 다시 내무반에서 사격을 한 것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행동 반경이나 시간의 흐름으로 볼 때 복도 총격, 뒤이어 짧은 간격으로 내무반 수류탄 투척과 내무반 총격으로 이어지는 순서가 자연스럽다는 게 유가족들의 주장이다.
현장에서 발견된 증거물에 대해서도 미심쩍다는 입장. 군은 김 일병 체포 후 김 일병 주머니에서 수류탄 안전 고리 1개와 실탄 1발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유족들은 현장 검증과 생존자 진술을 통해 사고 직후 내무반에서 안전 고리 1개가 추가로 발견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김 일병이 자백 후 스스로 증거물을 꺼내 줬다는 수사 결과도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라고 지적했다.
내무반 총격이 연발이었다는 군 발표도 유가족들이 고개를 젓는 부분. 내무반 시신의 총상과 체력 단련장, 취사장의 총탄 흔적은 연발이 아닌 단발이었다는 주장이다. 당연히 “내무반 난사 직후 김 일병이 고가초소에서 연발을 단발로 조정했다”는 군 발표는 앞뒤가 맞지 않는 수사 결과라는 게 유가족들의 판단이다.
유가족들이 갖고 있는 의문의 최정점은 과연 김 일병이 단독으로 무려 10명의 사상자를 낸 끔찍한 사고를 저지를 능력이 있느냐는 점이다. 이 같은 시각은 범인 수가 1인이 아니라 최소 2인 이상이라는 주장과도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진위 여부를 떠나 상당한 후폭풍을 몰고올 수 있는 민감한 문제인 것이다.
유가족 대표인 조두하씨(조 상병의 부친)는 “일단 내무반과 상황실 총격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진행된 것이 혼자의 힘으로 가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며 “군이 처음 범행 시간을 7~8분이라고 발표했다가 2~3분으로 변경했는데, 그 짧은 시간에 상황실, 내무반, 취사장을 혼자 완벽하게 장악한다는 스토리는 전혀 ‘알리바이’가 맞지 않는 수사 결과”라고 주장했다.
조 대표는 2차 재판 직후 김 일병과의 면담에서 김 일병이 “군 생활 기간 동안 단 두 번밖에 총을 쏘지 않았다”고 털어 놓았다면서, 김 일병의 이 같은 진술이 범인의 수나 혹은 또 다른 범인 가담 여부를 추정하는 데 주요한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격 경험이 거의 전무한 김 일병이 짧은 시간에 8명의 장병을 사살하고, 태연히 자신의 근무지로 이동해 근무를 섰다는 수사 발표를 과연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 유가족들의 반문. 고도의 특수 훈련을 받은 전문가가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게 유가족들의 일차적인 판단이다.
결과적으로 김 일병이 주범이 아닐 수도 있다는 극단적인 스토리까지 유가족들 사이에서 거론되고 있다는 것은 한번쯤 되새겨봐야 할 대목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 총기 난동 사건의 수사 결과에 대한 불신이 그만큼 깊고 넓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 대표는 조만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현재까지의 사건 진행 상황과 관련 자료를 공개하며 공식적으로 의문을 제기하겠다는 계획을 전했다. 이에 따라 총기 난사 사건을 둘러싼 논란이 또 한 차례 소용돌이를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사건이 벌어진 지 이미 석 달이 지났지만 유가족들에게 ‘연천사건’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