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해 3월 한 여대생의 피살체가 산중에서 발견되면서 시작된 이 사건은 해외 도피를 했던 살인용의자들이 1년여 만에 경찰에 검거돼 대기업 회장부인의 청부살인 사실을 고백함으로써 일단락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세 차례의 재판을 거치면서 치열한 진실공방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사건의 뒤안길에 가려져 있던 충격적인 사실들이 하나둘씩 드러났습니다.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은 얼마나 될까요? 사건에는 아직도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편집자 주-
재판은 계속됐다. 회장부인은 여대생 살인청부를 부인했다. 차 안에서 은밀히 둘만 얘기해서 증거도 없었다. 돈도 살인자금이 아니라 조카인 김용국을 도와준 돈이라고 했다. 미행하다가 실수로 여대생을 죽이고는 회장부인을 물고 늘어진 상황으로 변하고 있었다.
“남편의 외도가 살해의 동기라는 검찰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죠?”
회장부인 공판담당인 민 변호사가 물었다.
“남편의 외도 사실이 없었습니다. 가정에 대한 사랑이 돈독한 사업가이십니다.”
“사건이 터진 직후 김용국이 찾아와서 협박한 적이 있지요?”
“네, 애들이 실수해서 사고가 났지만 고모가 미행시킨 거니까 돈을 달라고 협박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재판에서 불리할 거라면서.”
“그래서 돈을 주셨습니까?”
“경황이 없는 상태에서 집에 보관하던 현찰을 주었는데 액수도 기억이 안 나네요.”
“이상한 전화가 오고 나서 확인하기 위해 미행은 시켰지만 죽은 정혜경과는 어떤 감정도 원한도 없는 사이시죠?”
“그렇습니다. 사돈집 처녀 됩니다.”
“옆에 있는 조카 김용국은 어려서부터 어땠습니까?”
“학교 때부터 운동도 하고 좀 껄렁껄렁했어요.”
“고모가 누구를 죽이라고 할 때 말을 들을 사람인가요?”
“상식적으로 그런 살해 지시를 할 고모도 없고, 그걸 들을 조카가 있겠어요? 있다면 미친 사람이죠.”
“이 사건으로 집안이 어떤 피해를 입었나요?”
“제가 딸한테는 평생 죄인이 됐습니다. 엄마가 구속돼 있는 걸 알면 그 시부모나 남편의 얼굴을 어떻게 보겠어요? 우리 딸 정말 순수합니다.”
그녀의 하소연은 계속됐다.
“정혜경양 아버지가 저를 고소했었어요. 검찰청에서 조사를 받을 때 혜경이를 만났는데 우리 사위가 사귀는 여자는 자기가 아니고 ‘박미리’라는 거예요. 또 정혜경양 아버지가 쓴 접근금지가처분신청서의 내용을 보면 우리 사위와 그 박미리라는 여자와의 관계를 어떻게나 리얼하게 써놨는지 얼굴까지 붉어지더라고요. 어찌나 거짓말을 잘하는지 신청서가 아니라 3류 소설을 써 놨어요.”
“이 사건에 대해 소감이 어떠십니까?”
“친조카인 김용국이 친고모인 제가 범행을 사주했다고 책임전가를 하는 것에 대해 분노와 허탈감을 느낍니다.”
진짜 같아 보였다. 다음은 김용국의 변호사인 내 차례였다.
“김용국 피고인! 지금 회장부인이자 고모인 김귀숙(가명) 피고인이 하는 말씀을 옆에서 잘 들었죠?”
“그렇습니다.”
그가 푹 숙였던 고개를 들면서 대답했다. 검은 뿔테 안경 뒤로 보이는 작은 눈이 내 눈치를 살폈다.
“이 살인 사건에 대해 피고인이 진정으로 속죄하는 방법은 뭐라고 생각합니까?”
“있었던 사실을 그대로 말하는 겁니다.”
그때 내 시선이 방청석 끝에 혼자 앉아 있는 죽은 혜경의 아버지 정의택씨에게로 갔다. 초췌한 모습이었다.
“지금 방청석 뒤에 죽은 여대생의 아버지 정의택씨가 계시는데 어떻게 하는 게 그에 대한 바른 태도라고 생각하시죠?”
“진실하게 얘기하고 법대로 처벌받겠습니다.”
정의택씨는 그가 딸을 죽였어도 진실하면 용서하겠다고 했었다.
“평소 옆에 있는 김귀숙 피고인을 어떻게 생각했었죠?”
“재산도 많고 자식들 학벌도 좋고 판사가 사위라 우리 집안의 중심인물로 모시는 고모님이셨습니다. 부모같이 존경하고 항상 우러러보면서 순종했습니다.”
“지금은 어떤가요?”
내가 물었다. 실망하고 분노해야 했다.
“현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속으로 놀랐다. 그때 옆에 있던 회장부인이 독 오른 얼굴로 고개를 돌려 “그래서 이렇게 하는 거니?”라며 내쏘았다. 김용국이 주눅이 든 채 고개를 푹 숙였다.
“15년 전 결혼식 때 고모가 왔었어요?”
“그때 바쁘셔서 오지 않으셨습니다.”
조카 결혼식에도 오지 않았다면 정이 흐르는 사이는 아니다.
“미행이나 살인에 관여하기 전에 15년간 고모님으로부터 금전적 도움을 받은 사실이 있어요?”
“전혀 그런 적 없습니다.”
“옆에 있는 고모님은 준 돈이 살인자금이 아니라 김용국씨 집을 사는 데 도와준 것이라고 하는데 누구 말이 맞나요?”
“단 한 푼도 도움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집 사는 데 돈을 도와줄 고모님이 아닙니다. 말도 안 되죠.”
주눅 들었던 그가 애써 반항하는 어조였다.
“김용국씨는 누가 돈을 대서 1심 변호사를 선임해 줬죠?”
사무실을 찾아온 그의 처는 회장부인이 댔다고 했다.
“모릅니다.”
김용국이 갑자기 또 말을 흐렸다. 그는 분명치 않았다.
“고모로부터 여대생 정혜경을 없애줄 사람을 찾아보라는 지시를 받은 건 분명합니까? 옆에 있는 고모는 절대 그런 사실이 없다고 하는데.”
나는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의 표정을 보았다. 회장부인인 김귀숙이 순간 고개를 돌려 김용국을 노려보았다. 김용국이 그 눈길을 외면하면서 대답했다.
“전 분명히 그런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왜 낯도 모르는 여자에게 그런 일을 하겠어요?”
그의 옆에서 마기룡이 뭔가 심각하게 저울질하는 표정이었다.
“옆의 마기룡은 돈이 아니면 그 여대생을 해칠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이죠?”
순수한 살인청부라는 의미였다.
“그렇습니다.”
“중국에서 잡혀와 검찰청에서 조사를 받을 때 복도에서 친척을 만난 적이 있죠?”
“…!”
순간 김용국이 또 당황했다. 내게 말했어도 공개하기 싫은 것이다. 그러나 그걸 숨기면 진실이 아니었다. 재판장과 방청석의 눈길이 모두 그에게 쏠렸다.
“왜 대답을 하지 않죠?”
“그, 그런 적이 있습니다.”
그는 말을 더듬으면서 완연히 흔들렸다. 옆에 있던 회장부인이 핏빛 눈길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떻게 했는데요?”
내가 물었다.
“손을 뒤집어 보였어요. 그건 고모의 진술에 맞추어 주라는 사인이었어요.”
갑자기 회장부인의 악쓰는 소리가 법정 안에 울려 퍼졌다.
“재판장님! 이게 고모를 존경한다는 놈이 하는 소립니까?”
그녀는 거의 발광 직전까지 이르렀다.
잠시 후 여대생을 사살한 마기룡의 국선변호인 권성희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갈색 정장에 옅은 화장을 하고 있었다.
“피고인 마기룡은 어떻게 용의자가 되어 추적을 받았죠?”
권 변호사가 묻기 시작했다.
“죽은 혜경양의 아버지에게 주었던 명함이 단서가 돼서….”
동정을 구하는 듯한 낮고 힘 빠진 목소리였다.
“살인청부를 받은 대상인 여대생이 어떤 사람이었어요?”
“회장집 사위 김 판사가 과외지도를 했던 여학생인데 한때 둘이서 연애를 했다가 김 판사가 고시에 합격하고 부잣집에 장가를 들자 원한을 품고 김 판사의 가정을 깨고 자기와 다시 결혼하려고 하는 나쁜 여자라고 김용국이가 말했었습니다.”
“정말 그런 여자였나요?”
권 변호사가 물었다.
“죽이고 나서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까 김 판사와 정혜경은 이종사촌간이라 연애할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그걸 알았더라면 당장 혐의가 올 이 사건을 맡지 않았을 겁니다.”
“정말 살인을 청부받은 겁니까?”
“처음에는 농담으로 받아들였고 얼마나 돈을 주면 되느냐고 묻는 바람에 진담이 돼 버리고 말았습니다. 무심코 2억원을 불러봤는데 계약이 성사되는 바람에 현실이 됐습니다.”
“돈을 받은 이후의 상황에 대해 설명해 주시죠.”
“사실 착수금을 받은 그날부터 거의 개인시간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24시간 스탠바이 상태에서 새벽이고 밤이고 주말이고 김용국의 지시에 따라 미행하라면 하고 누구에게 린치를 가하라면 즉각 그걸 이행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습니다. 시간은 흐르고 성과는 없자 김용국은 매일같이 고모인 회장부인에게 야단맞는 눈치였습니다. 받은 돈을 다 써버려 그만두지도 못하고 정말 괴로웠습니다. 한번은 연락을 끊고 도망을 했는데 용국이가 휴대폰 메시지로 ‘네가 안 나타나면 어르신이 칠성파를 동원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인다’고 했어요.”
“어르신이라는 사람이 누구죠?”
권 변호사가 물었다.
“김용국이는 고모인 회장부인을 어르신이라고 했어요. 회장부인에게 여섯 달 동안 지독히 시달려서 납치하자마자 30분 만에 바로 죽여 버렸습니다.”
“살인 후 심정이 어땠어요?”
“이런 소리 하는 거 어떤가 모르겠는데 도망을 다닐 때 하루 밤에는 꿈에 제가 죽인 정혜경이 나타났습니다. 열 살 정도 소녀의 모습으로 드레스를 입고 춥다고 하면서 저를 따라 왔어요. 언제나 불안하고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1심에서 변호사가 있었어요?”
“회장부인이 보내준 사선변호사가 있었는데 뭐라고 부탁 말을 하기에 내가 거절했습니다.”
사채시장에서 활동하던 살인범 마기룡 역시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재판은 사기극일 수 있었다. 변호사들은 출연료를 받은 조역배우로 전락할 위험성도 많았다. 거액이 오가면 아예 총연출을 맡기도 했다. 그들간 재타협이 이루어지면 나와 국선 변호사는 퇴장할 운명이었다.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