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고모와 말맞출 것을…”
이런 가운데 류 회장의 전 부인 윤 아무개 씨 이름도 자주 거론되고 있다. 윤 씨가 지난 2002년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여대생 공기총 살해 사건의 주범으로 무기징역이 선고돼 현재 복역중이라는 사실이 각종 보도에서 짤막하게 언급됐던 것이다.
그러나 류 회장의 문제를 떠나 때마침 윤 씨가 직접 살해 과정에 가담한 조카 등을 위증 혐의로 고소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또다시 관심을 끌고 있다. 더구나 윤 씨로부터 살해 지시를 받은 것으로 진술했던 조카 등이 윤 씨의 고소로 다시 조사를 받아야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기존 입장을 뒤바꿔 고모인 윤 씨를 두둔하고 나선 것으로 알려져 검찰 수사 결과 여하에 따라서 일대 파란이 예고될 수도 있다.
앞서 부인 윤 씨는 이미 수사 초부터 강력하게 살해교사 혐의를 부인했으나 대법원 상고심에서 하 양 살해를 지시한 사실이 인정된 바 있다. 그러나 조카는 물론, 조카의 부탁을 받고 하 양을 직접 살해한 친구 김 아무개 씨도 회장 부인의 살인교사 사실을 검찰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순순히 시인한 바 있다.
이처럼 재판 과정에서 살해 교사 사실에 대해 입장이 크게 달라 얼굴을 붉혔던 세 사람이 갑자기 똑같은 입장을 취하고 나선 까닭은 무엇일까. 조카를 고소한 부인 윤 씨는 그렇다 치더라도 본의 아니게 피고소인이 된 두 사람은 고소를 당하면서도 갑자기 진술을 바꿨다. 그것도 다름 아닌 위증 혐의다. 진실게임이 다시 재연될 판이다.
이 사건은 발생 당시부터 세간의 큰 관심을 모았다. 명문 대학을 다니는 평범한 여대생 하 아무개 양이 조용한 산으로 납치돼 공기총 여섯 발을 맞고 살해된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격적이었다. 더구나 사건 수사가 진행되면서 용의 선상에 오른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닌 하 양의 사촌 오빠인 현직 판사와 판사의 장모였으니 충격은 더욱 컸다.
2년여 간의 진실공방 끝에 지난 2004년 대법원 상고심에서 윤 씨와 조카, 그리고 조카의 친구 등 세 명에게 무기징역 형이 확정되면서 여대생 하양 살해 사건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류 회장의 골프 파문과 시기를 같이해 윤 씨가 공범을 고소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다시 세인들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일요신문> 취재 결과, 윤씨는 지난해 10월 5일 청주지검에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조카와 조카 친구를 위증 혐의로 고소했으나 아직 검찰의 처분이 나지 않은 상태다.
사건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검찰 고위 간부 출신 변호사를 선임하는 등 중량감 있는 변호사들로 변호인을 꾸렸던 윤 씨는 이번에도 검찰 중견 간부 출신으로 검찰 내에서는 이름이 저명한 S 변호사를 선임했다.
우선 사건의 전말을 간단하게 다시 짚어볼 필요가 있다. 하 양이 살해된 것은 지난 2002년 3월 6일 경기도 하남시 검단산에서였다. 당시 하 양은 안면에 공기총 여섯 발을 맞고 숨졌으며 사망한 지 열흘이 지나 싸늘한 사체로 발견됐다.
그 후 1년 6개월 간의 수사 끝에 경찰과 검찰은 부인 윤 씨가 조카 등에게 하 양 살해를 사주한 것으로 보고 세 사람을 기소했다. 법원도 경찰과 검찰의 공소 내용을 모두 인정해 1심에서는 피고인 세 사람에게 징역 20년이 선고됐다. 항소심에서는 형이 높아져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대법원에서도 항소심 판결을 그대로 인용하며 무기징역을 확정했다.
사건의 발단은 부인 윤 씨의 지나친 의심 때문이었던 것으로 재판 결과 확인됐다. 윤 씨는 사위인 K 판사와 그의 이종사촌 동생인 하 양 사이를 부적절한 관계로 오인, 장기간 하 양을 지나칠 정도로 감시했으며 조카와 그 친구에게 하 양을 제거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는 것이다.
검찰 수사와 법원 재판 과정에서 이를 뒷받침할 만한 정황이 사건 관계자들의 진술에 의해 모두 드러났다. 가장 쟁점이었던 부인 윤 씨가 하 양 살해를 지시한 부분 역시 조카 윤 씨와 친구 김 씨의 진술 등에 의해 사실로 밝혀졌고, 법원도 이를 받아들였다.
실제 재판 과정에서 조카 윤 씨는 고모로부터 하 양을 없애줄 사람을 찾아보라는 지시를 받았느냐는 신문에 줄곧 “분명히 그런 지시를 받았다. 내가 왜 낯도 모르는 여자에게 그런 일을 하겠냐”고 진술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 씨 역시 부인 윤 씨가 살인교사를 지시한 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또한 조카 윤 씨는 외국에서 검거돼 한국으로 송치된 이후 검찰에서 조사를 받을 때 검찰청 내에서 친척을 만났는데 그 친척으로부터 고모 윤 씨의 진술에 동조하라는 사인까지 받았다는 진술도 법정에서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던 조카가 왜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일까. 또한 여대생 아버지까지 살해할 의사가 있었다고 운운하며 부인 윤 씨로부터 살해교사를 받은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던 김 씨까지도 윤 씨의 조카와 말을 맞춘 까닭은 무엇일까.
윤 씨 조카의 변호를 맡았던 엄상익 변호사는 앞서 <일요신문>에 기고한 ‘사건과 사람들’을 통해 여대생 하 양 살해 사건의 내막을 공개하면서 이미 윤 씨의 이러한 고소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던 예정된 시나리오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언급한 바 있다. 엄 변호사는 그 근거로 당시 항소심이 끝난 이후 조카의 말을 주목했다. 윤 씨 조카는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을 받은 후 “차라리 고모가 부탁하는 대로 말을 맞출 걸 그랬다”며 후회를 했다는 것이다. 이 말이 어떤 의미일까.
진실게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들이 어떤 새로운 진술과 증언을 내놓을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유재영 기자 elegant@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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