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순형 대표 | ||
선거를 불과 한 달여 앞둔 지난 3월12일 민주당은 설마했던 노 대통령 탄핵안을 한나라당과 함께 통과시켰다. 당시 여론의 70%가 반대하던 탄핵을 민주당은,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당시 민주당을 이끌었던 조순형 대표는 왜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을까. 정치권뿐 아니라 국민들 사이에서도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다.
조 대표를 비롯한 민주당의 탄핵 주도 세력들은 ‘정치적 소신’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누구라도 쉽게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상황에서 수십년간 정치를 해온 조 대표가 단지 정치적 소신 때문에 ‘죽는 길’을 선택했다고 보긴 어렵다. 20년 넘게 정치를 했고 법무부나 검찰도 그의 송곳 같은 질문에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논리가 탁월하다고 인정하는 그가 상황을 100% 오판했다고 보기에도 뭔가 석연치 않다.
당 일각에선 민주당의 ‘책사’ 역할을 했던 황태연 당 국가전략연구소장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목소리도 있었다. 민주당 한 핵심관계자는 “당시 총선 직전 당 지지도가 바닥을 헤매는 상황에서 황 소장이 제출한 보고서의 내용은 탄핵안을 통과시킬 경우 국민적 지지를 등에 업고 총선 승리는 물론 대선 보궐선거 승리도 가능하다는 게 골자였다”면서 “그러나 탄핵안 처리 이후 상황이 정반대로 흘러갔음에도 그에 대한 대비책은 전혀 없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황 소장이 총선 국면에서 민주당 내 전략 수립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으나 탄핵안 처리 책임을 전적으로 황 소장에게 떠넘기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일각에선 대구 출마를 선언했던 조 의원이 자신의 지역구 선거를 위해 대구의 ‘반노무현 정서’를 노려 무리수를 뒀다는 설까지 나돌기도 했다.
그러나 이같은 외부 요인보다는 당시 당 대표였던 조순형 의원의 노 대통령에 대한 반감과 그의 정치적 야망에서 이유를 찾으려는 시각도 있는 듯하다. 조 의원은 단순히 국회의원 수준을 뛰어넘는 정치적 야망을 갖고 있었다는 게 그를 잘 아는 한 3선 의원의 전언이다.
5선이긴 했지만 늘 비주류였던 그에게 대권에 대한 꿈이 간직돼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인사는 그리 많지 않을 듯싶다. 하지만 조병옥 박사의 아들로서 민주당 대표를 맡기 훨씬 이전에 한때 한겨레민주당 공동대표까지 지냈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그같은 꿈도 그다지 터무니없어 보이진 않는다는 것.
조 대표의 한 지인은 “오랫동안 비주류로 살았지만 ‘미스터 쓴소리’라는 애칭을 얻을 정도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 데다 서울대 법대 출신인 조 대표에게‘대통령이 되지 못할 이유가 뭔가’라고 부추기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고 전했다.
탄핵안 가결을 강행한 배경에는 이같은 정치적 야심과 함께 노 대통령에 대해 조 대표가 갖고 있는 ‘한’(恨)에 가까운 반감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게 일각에서 내놓는 관측이다. 조 대표가 지닌 ‘한’의 뿌리는 세월을 한참 거슬러 올라간다.
▲ 조순형 대표(오른쪽)는 노무현 대통령이 ‘경쟁자’인 김원기 고문(왼쪽)을 중용하자 크게 서운해했다고 한다. 사진은 지난해 12월 청와대 회동 모습. | ||
그 직후에도 조 대표의 노력은 계속됐다. 조 대표는 대선 닷새 뒤인 2002년 12월22일 23명의 의원들이 ‘민주당의 발전적 해체’를 주장할 당시 추미애 의원 등과 함께 맨앞에 서 있었다. 당시 민주당의 발전적 해체 주장은 노 당선자 등 지금의 열린우리당 핵심 인사들의 신당 창당을 위한 ‘전초전’ 격이었다.
그러나 조 대표는 이들 노 대통령 측근을 중심으로 한 신주류들로부터 ‘대접’을 받지 못했다. 결국 신주류의 좌장 역할은 김원기 고문에게 돌아갔다.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열린 2002년 12월26일 신주류 인사 20여 명의 모임. 이 자리에서 신주류 인사들은 자신들의 리더 격인 개혁특위 위원장을 김원기 고문에게 맡긴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2003년 1월7일 열린 개혁특위 워크숍에서 김원기 고문에게 모든 힘이 쏠리는 것을 느낀 조 대표는 그냥 회의장을 빠져나갔다고 한다.
이후 대통령 당선자 신분이었던 노 대통령은 조 대표 등을 안가로 불렀다. 그러나 ‘단독’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함께였다. 이미 노 대통령에게 마음이 상해 있었던 조 대표는 비서실장 등에 천정배 의원 등을 추천했지만 자신이 추천한 인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청와대에 입성한 후에도 노 대통령의 조 대표에 대한 배려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고 한다. ‘경쟁자’인 김원기 고문이 수시로 청와대를 드나들며 대통령과의 관계를 토대로 국무총리, 국회의장 등에 거명되면서 ‘넘버 2’로서 입지를 굳혀가고 있는 상황에서 조 대표는 점차 당내 입지가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민주당의 한 핵심관계자는 “국민적 이미지와 달리 상당한 엘리트 의식을 갖고 있는 조 대표로선 당시 여러 정황상 결심을 되돌리기는 어려웠을 것이다”면서 “탄핵을 주도한 민주당내 일부 의원들도 옆에서 이같은 조 대표의 생각에 부채질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조은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