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8일 박준홍 공군작전사령부 작전안전과장이 F-15K 추락사고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지난 18일 공군이 F-15K 추락사고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제시한 사고 원인은 ‘G-LOC’이었다. G-LOC은 기체의 급격한 가동으로 중력 가속도(G)에 의해 뇌로 혈류가 공급되지 못하여 조종사에게 순간적으로 생기는 의식상실 현상을 말한다. 즉 기체나 엔진 결함도 아니고 조종사 실수도 아닌, 한마디로 그 누구의 잘못도 없는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사고였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 하지만 사고 원인을 정확히 규명할 수 있는, 전투기의 블랙박스에 해당하는 ‘ECSMU’는 끝내 인양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당초 예정보다 보름여 앞당겨 서둘러 발표된 이번 조사 결과에 대해 상당수 군사전문가들은 “사고 의혹이 명확히 풀리지 못했다”는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당초 FX 사업 의혹을 최초 폭로한 장본인이었던 조주형 전 공군 대령은 “G-LOC은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니라 기체결함의 가능성을 얘기하는 것”이라며 “공군에서 스스로 밝혔듯 두 명의 최정예 베테랑 조종사가 동시에 G-LOC에 노출돼 추락했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의혹을 제기했다.
사고 직후 공군은 약 두 달간 기체 잔해 인양 작업을 펼쳤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블랙박스였다. 도입 이전부터 숱한 의혹을 양산해 왔던 F-15K였기에 그 추락 원인을 밝혀줄 블랙박스의 인양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공군은 지난 3일 “블랙박스 인양 작업에는 실패했다”는 실망스런 결과를 발표했다. 또 다른 의혹이 제기되자 “비행기록장치(DVR) 등 지금껏 인양한 잔해를 통해서도 사고 원인을 빠르면 9월 초순경에는 규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해명했다.
기자는 16일과 17일 공군본부 관계자에게 조사 진행 상황을 문의했다. 하지만 이 관계자는 간부급이었음에도 다음날 조사 결과를 발표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국방부가 서둘러 발표한 흔적이 엿보인다. 이에 대해 공군의 고위 관계자는 “결정적 자료인 블랙박스를 인양하는 데 실패했고, DVR 장치 역시 메모리칩이 대부분 파손되어 복구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더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고 밝혔다.
공군이 발표한 이번 사고 원인의 핵심은 한마디로 ‘G-LOC에 의한 불가항력’이었다는 것이다. 즉 사고 당시 두 명의 조종사는 비행고도가 낮아진 상태에서 순간적으로 기체 고도를 높이려다 가중된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동시에 의식상실 상태에 빠져들었다는 것.
공군은 “잔해 확인 결과 항공기 기체 및 엔진에는 아무런 결함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강조했다. 또한 유가족의 반발을 의식해서인지 “조종사의 실수가 있었던 것이냐”라는 질문에도 “절대 조종사의 실수는 아니다. G-LOC은 아주 드문 경우지만 이것이 발생하면 어쩔 수 없다. 불가항력적이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이에 대해 조주형 예비역대령은 “일반 국민들이 혼동할지도 모르겠는데 조종사가 긴장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G-LOC에 그렇게 쉽게 노출되지 않는다”면서 “공군에서 밝힌 대로 당시 사고기의 조종사는 추락 직전 차분한 목소리로 ‘임무중지’를 말했다. 그 직후 갑자기 의식상실에 이를 수 있는 9G 단계까지 기체를 급속히 가동시켰다는 얘긴데 상식적으로 임무수행 중인 상황도 아닌데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 G-LOC은 임무수행 중인 상황에서 급박한 가동시 일시적으로 생길 수 있는 현상이지만 대부분의 정예 조종사들은 모두 9G 상황도 견뎌내는 강도 높은 훈련을 소화해낸 이들”이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조종사가 G-LOC에 노출돼 갑자기 의식을 잃는 시간은 평균 10초 정도라고 한다.
조 예비역대령은 “더군다나 공군에서도 자신 있게 밝혔듯사고기의 두 조종사는 모두 최정예 베테랑급인데 그들이 동시에 G-LOC에 노출되어 10초간 속수무책으로 바다로 추락했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면서 “그것은 조종사가 손을 쓸 수 없을 정도의 중대한 기체결함이 있었다는 것과 같은 얘기”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서는 공군 조종사 출신의 군사평론가 김성전 예비역중령도 비슷한 견해를 밝혔다. 김 예비역중령은 “흔히 추락 사고의 세 가지 원인으로 공중폭발, 비행착각, 의식상실 등을 꼽는데 이 가운데 엔진 결함에 의한 공중폭발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비행착각 역시 두 베테랑 조종사가 동시에 일으켰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결국 의식상실의 경우인데 여기에는 분명한 한 가지 전제 조건이 붙는다”고 밝혔다. 그는 “G 제어장치가 갑자기 작동하지 않는 등의 중대한 기체결함이 있지 않고서는 그런 훈련 상황에서 갑자기 두 명의 조종사가 동시에 G-LOC에 노출될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밝혔다.
김 예비역중령은 “공군은 마치 G-LOC이 기체 문제와는 상관없이 갑자기 일어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며 기체결함이 아니라는 점만 강조하는데 이는 난센스다. 국정조사 등을 통해서라도 명확한 원인을 규명해야 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F-15K의 블랙박스에 해당하는 ECSMU를 인양하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서도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공군은 “다른 기체의 잔해는 대부분 인양했고 블랙박스 케이스까지 인양했지만 그 내용물을 인양하는 데는 결국 실패했다”며 “추락 잔해 지점에 약 50m 정도의 뻘이 있어 수색이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해명했다.
초기에는 블랙박스를 인양해야 정확한 사고 원인을 규명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해 왔던 공군이 블랙박스 인양에 실패했음에도 이번 발표에서 기체 및 엔진 결함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서둘러 단정 지은 점에 대해서도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 공군은 블랙박스 인양 작업을 서둘러 종결한 데 대해 질문이 쏟아지자 “물론 블랙박스를 인양하면 사고 원인이 100% 확실히 나오겠지만 굳이 인양하지 않고 나머지 잔해 조사만으로도 거의 100%에 가까운 사고 원인이 나왔다”고 다소 모호한 해명을 했다.
“F-15K가 음속의 2.5배까지 속도를 낼 수 있기 때문에 항상 G-LOC의 위험성은 도사리고 있다”는 해명도 납득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당초 공군이 숱한 의혹에도 F-15K를 차세대주력기종으로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조종사의 생존율을 높이기 위한 최신식 ‘온 보드 보호 시스템’을 적용하는 등 ‘생존을 위한 설계’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다른 기종보다 안정성과 내구성이 뛰어나다는 점 때문이었다.
또한 순직한 두 명의 조종사 역시 비행시간만 각각 1900시간과 1000시간 이상을 기록했고, 미국 현지에서 1년이 넘는 F-15K 비행교육을 마쳤으며 실핏줄이 터지는 9G까지 도달하는 항공생리교육도 모두 이수한 베테랑들인 것으로 밝혀졌다. 공군의 설명대로라면 완벽한 기체와 최고의 조종사가 만난 ‘황금 궁합’이었으나 그 결과는 어이없는 ‘불가항력적 G-LOC’였다는 것이다.
조 예비역대령은 “공군 발표대로라면 공군 전투기 조종사들은 전투기 성능이나 자신의 능력에 상관없이 항상 G-LOC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살아남을 조종사들이 누가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