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문에 각종 비자금 관련 사건에서 가방이 돈 거래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물증으로 부각된 경우가 적지 않다. 가방의 종류는 물론 가방에 담을 수 있는 돈의 액수, 더 나아가 피의자의 체력으로 가방을 들 수 있는 지의 여부를 놓고 검찰과 변호인 측이 수개월 넘도록 맞서는 경우도 있었다.
지난 9월 18일 서울중앙지법의 한 법정에서도 가방 때문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현대자동차 채무탕감 로비 사건을 심리 중인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1부(재판장 이종석)가 돈 전달 가능성을 검증해보기 위해 이색 시연을 했기 때문이다.
그간 공판에서는 현대차 로비를 맡아 전직 재경제부 고위 관료 및 은행 관계자에게 돈다발이 담긴 가방을 전달했다는 회계법인 대표의 진술 신빙성을 놓고 검찰과 변호인 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됐다. 특히 가방의 형태와 크기 등을 놓고 양측의 입장 차가 첨예하게 엇갈렸는데 이날은 급기야 여러 가방을 이용한 돈 전달 과정 시연까지 열렸다.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검찰과 변호인 측은 각자 유명 가방 제조업체인 S사 서류가방(일명 007가방)에서부터 흔히 ‘보스턴백’이라고 불리는 여행용 가방과 ‘더플백’까지 가져왔고 재판부는 실제 돈을 가방에 담아보고 무게까지 측정하기도 했다.
이처럼 과거 비자금 사건에서도 가방 때문에 수사나 재판 과정이 혼란스러웠던 사례도 꽤 많다. 가방이 중요한 단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검찰이 비자금 가방을 아예 공개하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돈을 전달했다는 관계자가 비자금 전달할 때의 가방과 비슷한 제품을 직접 들고 재판에 나온 적도 있다. 또 가방에 숨겨져 있는 웃지 못할 비화가 피고인 신문 과정에서 우연히 공개되는 경우도 있었다.
지난 93년 전국을 강타했던 슬롯머신 사건 재판 때도 가방 때문에 난리가 났다. 특히 슬롯머신업계 대부로 불리던 정덕진, 덕일 씨 형제로부터 세무 감사를 무마해달라는 명목으로 6억 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 기소된 당시 국민당 박철언 의원에 대한 재판 과정에서 ‘007가방으로 5억 원을 전달했다’는 정덕일 씨 진술의 진위 가 뜨거운 쟁점으로 부각됐었다.
재판 때마다 양측은 가방을 놓고 대접전을 벌였고 급기야 덕일 씨는 3차 공판에서 자신이 직접 전달했다는 가방과 비슷한 밤색 007가방을 법정에 들고 출석했다. 정 씨는 이 가방에 헌 수표 10만 원권 묶음 3억 원, 100만 원권 수표 묶음 1억 9000만 원과 현금 1000만 원 등 5억 원을 담았다고 진술한 반면 변호인 측은 “10만 원권 헌 수표로는 007가방에 그 액수를 다 담을 수 없다”고 반박한 뒤 다음 공판에서 “평창동 집에서 007가방을 들고 나온 적이 없다”는 박 의원의 운전기사를 증인으로 내세워 반격을 가했다.
결국 법원은 007가방이 박 의원에게 넘어갔다는 검찰 공소 사실을 인정했고 박 의원은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됐다.
지난 95년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 재판 때도 가방이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비자금을 받은 가방은 아니었으나 노 전 대통령이 비자금 장부와 도장을 007가방에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이 재판 과정에서 알려져 화제를 모았다. 특히 이 007가방의 비밀번호가 노 대통령의 6·29선언에서 따온 ‘629’라는 사실까지 공개됐다.
한나라당이 국세청을 동원, 대선자금을 불법적으로 모은 이른바 ‘세풍’ 사건 수사 때는 검찰이 이례적으로 자금 운반 때 쓰인 자주색 여행용 가방을 공개하기도 했다.
가방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검찰은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동생인 이희성 씨 관련 수사 기록에 이 씨가 삼성 측으로부터 받은 007가방의 두께가 15cm라는 사실까지 기재하는 ‘세심함’을 보이기도 했다.
경기은행 퇴출 로비 사건으로 임창열 전 경기지사와 부인 주혜란 씨가 구속됐을 때도 비자금이 오갔던 가방이 무엇이냐를 놓고 말들이 많았다.
특히 부인 주 씨가 구속된 직후에는 검찰이 주 씨가 받은 비자금 가방에 대해 보도한 일부 언론의 기사를 정정하는 일도 벌어졌다. 당시 언론들은 검찰에서 흘러나온 말을 인용, 주 씨가 전 경기은행장으로부터 1만 원권이 든 골프 옷가방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 박철언 전 의원(왼쪽)과 정태수 전 한보 회장 | ||
결국 보름여 후 수사 결과를 발표한 검찰은 주 씨가 007가방으로 신권 현금 1억 원을, 그리고 스포츠 가방 두 개에 담긴 3억 원을 받았다며 가방 논쟁을 종식시켰다.
소득 없이 의혹만 무성했던 지난 2002년 ‘이용호 게이트’ 특검 수사 당시에는 가방 때문에 검찰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적도 있다. 당시 특검팀이 이 씨가 2001년 서울지검 특수2부에 횡령 혐의로 긴급체포됐다 풀려난 직후 곧바로 현금으로 1억 원씩을 인출해 골프 가방에 담아 골프장에 자주 다녔다는 이 씨 회사 경리 직원의 진술을 확보한 것.
느닷없이 골프 가방 얘기가 나오면서 이 씨가 검찰 수사를 피하는 대가로 법조 고위 인사에게 로비 자금 명목의 돈을 전달했을 가능성이 제기돼 검찰이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지난 97년 한보철강 특혜 비리 사건이 터졌을 때는 정태수 회장이 금융 실명제를 의식, 비자금을 모두 현금으로 인출해 놓고 액수에 따라 가방 종류를 선택했다는 이색 수사 결과를 검찰이 발표했다. 정 회장이 5000만 원 이하는 007가방에, 5000만 원에서 1억 원 사이의 금액은 골프가방에 넣어 로비자금을 전달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었다.
유재영 기자 elegan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