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양은(왼쪽), 김태촌 | ||
한때 밤의 권력을 손에 쥐었던 조직의 보스들은 이제 환갑을 넘겼거나 목전에 둔 상태에서 ‘이제 더 이상 조직은 없음’을 항변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결론적으로 이들 중 상당수는 ‘추억의 조폭’이 아니었다. 여전히 살아 있는 밤의 권력자였다. 호남의 주먹 출신 원로 이 아무개 씨는 “아직도 밤의 유흥가 세계에서는 김태촌이니, 조양은이니 하는 이름이 먹힌다. 지방은 더하다. 보스들이 아무리 조직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쳐도 밑에서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보스의 이름을 팔고 다닐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일요신문>이 최근 사행성게임 산업과 조폭과의 연관관계를 수사한 서울중앙지검을 비롯한 전국의 검찰과 경찰의 수사 자료와 각 경찰청에서 확보하고 있는 조폭 세력 동향 자료를 입수해서 분석한 결과, 80년대를 풍미했던 왕년의 주먹들이 최근의 사행성게임 산업에 대부분 재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오늘날 사행성게임 산업은 한때 숨죽였던 과거 ‘추억의 조폭’들을 다시 무대 전면으로 등장시키는 역할을 한 셈이다. 한마디로 2006년은 조폭 르네상스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을 쏘아올린 해인지도 모른다.
서울중앙지검의 한 관계자는 지난 8월 말 “3대 패밀리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한 유명 폭력조직의 활동이 최근 부쩍 늘어난 점을 포착했다”고 언급했다. 검찰과 경찰이 유명 조폭의 수사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조폭세계의 상징적 인물인 B 파의 보스 출신 K 씨에 대한 의혹이 집중 제기됐다. 하지만 검찰의 표정은 내내 어두웠다. 지난 9월 중순에는 “조폭 관계자들이 약속이나 한 듯 모두 연락 두절이다. 일단 이 수사 기간만 피하고 보자는 심산인 것 같다”고 수사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9월 29일 사행성 게임기를 제작해 판매한 혐의로 ‘양은이파’의 행동대장이었던 장 아무개 씨(45)를 구속하면서 검찰은 아연 활기를 띠고 있다. 수사를 총지휘하고 있는 이인규 3차장도 “장 씨는 본인의 혐의 부인 여부와 상관없이 양은이파에 깊숙이 개입된 인물로 밝혀졌으며, 이는 양은이파도 사행성 게임기에 개입했다는 최초의 발견”이라고 밝혔다. 검찰 측은 “양은이파 등 과거 유명 조폭의 전통이 여전히 이어져오고 있음이 밝혀졌다”며 “양은이파 보스였던 조양은 씨의 연루 혐의는 현재까지 드러나지 않고 있으나 두 사람의 관계를 감안할 때 가능성을 갖고 수사 중”이라고 밝혔다.
검·경은 그 방계 조직이 가장 폭넓은 것으로 평가되는 범서방파를 계속 예의주시하고 있는 분위기다. 6월 이 조직의 부두목 이 아무개 씨(47)가 ‘바다이야기’ 업주를 폭행해 오락실을 빼앗은 혐의로 구속됐다. 또 8월에는 행동대원 백 아무개 씨(32)가 성인 PC방을 운영하다 적발됐다.
이 조직은 국정원의 보고서에도 ‘태촌파’로 언급된 채 소개되고 있다. ‘칠성파, 영광파, 태촌파 등 이른바 전국구 조폭이 성인게임장과 경품용 상품권 유통시장의 7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는 내용이 그것. 또 이 조직의 부두목 오 아무개 씨가 하루 평균 매출 1억~5억 원의 불법 카지노바 2곳을 운영하면서 경품용 상품권 발행업체에 투자해 막대한 수익을 얻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검·경 역시 현재까지는 거물급 인사인 김 씨와 조 씨와 관련해서 매우 조심스런 입장을 밝히고 있다. 서울지검의 한 관계자는 “범서방파 조직원이라는 자들의 사행성산업과 관련된 혐의가 속속 드러나고 있지만 아직은 이를 김 씨와 직접 연관짓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조 씨는 당초 서울 역삼동에 음식점을 운영했으나 최근 폐업했고, 이 자리에 성인 PC방이 들어선 것으로 밝혀졌다. 서울지방경찰청의 한 관계자는 “외형상 조 씨와 PC방 업주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언급했다.
‘OB파’는 과거 보스였던 이동재 씨가 해외로 떠난 이후 부두목 김 아무개 씨 등에 의해 조직이 유지됐으나 최근 간부급들의 구속이 이어지면서 방계 조직이 난립하는 등 다소 어수선해진 상태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검·경은 ‘신OB동재파’가 지난 98년경 OB파 부두목 김 아무개 씨와 서방파 출신 유 아무개 씨에 의해 재건되면서 OB파를 계승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김 씨가 구속되면서 이 조직의 실질적 두목이 된 유 씨는 지난 9월 23일 서울 수서경찰서에 의해 구속됐다. 강남에 무허가 카지노를 차려 도박장을 개장하고 도박 빚이 있는 피해자를 공갈 협박한 혐의다. 경찰은 ‘신OB동재파’의 경우 성인오락실보다는 불법 카지노바 영업에 더 치중해서 조직의 자금을 운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사실상 서울의 사행성산업 시장을 먼저 선점한 것은 종로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영광파’였다. ‘3대 패밀리’ 조직도 이 부분에서는 후발주자였던 셈이다. 영광파는 국정원 보고서에도 이름이 등장하고 있는데 일찍부터 스크린 경마장 등에 눈독을 들여 이 분야의 노하우를 터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광파는 상품권 발행업체에도 직접 투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난 2000년 12월에는 두목 이 아무개 씨가 사행성 오락실을 운영하면서 부당이득을 챙긴 혐의로, 2002년 4월에는 행동대장 김 아무개 씨가 불법 성인오락실을 운영한 혐의로 서울지검에 구속된 전력도 있다.
서울 미아리를 중심으로 암약해온 상택이파는 게임기 ‘황금성’과 관련한 의혹이 제기돼 검찰의 강도 높은 내사를 받아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중앙파’ 역시 영등포의 게임장 일대를 장악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이 조직들은 <일요신문>이 입수한 서울경찰청의 ‘조폭범죄지도’에 동향 감시 대상 리스트에 올라 있는 25개파 392명에 모두 포함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로서는 유명 조폭 세력들의 리스트를 작성해 놓고도 그동안 이들의 사행성산업 범죄를 놓치고 있었던 셈이다.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