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사모님. 목사님 계세요?”
옆에 있던 장영목이 인사했다.
“목사님은 지금 계세요. 그런데 어떻게 하나? 난 지금 구역예배 가는 길인데 미리 연락이나 하고 오시지.”
목사 부인은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아니, 그냥 지나가다 들러봤어요.”
장영목이 말하면서 목사관 입구의 새시 문 안으로 들어갔다. 60대 말쯤의 노목사가 거실의 비닐소파에 앉아 있었다. 노목사는 우리를 보더니 부엌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에 토마토 주스 병 두 개를 들고 나와 소파 앞 탁자 위에 놓았다.
“어제 신도가 가지고 온 건데 들어 보세요.”
나는 순간 죽은 하 영감과 노목사가 묘한 비교가 됐다. 둘 다 외진 곳에서 외롭게 사는 노인이었다. 가까운 거리의 이웃이기도 했다. 또 두 사람 다 문명을 멀리하고 시골의 산속에서 오랫동안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이런 산속에 노부부만 사시면 무섭지 않습니까?”
내가 노목사에게 물었다.
“처음에는 밤이 되면 캄캄하고 무서웠어요. 숲속의 이 교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죠. 그런데 오래 살다 보니까 괜찮아졌어요. 이곳 마을 사람들도 순박하고 저 같은 목사야 가라고 하면 가서 전도하는 직업이니까.”
목사는 변호사인 내가 왜 왔는지 대충 짐작하는 눈치였다.
“죽은 하 영감님을 전도하시지 그랬어요?”
내가 물었다.
“그 영감님은 아주 폐쇄적인 분이었어요. 먼빛으로 그냥 몇 번 봤죠.”
노목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돌아가신 하 영감님이 어떻게 마을 사람들과 사귀지도 않고 그렇게 오래 혼자 살 수 있었죠?”
내가 말했다.
“여기는 6킬로미터를 가야 약간의 문화시설이 있을까 하는 그런 지역이에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도 20년간 집에서 거의 나오지 않고 하 영감님이 살았다는 게 대단한 일이죠.”
노목사의 말이었다. 노목사에게는 종교가 있었다. 마을에 신도들도 있었다. 그렇다면 죽은 하영감은 어떻게 살았을까.
“장영두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내가 노목사를 만난 목적이었다. 노목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신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도 목사 생활을 오래하면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봤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은 있는데 인격이 안 돼 있어요. 또 어떤 사람은 반대로 인격은 형성돼 있는데 신앙이 없는 사람도 있고요. 어떤 사람은 급하고 폭력적이고… 하여튼 수많은 사람들을 봐 왔죠. 장영두는 그렇지 않았어요. 난 목사로서 양심을 걸고 말하는데 장영두가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는지는 모르지만 절대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목사가 지난 5년 동안 어떤 걸 시켜도 장영두는 단 한 번도 다른 일 때문에 바쁘다거나 못하겠다라고 거절을 한 적이 없어요. 그런 성격이죠.
장영두는 일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어요. 한번은 칼바람이 부는 1월에 얼어붙은 배나무 밭 옆을 지나다가 장영두를 봤죠. 눈만 나오는 털모자를 쓰고 가지치기를 하고 있더라고요.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품꾼을 안 쓰고 겨울에 직접 일하는 거죠. 내가 음료수 한 병을 가지고 그 옆으로 가서 ‘좀 쉬었다가 하게’하고 위로를 해 준 적이 있었죠.”
장영두는 수사기록상으로는 2억 원을 받고 사람을 죽인 잔인한 청부살인범이었다. 그러나 목사의 입에서 나오는 그의 모습은 천사였다. 인간은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절대적으로 구별되어 있지 않았다. 누구나 양면성을 가지고 있었다. 노목사가 계속했다.
“제가 장영두에게 면회를 갔었습니다. 그리고 너는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했죠. 그렇지만 만약 죄를 졌다면 그 죗값을 꼭 치러야 된다고 말을 해 줬어요.”
어느새 내리던 빗방울이 그치고 햇빛이 비쳤다. 작은 격자창을 통해 내다 보이는 교회 마당은 따뜻한 느낌이었다.
“장영두가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집으로 가 봅시다.”
교회를 빠져나오는 차 안에서 나는 장영목에게 말했다. 장영두의 환경을 알고 싶었다. 살인범 집의 분위기 속에서 뭔가 배경을 자연스럽게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차는 인근의 구불구불한 농로를 따라 한참을 가다가 비포장길로 들어섰다. 야산 자락에서 혼자 소를 키우던 사람의 축사 자리가 장영두가 부모와 함께 살던 집이었다.
“아버지는 평택에 나가 아파트 경비원을 하시고 어머니는 청소를 하세요. 비번이라야 집에 오시는데 계실지 모르겠네.”
장영목이 혼잣말처럼 하면서 중얼거렸다. 어느새 차가 음습한 산 자락의 빈 축사 앞에 도착했다. 축축한 기슭의 흙들이 금세 뭉그러져 내려올 것 같았다. 쇠파이프로 대충 기둥을 세운 위에 천막을 덮은 가건물이었다. 녹슨 기계들이 구석에 보였다. 장영두가 배농사를 지을 때 쓰던 기계 같았다.
“이 축사 뒷집이 영두가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집입니다. 그나마 농협의 대출을 얻어 산 집이에요. 예전에는 소를 키우던 사람이 혼자 살던 집이죠.”
“아버지!”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무표정한 얼굴의 남자가 나왔다. 이마에 굵게 골 깊은 주름이 보였다. 내가 들어선 그 집 마루는 냉기 속에서 곰팡이 냄새가 감돌았다. 더께가 앉은 오래된 리놀륨 바닥 구석에 붉은색 비닐의 싸구려 소파가 붙어 있었다. 삼사십년 전 건축자재로 쓰던 니스 칠한 베니어판이 천정과 벽에 붙어 있었다. 시간이 정지된 궁색한 집이었다.
“변호사님을 좋은 일로 봬야 할 텐데 이렇게 뵈어서 미안하구만요. 전 어려서부터 여태껏 농사만 지어 왔죠.”
장영두 아버지가 간신히 꺼낸 말이었다.
“장영두가 빚이 많았습니까?”
내가 물었다. 장영두의 아버지는 말없이 구석으로 기어가더니 문갑 서랍을 뒤적였다. 잠시 후 내 앞에 대출금 독촉장들이 수북이 쌓였다. 돈을 갚지 않으면 그 집마저 압류하고 경매하겠다는 협박성 내용들이었다. 장영두가 청부살인이나 강도라도 할 이유들은 충분했다. 빚에 꽁꽁 묶여 움치고 뛸 수 없는 가난을 나는 직접 목격했다. 평택 시내로 청소를 나간 부인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장영목이 운전하는 차는 서울 쪽으로 방향을 돌려 고속도로로 올라오고 있었다. 벌써 해가 설핏 저물고 있었다. 들녘의 푸른 벼들이 바람에 물결치고 있었다.
“이왕 하루를 내 주셨는데 제가 일하는 교회에 한번 들러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장영목이 내 눈치를 보면서 조용히 물었다. 형인 그 자신의 삶도 한번 살펴보라는 뜻이었다. 그는 개척교회 목사라고 했다.
“그러시죠. 어떻게 목사가 되셨는지 얘기해 줄래요?”
내가 들판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어머니는 무식하지만 믿음이 깊었어요. 하나님한테 첫아들을 바치겠다고 했대요. 그래서 그런지 저는 어려서부터 뭐가 뭔지도 모르고 장래 성직자가 되겠다고 그랬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그 길만 걸어 왔죠.”
그가 잠시 말을 끊었다. 뭔가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제 집이 워낙 가난하다 보니까 40대 중반이 될 때까지 이 교회 저 교회 전도사 생활도 많이 했습니다. 실제로 교회에서 전도사라는 게 머슴보다도 못할 때가 많았어요.”
목사가 되어도 돈이 있어 자기 교회를 가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차이가 많았다.
“전도사 생활을 하다가 한번은 어린아이들 학용품 구입을 하는데 아는 신도 분 가게를 택했어요. 믿음도 깊고 저하고 아주 친한 분이었죠. 그런데 회계를 담당하는 장로님이 그 가게에서 올린 계산서가 너무 높다고 하더니 당회장 목사님에게 얘기가 들어간 거예요. 제가 불려갔죠. 당회장 목사님은 저보고 앞으로 구체적인 물품 구입에는 관여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셨어요. 마치 저는 부정이라도 저지른 느낌이었죠. 당회장 목사님은 전도사가 신도들하고 너무 가깝게 지내는 걸 좋아하지 않았어요. 몇 번을 목이 잘리기도 했죠. 월급이 60만 원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돈은 우리 식구 생계가 걸린 돈이었는데 정말 앞이 캄캄한 적이 많았습니다.”
어느새 차는 고속도로에서 벗어나 안산 변두리의 신흥 주택가로 들어갔다. 소규모 건축업자들이 만든 3층 높이의 상가주택들이 밀려오는 어둠 속에서 여기저기 서 있었다. 장영목은 허름한 4층 건물 앞에 차를 세웠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어두웠다. 나는 장영목을 따라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계단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고 과자봉지 같은 쓰레기도 보였다.
“근처 중학교에 다니는 불량 학생들이 꼭 이 계단에 와서 과자도 먹고 담배도 피워요. 몇 번이나 그러지 말라고 주의를 줬는데도 듣질 않아요.”
장영목이 계단 끝에 있는 페인트칠을 두껍게 한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말했다. 지하실에서는 습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가 벽에 붙은 스위치를 켰다. 파란 형광등이 몇 번 껌뻑거리다가 들어왔다. 신도용 긴 나무의자가 10개 정도 보였다. 안쪽 벽에 강대상 하나와 카세트 플레이어 한 대가 의자위에 놓여 있었다. 초라한 지하교회였다.
“원래 이 뒤쪽 블록에 있는 건물을 빌려 썼었는데 쫓겨났어요. 여기는 창고로 쓰던 곳인데 보증금 없이 한 달에 20만 원을 주기로 하고 쓰고 있죠.”
“신도는 얼마나 되나요?”
내가 물었다.
“제 여동생 식구들하고 그 외 서너 명 있어요. 열 명도 되지 않아요. 그나마 다른 분들도 서너 번 나왔다가는 다른 교회로 가곤 합니다.”
그는 직업이 목사였다.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이 먹고 살아야 했다. 그런데 그 작은 교회로는 그 자신의 입에 풀칠하기도 불가능할 것 같았다.
“이 교회를 하면서 어떻게 먹고 살 수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집사람이 공구상가 경리로 나가 한 달에 80만 원씩 월급을 받고 있어요. 그걸로 먹고 삽니다.”
“서울의 큰 교회에서 지원하는 건 없어요?”
“한 번은 그런 기회가 있었죠. 한 달에 3만 원씩 석 달을 온라인으로 송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연락이 왔는데 지출내역을 보고해 달라는 거예요. 원래 돈이 오면 일단 강대상에 올려놓고 그 다음에 써야 하는데 제가 워낙 돈이 없고 바쁘다 보니까 통장상으로 그 돈을 바로 다른 곳으로 보냈어요. 그러다 보니까 거짓으로 지출내역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양심에 걸렸어요. 그래서 석 달 후에 돈 10만 원을 가지고 그 교회에 가서 목사님한테 사실대로 말씀드렸죠. 그랬더니 그 목사님이 불쾌한 표정을 지으면서 ‘자네 아직 배부르구만’ 하시더라고요. 배는 무척 고팠지만 양심이 더 아파서 가서 돈을 돌려드린 건데요.”
나는 우연히 가난한 형제의 독특한 인생관을 발견한 것 같았다.
“목사라는 직업, 회의가 들지 않으세요?”
내가 물었다.
“그런 건 없습니다. 다만 동생 영두의 일 때문에 바쁘게 다니다 보니까 설교가 제대로 되지 않아요. 그렇다고 나 아니고는 동생 옥바라지를 할 사람이 없고 말이에요. 며칠 전에도 검사님이 수사관들을 보내서 여기 전부를 압수수색했어요. 제가 동생을 대신해서 돈을 받았다는 거예요. 교회 이름으로 있는 통장도 검찰에서 조사를 하고 있다고 은행에서 통보를 해주더라고요. 경찰서 유치장에서 영두하고 무슨 얘기를 했는데 그게 수상하다면서 제가 수사선상에 올랐어요.”
도대체가 2억 원을 받기로 한 청부살인범의 환경이 아니었다.
(계속)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