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그 그룹의 한 계열사 사장으로부터 얘기를 들었다. 바뀐 재판장을 그룹 내 법무팀에서는 반 재벌정서를 가진 판사로 본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결국에 가서는 무죄를 선고할 것으로 추정한다는 의견이 나왔다고 했다. 대한민국 최고의 부자와 그 정반대인 거지에 가까운 장영두가 같은 판사에게 재판을 받게 된 셈이다. 재판장의 인생관과 성향은 재판받는 사람에게는 결정적이고 중요한 요소였다.
“재판장이 바뀌어 공판절차를 갱신하고 다시 하겠습니다.”
재판장이 앞의 여자를 보면서 말했다. 조용하고 차분한 어조였다. 그 말에 앞의 피고인석에 섰던 여자가 맞받아쳤다.
“자꾸만 재판장이 바뀌니까 저는 설명하던 걸 다시 하고 또 다시 해야 합니다. 재판부가 저를 이렇게 잡아 넣으셨으면 제가 해야 할 증거 수집을 대신해 주셔야 할 거 아닙니까? 저는 법원에서 저에게 유리한 증거를 찾아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피고인들도 무조건 눈치보고 기지 않았다.
“저희 법원은 그럴 의무가 없습니다.”
재판장이 단호한 어조로 항의를 끊어 버렸다.
“그렇다면 저는 피고인으로서 재판장한테 재판을 받지 않을 기피신청권을 행사할 수도 있습니다.”
기피신청권이란 재판장이 공정하게 재판을 하지 못할 우려가 있을 때 피고인이 재판부의 교체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다.
“그건 알아서 하십시오.”
재판장이 감정 없는 얼굴로 냉랭하게 대꾸했다. 그의 성격의 일단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남들의 말을 다 들어주면서도 자기 길을 가는 성격 같았다. 노무현 정권 이후 법원 풍경도 확연히 바뀌어가고 있었다. 법원 정문 앞에서 담당재판장을 성토하는 글을 들고 서서 시위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얼마 전 고등법원 부장판사가 뇌물수수로 구속된 걸 계기로 성역은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저, 변호사님!”
옆에서 누가 작은 소리로 불렀다. 돌아보니 랭가 담당 국선변호사였다. 넓은 얼굴에 네모난 뿔테안경을 썼다.
“대기실에 있는 랭가를 접견하고 오겠습니다.”
공동변호인이니까 잠시 기다려 달라는 뜻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국선변호사가 통역을 데리고 피고인대기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랭가를 살펴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역이 없으면 만나도 소용없는 외국인이었다. 나도 피고인대기실로 뒤따라 들어갔다. 법정 옆 피고인대기실 안은 나무벤치들이 놓여 있었다. 재판을 기다리는 초조한 표정의 피고인들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이십 명쯤 되는 것 같았다. 랭가가 국선변호사와 통역을 두고 얘기를 하고 있었다.
“억울한 점이 뭐죠?”
국선변호사가 랭가를 보면서 물었다.
“할아버지 아들이 죽이라고 시켰어요. 어떤 아들인지 몰라요.”
랭가가 녹음기를 틀 듯 지난번과 똑같이 대답했다. 내가 그 앞 의자에 앉으면서 잠시 끼어들었다.
“지난번 재판 때 왜 울었어요?”
그는 재판 도중에 눈이 벌게지면서 눈물을 흘렸었다. 난 그 눈물의 의미가 궁금했다. 통역이 랭가와 얘기하더니 이렇게 말을 전했다.
“아버지 엄마도 볼 수 없어서 슬프고 잠만 들면 꿈에 죽은 할아버지가 자꾸만 나타나서 무서워서 그랬대요.”
“통역을 하면서 이상하게 느낀 점은 없어요?”
이번에는 내가 방글라데시인 통역에게 물었다. 그는 일심부터 오랫동안 랭가와 사건에 관해 자세하게 얘기를 한 셈이다. 뭔가 자기 나름대로 짚이는 점이 있을지도 몰랐다.
“살인청부면 먼저 선금을 받아야 하는데 그게 없어요. 이상해요. 랭가의 친구 호센이 장영두에게 돈을 먼저 달라고 했더니 장영두가 그런 거 없다고 하면서 얼굴이 발개졌대요.”
방글라데시인 통역이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얼굴이 발개졌다는 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청부살인이면 랭가가 얼마라도 미리 돈을 받지 않고 할 리가 없었다. 청부살인을 시킨 장영두의 얼굴이 발개졌다는 말도 두고두고 풀어야 할 수수께끼였다. 정말 청부를 받았다면 얼마의 돈이라도 주어야 맞는 것이다.
잠시 후 새로 바뀐 재판장에 의해 장영두와 랭가에 대한 재판이 시작됐다.
“재판장이 바뀌어 변론절차를 갱신합니다.”
재판장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재판을 새로 하겠다는 얘기였다. 재판장은 법대 위에 있는 기록들을 보면서 말했다.
“두 사람의 피고인 모두 형이 너무 무겁다는 취지로 항소한 거 맞죠?”
앞의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였다.
그런데 지난번 재판장은 도대체 항소 취지를 모르겠다면서 나를 그렇게나 공박했었다. 판사에 따라 문서를 보는 태도도 천차만별이었다.
“랭가에 대해 신문하시죠.”
재판장의 허락이 시원스럽게 떨어졌다. 법절차에 대한 지식도 내세우지 않고 어떤 까탈도 잡지 않았다. 감사했다. 내가 하려는 신문들의 핵심은 랭가의 행위가 거액을 받기로 하고 실행한 청부살인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를 죽여주면 얼마를 받기로 했죠?”
내가 물었다.
“2억 원을 받기로 했습니다.”
랭가가 대답했다. 나는 랭가가 경찰서에서 방송기자들에게 한 인터뷰 내용이 담긴 프린트용지를 제시했다.
“여기 방송인터뷰 내용을 보면 당시에는 1억 원을 받기로 했다고 말했었는데 왜 그후 재판이 열리고부터는 2억 원이라고 금액이 올라갔죠?”
“제가 외국인이라 1억 원과 2억 원의 발음이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방송사 기자들이 잘못 알아들으신 거예요. 전 분명히 처음부터 2억 원이라고 했습니다.”
랭가의 대답이었다. 그럴 수도 있었다. 내가 계속했다.
“죽은 영감님이 마당에 사나운 개를 일곱 마리 풀어서 항상 지키게 하는 걸 알았었나요?”
청부살인이라면 치밀한 살인계획이 필요한 것이다. 기본적인 사항 중의 하나로 어떻게 침투할 것인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개들을 어떻게 제압할 것인지 대책이 있어야 했다.
“알았습니다.”
“그 개들을 따돌릴 수면제와 고기를 준비한 적이 있어요?”
“그런 적 없습니다.”
“죽은 할아버지 집 안방에 장탄이 된 스웨덴제 공기총을 두고 있었는데 장영두가 미리 그 사실을 얘기를 해 주던가요?”
“그건 알고 있었습니다.”
“그 집으로 들어갈 때 어떤 무기를 들고 갔죠?”
죽은 영감은 자신의 몸을 충분히 지킬 수 있는 강한 체력을 가지고 있었다. 매일 규칙적인 운동과 건강관리를 했다. 더구나 집에는 칼, 전정가위, 톱같이 급할 경우 방어용으로 사용이 가능한 기구도 많았다. 영감을 죽이기 위해 들어갔다면 흉기를 소지해야 맞는다.
“장영두가 칼을 줘서 가지고 갔어요.”
랭가의 대답이었다. 그래야 맞다.
“길이가 얼마나 되나요?”
내가 다시 물었다.
“50cm.”
랭가가 잠시 생각하다가 그렇게 대답했다.
“에이, 무슨 그런 거짓말을?”
내가 빙긋이 웃으면서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칼날이 이 정도 길이죠?”
내가 새끼손가락을 내 보이면서 물었다. 랭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반은 손잡이죠?”
랭가가 다시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칼 길이는 5cm 정도네.”
장영두는 차 안에 배를 깎아 먹는 주머니칼이 있었다고 했다. 그때 재판장이 끼어들면서 내게 물었다.
“지금 질문들을 하시는 취지가 뭔지 먼저 말씀을 해 주시죠.”
순간 나는 속으로 김이 샜다. 나의 저의를 숨기고 이리저리 다른 걸 물으면서 랭가의 속을 알아보는 중이었다. 그걸 말하면 랭가도 당연히 알아채고 대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료를 읽지 않고 재판정으로 나온 판사들은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선입견을 막기 위해 수사기록을 사전에 읽지 않는 게 재판의 원칙이기도 했다. 할 수 없이 내가 설명했다.
“거액을 받기로 한 살인청부업자로서의 구체적인 계획과 거기에 걸맞은 행동이 있었느냐를 따지는 겁니다. 2억을 받기로 하고 사람을 죽이러 들어간 킬러가 배 깎아 먹는 호주머니 칼을 들고 가서 되겠습니까?”
재판장이 납득하는 표정이었다. 내가 신문을 계속했다.
“살인청부를 받았다고 하는데 계약금 얼마를 받았죠?”
“받지 않았습니다.”
“왜 안 받았어요?”
“장영두를 믿고 안 받았습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그러면 지금이라도 돈을 받아야 하죠?”
나는 랭가의 답변과 그 태도를 예민하게 살폈다.
“지금은 받고 싶지 않습니다.”
랭가가 대답했다. 계산하는 표정이었다.
“죽이러 들어갈 때 낮이었어요? 밤이었어요?”
“낮이었습니다.”
“동네사람들이 지나면서 볼 수 있었겠네?”
“그렇습니다.”
“죽은 할아버지 집 근처 상황이 어땠어요?”
“앞이 큰 도로고 옆도 과수원으로 들어가는 길이었습니다.”
지나가는 마을사람들이 쉽게 볼 수 있는 곳이다.
“당시에 창문이 열려 있었어요, 아니면 닫혀 있었어요?”
“열렸던 것 같습니다.”
“장영두는 경기 41고 73××번호판을 단 자기 차를 타고 갔죠?”
“네, 장영두가 할아버지 집 대문 앞에 주차했습니다.”
“내가 현장에 가 보니까 할아버지 집 앞 10m쯤 되는 부분에 파란 페인트칠을 한 양철지붕집이 있던데 기억해요?”
랭가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집 옆에도 단층의 밝은 벽돌집이 있던데 맞지요?”
“기억납니다.”
“할아버지를 죽이고 나올 때 앞집 남자를 봤었죠?”
“봤습니다.”
“그게 2억 원을 받기로 한 살인청부업자의 행동이었나요?”
랭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낮에 마을사람들이 모두 보는데 장영두가 자기 차를 버젓이 그 집 문 앞에 대놓고 청부살인을 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나는 랭가의 진술을 논리적으로 하나하나 무너뜨리는 중이었다.
(계속)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