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영화 <박수건달> 속 한 장면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다.
서울 용산구의 한 다세대 건물에는 ‘상록산악회’라는 정체모를 사무실이 하나 차려져 있었다. 그런데 이곳은 보통의 사무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코를 찌르는 향냄새에 어두컴컴한 내부에는 불단과 기도방이 설치돼 있었던 것. 이곳의 주인 라 씨는 찾아오는 손님 등을 상대로 사주와 팔자, 운세 등을 봐주거나 기도를 해주고 그 대가로 돈을 받아 챙겼다.
라 씨는 신을 받거나 체계적인 교육을 배운 무속인이 아니었음에도 1970년부터 1989년까지 철학관을 운영하며 습득한 주술적 지식과 학술을 바탕으로 도력이 매우 높은 도인인 것처럼 행세했다. 덕분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호소하는 이부터 정신적, 신체적인 문제를 의논하는 사람까지 라 씨를 찾는 사람이 끊이질 않았다.
그런데 라 씨는 단순히 무속인 행세만 하는 게 아니었다. 개인적인 문제로 힘들어하는 여신도들이 오면 자신이 무한한 능력을 가진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스스로를 우상화했다. 자신을 믿으면 만병이 치료되고 가족들의 길흉화복도 다스릴 수 있다는 거짓말로 사이비 교주처럼 신도들을 끌어 모았다. 이 과정에서 약간의 신체접촉도 있었으나 라 씨는 이미 일흔을 넘긴 고령이라 여신도들도 전혀 경계를 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에게 의지하는 여신도들이 늘어나자 라 씨는 슬슬 본색을 드러냈다. ‘남녀가 성관계를 갖는 것은 죄가 되지 않고 나와 같은 도인과는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성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교리를 만들어낸 것. 일명 ‘자연법’이라 불리는 이 교리는 라 씨가 여신도들과 잠자리를 할 수 있는 좋은 핑계가 됐다.
더욱이 라 씨는 자신에게는 비밀이 없어야 한다며 신도들의 개인적인 사생활과 고민을 털어놓게끔 유도했다. 이를 통해 신도들에 대한 모든 것을 알게 된 라 씨는 그들의 심리를 더욱 쉽게 이용할 수 있었다. 혹시나 의심을 살 것을 대비해 신도들끼리 대화는 철저히 금지시키는 치밀함도 보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라 씨를 교주처럼 떠받드는 여신도들이 점차 늘어났다. 그럴수록 라 씨는 “내 말을 듣지 않으면 가족과 스스로에게 큰 해악이 닥칠 것”이라 예언하며 더욱 복종을 강요했다. 점차 신도들은 라 씨를 따르면서도 동시에 두려워하게 돼 기도비 명목으로 거액의 돈을 내놓고 안마와 식사, 청소 등 몸종처럼 일을 하기도 했다.
젊은 여신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또 다른 피해자 김 아무개 씨(여·32)는 같은 해 9월 “가만히 있어. 이렇게 하지 않으면 네가 죽고 기도를 깨면 네 남편도 죽거나 다쳐”라고 말한 뒤 성폭행했다.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슬픔에 잠겨 있던 기 아무개 씨(여·26)에겐 “아버지 혼을 달래려면 내 기를 받아야 한다. 죽을 운명인데 내 기를 받아서 살고 있다” 등의 말을 하며 4차례에 걸쳐 성폭행 했다. 기 씨가 반항하면 “성폭행 사실을 어머니에게 알리겠다”는 협박도 일삼았다.
이런 식으로 라 씨에게 성폭행을 당한 여성 가운데는 의사, 대기업 간부 등 고학력 지식인도 포함돼 있어 충격을 줬다. 심지어 한 집안의 어머니, 딸, 며느리까지 모두 성폭행 당한 사례도 있었다. 이로 인해 일부 신도들은 가정이 깨지고 극심한 우울증, 처녀막 파열 등 상해를 입기도 했다.
라 씨의 파렴치한 만행은 무려 7명의 피해자를 낳은 뒤에야 막을 내렸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라 씨의 끔찍한 범행이 드러나 재판이 진행되는 가운데도 일부 여신도들은 매일같이 법정에 나와 라 씨를 위해 기도하는 등 여전히 그를 따르는 모습을 보인 것. 나중엔 라 씨로부터 성폭행과 성추행을 당한 피해자들이 고소를 취하해 강간·강제추행 혐의는 공소 기각이 되기도 했다. 지난해 6월 고소 취하나 합의 여부와 상관없이 수사를 할 수 있는 ‘성폭행 친고죄’가 폐지됐지만 라 씨의 경우 법 개정 전 범행을 저질러 적용할 수 없었다.
결국 재판부는 여신도들을 강간·강제추행하고 무면허 의료행위를 한 혐의(강간 등)로 기소된 라 씨에 대해 무면허 의료행위에 대한 혐의만을 인정해 징역 4년에 벌금 1000만 원을 선고할 수밖에 없었다.
라 씨는 성폭행 외에도 주택 지하에 부항기와 침을 갖추고 이 아무개 씨에게 복부와 가슴, 얼굴, 머리 등에 침을 놓아 1만 원을 받는 등 지난 2011년까지 6명을 상대로 1110회에 걸쳐 침, 부항 등 불법 의료행위를 해 1117만 원을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재판부는 “라 씨는 무면허 의료행위에 수반해 다수의 여신도들을 성폭행하고 더불어 자신에게 정신적으로 예속돼 있는 신도들에게 ‘가정에 큰 재앙이 닥칠 것’이라며 기도비 명목으로 수천만 원의 돈을 갈취했다. 비록 성폭력 피해자들의 고소 취소로 라 씨에 대한 성폭력 범죄를 처벌할 수 없게 됐지만 성폭력 범죄는 대부분 무면허 의료행위에 수반해 발생했거나 의료행위를 빙자해 발생했다”며 “이에 따라 라 씨의 무면허 의료행위는 보통의 무면허 의료행위와는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고 밝혔다.
이어 “범죄예방의 측면에서도 라 씨를 엄벌해 영향력 아래에 놓여 있는 사람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며 실형을 선고했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