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승연 회장의 남대문경찰서 출두 모습과 조폭 사진 합성. | ||
이번 사건을 통해 재벌기업과 조폭의 유착 관계도 도마 위에 오르내리고 있다. 한 전국구 조폭 보스 출신은 “조폭과 재벌은 상부상조의 관계로 보면 된다”고 말하고 있다. 또 다른 거물급 주먹은 “김 회장과 같은 동향인 인연으로 잘 안다”고 밝히기도 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재벌과 조폭의 관계가 의외로 상당히 끈끈하게 이어지고 있음을 방증하는 증언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쯤 되면 과거 정치권을 진흙탕에 빠트렸던 ‘권폭 유착’에 이어 ‘전폭(錢爆) 유착’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날 지경이다.
김승연 회장의 경우 최소한 조폭이나 조폭 출신의 거물급 인사들과 어느 정도의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폭 1.5세대의 대부로 통하는 충청도 출신의 한 원로 주먹 A 씨는 기자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한화 김 회장과는 같은 동향인 인연 등으로 잘 안다”고 밝혔다. 다음은 A 씨와의 일문일답이다.
―후배들 가운데 재벌기업들과 연계되는 세력이 실제 있는 것인가.
▲요즘은 예전과 달리 다들 후배들이 개인사업체를 갖고 있으니까, 아무래도 기업들하고 연계가 많다. 다 먹고 살아야 하지 않나. 예전처럼 그저 유흥업소 한두 개 갖고 하는 정도가 아니고…. 또 나름대로 사업에 뜻이 있어 활발하게 뛰는 후배들도 많다.
―한화 김 회장의 보복 폭행 건으로 시끄러운데.
▲한화 건은 내가 솔직히 뭐라고 말하기가 좀 그렇다. 김 회장과 친분 관계도 있고. 안 그래도 이번 일로 내가 몇 번 서울에 다녀왔다.
―혹시 한화 측 요청이었나.
▲….
―김 회장이 실제 조폭을 동원할 정도의 선이 있는가.
▲그렇진 않을 것이다.
―앞서 김 회장과 친분 관계가 있다고 했는데.
▲원래 한화그룹하고 충청도 쪽하고 가깝다. 김 회장의 선친인 김종희 회장 때부터 잘 안다. 김 회장과 내가 같은 동향인 인연이 있다. 김 회장이 참 충청도를 위해서 장학사업도 많이 하고 좋은 일 많이 하셨다. 안타깝게 생각한다.
A 씨는 시종일관 “김 회장이 그런 분이 아닌데 너무 안타깝다”고 걱정했다. 그는 기자에게 김 회장의 좋은 면을 부각시키려 애썼지만 그를 통해 자연스럽게 주먹세계 출신과 재벌 회장의 친분 관계가 드러나게 된 셈이다.
재벌과 조폭의 유착관계에 대해서 지난 80년대 서울 명동과 종로를 중심으로 활약했던 안토니파의 보스 출신 안상민 씨는 기자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안 씨는 한때 수백 명의 ‘동생’들을 거느리고 외제 방탄차를 타고다닐 정도로 조폭세계에서 잘나가던 ‘주먹’. 하지만 암투병 중인 아내와의 사랑을 위해 지난 99년 조직생활을 청산하고 낙향해 새 인생을 살고 있는 인물이다.
―재벌과 조폭, 얼핏 어울려 보이지 않는데.
▲무슨 소린가. 오히려 재벌과 정치권보다 더 상부상조하기 쉬운 것이 재벌기업과 조폭이다. 재벌기업이 갖고 있는 것은 돈이고, 조폭은 힘을 갖고 있다. 재벌기업도 사업 관계상 힘을 필요로 하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고, 조폭은 당연히 돈이 필요한 것 아닌가.
―대체 기업인들과 조폭이 어떻게 친분관계를 맺을 수 있나.
▲내 경험상으로는 구치소와 교도소가 최적의 상견례 장소로 이용된다. 거기에 들어가면 사회에서 ‘한다’ 하는 수많은 정치범들과 경제사범들이 들락거린다. 소위 범털들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는 건달들이 가장 잘나간다. 안에서 맘대로 활동하며 힘을 쓰는 것은 건달 두목급들뿐이다. 따라서 그 안에서는 밖에서 유명하다는 범털들도 건달 두목급들과 서로 형, 동생 하며 잘 지내게 된다. 안에서의 호형호제가 밖으로 나가서도 이어지는 것이다.
(실제 ‘양은이파’의 두목 출신 조양은 씨도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 수감 시절 김홍일 전 의원과 허인회, 함윤식 씨 등과 친하게 지낸 점을 소개하기도 했다.)
―재벌들의 사업에서 조폭들이 필요한 것은 무슨 경우인가.
▲대부분 건설업계라고 보면 된다. 부정 입찰이나 철거 용역 등의 악역을 담당해야 하는 경우 대개 조폭이 동원된다. 따라서 조폭들도 무슨무슨 건설이니, 무슨무슨 개발이니 하는 개인 사업체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재벌에서 이들에게 작은 하청공사 하나 선물로 넘겨주고 하는 식이다.
▲ 김태촌 씨 | ||
▲여기서 자세하게 얘기할 순 없다. (그는 비보도를 전제로 기자에게 D 그룹과 H 그룹을 거론하기도 했다)
―‘주먹’들이 재벌 회장하고 직접적으로 연결되는가.
▲그렇진 않다. 건설업계가 대개 재벌그룹의 계열사니까, 회장 밑의 간부들과 유착이 된다. 하지만 일부 재벌 회장들이나 그 후계자 중엔 상당히 성격이 화끈하고 불같은 기질의 소유자들도 있다. 그들은 직접 현장에서 부딪치기도 한다.
―이번 김 회장 건을 어떻게 보나. 조폭들이 자발적으로 개입한 것으로 보는가.
▲조폭들이 자발적으로 개입하는 게 어딨나(웃음). 연락이 와서 ‘도와달라’고 하니까 출동하는 거지. 건달들이야 이권이 있는 쪽에 서서 힘을 행사하는 것 아닌가.
전직 전국구 조폭 보스 출신인 두 사람의 얘기는 조폭과 재벌의 유착 관계를 현실감 있게 보여주고 있다.
조폭의 대명사로 불리는 범서방파 두목 출신의 김태촌 씨도 재벌과의 유착 내지는 대립 관계에 자주 등장한 적이 있다. 그는 지난 5공 시절 막강한 금권력을 자랑하던 슬롯머신의 대부 정덕진 씨와 끈끈한 유착 관계를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자신의 일화를 자전적 소설로 펴낸 <서방패밀리>에는 이런 일화가 소개되고 있다.
‘김태촌은 무작정 정덕진 사무실을 찾아가 자신이 김태촌이라고 소개한다. 그는 “동생들과 생활을 꾸려나가자니 힘든 일이 많다”며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하고 이에 정덕진은 책상 밑에 둔 그날 하루 매상이 든 돈가방을 아낌없이 김태촌에게 내민다.
이후부터 두 사람은 형님 동생 하며 공생관계가 유지된다. 하루는 정덕진이 김태촌을 자신의 사무실로 부른다.
“형님 무슨 일이 있습니까?”
“무슨 일은… 사업은 잘 된다면서?”
“형님 덕분입니다. 그게 참 괜찮던데 저 광주에서 한 곳 더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광주 지산유원지에 호텔이 하나 생겼는데 그 유기장을 해볼까 합니다.”
“하하 이 친구 욕심은…. 내가 도와주지 도와줄 수 있는 것은 도와줘야지. 그런데 동생. 제주도에 칼 호텔이 있어. 이번에 그 호텔의 운영주가 바뀌었어. 운영주가 바뀌면 클럽이다 카지노다 이런 저런 부대업소가 바뀌게 마련 아닌가. 그래서 카지노를 내가 인수할까 해. 그래서 동생의 도움이 필요한 거야.”
“형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입찰이든지 뭐든지 형님 외에는 얼씬도 못하게 하겠습니다.”’
김 씨가 당시 카지노의 대부 전낙원 전 파라다이스 회장과 대립 관계를 형성하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김 씨가 90년 전 전 회장이 운영하던 워커힐 카지노에 조직원 500여 명을 이끌고 가서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이는 누가 봐도 서방파의 세를 과시하는 모양새가 됐다. 전 전 회장은 정덕진과 김 씨가 힘을 합쳐 자신을 위협한다고 느꼈다.
김 씨는 “당시 나는 조직원들을 한 자리에 모아서 신앙에 관한 얘기를 한 것뿐인데 전 회장은 이를 자신을 위협하는 것으로 오해한 것 같다. 당시 워커힐은 선경(지금의 SK) 것이었는데, 전 회장이 이를 선경의 최종현 회장에게 말한 것 같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이 일로 인한 김 씨와 SK 간의 구설수는 오래 갔다.
김 씨가 형 만기로 출소한 뒤 얼마 전까지도 김 씨가 SK에 앙심을 품고 있다는 소문과 함께 최태원 회장에 대한 협박설이 심심찮게 나돌았던 것. 이에 대해 김 씨는 지난해 1월 “내가 최 회장에게 14억 원을 갈취했다는 소문이 나돈다. 90년 카지노의 일을 두고, 그 걸 이유로 누군가가 말을 만든 것 같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강력히 부인하기도 했다.
조폭과 재벌의 유착 관계를 말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로 정 아무개 씨가 있다. 그는 호남 출신으로 김태촌, 조양은 씨 등에게 ‘형님’으로 통하는 호남 주먹 1.5세대다. <서방패밀리>에 정 씨는 이렇게 등장한다.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중년의 신사에게 정전식이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그는 태권도 출신의 주먹으로 J 그룹에 들어가 일선 도매 영업을 책임지고 있는 정○○였다. 그는 직장에 입사하고 나서도 주먹들과 원만한 교류를 유지하며 거칠기로 유명한 주류업계에서 실력자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호남의 한 원로 주먹 출신은 “J 그룹의 경우 주류 업종이라는 특성 탓인지 유독 조폭들이 주변에 들끓었다. 각종 사업에 조폭들이 동원됐다는 소문이 가장 많이 돈 것이 J 그룹이었다”고 전했다. 정 씨는 이후 J 그룹에 이어 국내 굴지의 L 그룹의 간부로 옮기는 등 재벌기업과 유독 밀접한 유착관계를 보여왔다.
조폭 수사에 권위자로 인정받는 송파경찰서의 안흥진 경위는 “재벌그룹의 경우 일부는 업무 성격상 용역을 둘 수밖에 없고 이때 동원되는 경비회사나 건설 관련 용역 업체의 용역원들 중에는 조폭들이 낄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라고 밝혔다.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