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월25일 고건 당시 국무총리가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앞서 역대 대통령들의 초상화가 걸려있는 국무회의장 앞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고 전 총리에게 저런 면모가 있었는지에 대해 감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평생 고위 공직자 생활을 하며 부귀영화를 누려와놓고 왜 하필 노 대통령에게 ‘항명하느냐’며 거북해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경우든 고 전 총리의 행동은 기대하기 힘든 일이었고, 놀라운 사건이었다는 반응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고 전 총리가 혹시 더 큰 야망을 갖고 인기주의 행동을 한 게 아니냐는 추측을 제기하는 등 고 전 총리의 속마음과 향후 거취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고 전 총리는 43년의 공직생활을 마감하면서 국민들에게 나름의 이미지를 각인시켰다는 점에선 역대 어느 총리보다 성공적인 마무리를 한 셈이다.
고 전 총리에게 대망론이 존재하는지, 아니면 단순 명예욕인지, 그도 아니면 노 대통령과 코드가 맞지 않은데서 나온 항명성 반발인지, 상당한 궁금증을 낳고 있다.
고 전 총리가 이번에 각료제청권을 거부하면서 80년 5·17 쿠데타 시절을 연상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잘 알려지지 않은 비화 한토막. 김우식 청와대 비서실장이 고 전 총리에게 각료 제청권을 요구하기 위해 찾아온 날은 5월21일이다. 언론은 최소한 그보다 2~3일 늦게 이같은 상황을 감지했다. 하지만 청와대와 총리실은 이미 상당한 수준의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청와대는 어떻든 고 전 총리를 굴복시켜 각료 제청권을 행사시켜야겠다는 결심을 굳혔고, 고 전 총리는 청와대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은 상태였다.
김우식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단호하게 각료제청권 거부의사를 밝힌 고 전 총리는 그날 저녁 가까운 지인들과 긴급 만찬을 가졌다. 폭탄주를 여러 차례 돌리면서 대취한 고 전 총리는 참석자들에게 5·17 비망록을 꺼내 보였다. 이 비망록은 자신의 5·17 당시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한마디로 자신이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에 협력하지 않았고, 한 번 세운 결심은 번복하지 않는다는 게 요지다.
구체적으로 고 전 총리는 80년 5월17일 신군부세력이 주도한 비상계엄 전국확대에 반대해 맡고 있던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직을 전격 사퇴했다. 최규하 대통령뿐 아니라 신군부측 사람들이 수차례 복직을 권유했지만 고 전 총리는 끝내 단호히 거절했고, 국보위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고 총리는 비망록에서 “지금도 80년 내가 내린 결단을 후회하지 않는다”면서 “공인으로서, 더욱이 정무직으로서 스스로의 정치적 소신에 따라 진퇴를 결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고 소회를 밝혔다.
일반적으로 고 전 총리는 공무원으로서 이미지가 강하다. 정치적 소신보다는 정권이 누구냐에 관계없이 주어진 일을 할 것이란 이미지다. 고 전 총리는 이 비망록을 통해 자신이 누구보다 정치적 소신을 중요시여긴다는 점을 강조했다.
고 전 총리는 총리 퇴임 후 5월28일 총리실 기자들과 호프미팅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고 전 총리는 87년 민주화투쟁 당시 내무장관이었다고 상기시키며 “시위 진압을 위해 대학에 경찰병력을 투입시키자는 요구를 내가 거절했다”고 밝혔다. 고 전 총리는 5·17 당시 처신과 87년의 행동을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고 전 총리가 이번 각료 제청권거부 상황을 군사독재 시절과 비교한 것은 어쩌면 오버액션일 수 있다. 청와대는 그 때문에 기분이 더 상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고 전 총리로선 5·17 상황과 빚댈 만큼 자신의 판단에 대한 절박성을 호소한 것이다.
고 전 총리는 총리 두 번, 서울시장 두 번, 장관 세 번 등 그야말로 고위공직생활을 원없이 역임했다. 행정의 달인이란 최고의 칭호도 받고 있다. 이런 고 전 총리가 굳이 노대통령의 요구를 물리칠 까닭이 있었느냐는 점에서 고 전 총리의 야망을 거론하는 경우가 많다.
고 전 총리는 실제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으면서 국정을 무난히 관리해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국정관리나 국가통치라는 점에서 고 전 총리는 안정적 이미지를 주는 측면이 있다. 향후 국정이 불안정할 때마다 고 전 총리의 주가는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고 전 총리가 권한대행 시절 안정 및 보수이미지를 심어줬다는 점은 최대 성과 중 하나다. 고 전 총리는 비록 참여정부에 동참했지만 노 대통령과 색깔이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줬다. 또 개혁이라는 코드보다 원칙을 관철시키려는 이미지를 창출해왔다.
정치권 일각에선 고 전 총리가 차기 대선에서 유력한 주자로 부각될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현재 여야의 주자들이 새로운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할 경우 안정적 이미지의 고 전 총리가 대안 중 하나로 부상할 수 있다는 관측이다.
여권뿐 아니라 야권에서도 고 전 총리의 가능성을 거론하고 있다. 정치권에선 고 전 총리가 과거 민정당 시절 국회의원을 지내는 등 한나라당과 같은 뿌리란 점을 주목하고있다. 또 호남 출신이란 점도 한나라당엔 묘한 매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고 전 총리는 여야 모두에게 열려 있는 셈이다.
하지만 고 전 총리의 나이는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 박관용 전 국회의장과 같은 66세이다. 결코 적지 않은 나이다. 고 전 총리가 큰 일을 도모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주장의 배경이다.
이 때문에 이번의 각료제청권 파동도 고 전 총리가 마지막 공직생활을 명예롭게 은퇴하려는 명예욕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고 전 총리는 또 통일부총리 보사부장관 문광부 장관이 일을 잘 하고 있는데 여당 핵심 정치인들을 위해 찍어서 내보내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어쨌든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총리시절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항명하면서 인기가 급상승했듯이 고 전 총리도 노 대통령에게 항명, 인기를 높이고 있다. 고 전 총리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전적으로 그의 몫이다. 고 전 총리는 지금까지 문을 닫았던 개인 사무실을 다시 열었다. 당초 미국으로 공부하려던 생각도 있었으나 그냥 국내에 머물기로 했다. 조용히 사색하며 세월을 낚겠다고 한다.
고 전 총리는 5·17 당시 사표를 제출하고 종로구에 개인 사무실을 얻어 ‘남산재’라고 이름 붙였다. 고 전 총리의 남산재에선 청와대가 정면으로 보였다고 한다. 고 전 총리는 20여 년 전으로 돌아가 다시 개인 사무실에서 고건 구상을 가다듬게 될 것이다. 마치 “나는 간단한 사람이 아닙니다”는 고 전 총리의 독백이 들려오는 듯하다.
이필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