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5일 평양에서는 북한 인민군 창설 75주년을 기념하는 성대한 군사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15년 만에 벌어진 이 퍼레이드는 북한의 건재를 과시함과 동시에 지난해 10월 핵실험을 단행한 김정일의 위신을 널리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주간겐다이>에 따르면 이때 이미 김정일의 건강에 이상이 있었다고 한다.
퍼레이드에 참가한 한 서방 외교관은 “김정일은 퍼레이드 도중에 주위의 부축을 받으며 등장했다. 그는 행진하는 병사들을 향해 박수를 치면서 단상의 손잡이에 의지한 채 조금씩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손을 흔들며 병사들을 격려한 후 뒷문으로 다시 퇴장했다. 김정일의 등장에서 퇴장까지는 불과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고 당시 김정일의 심상치 않은 모습에 대해 언급했다.
그 후 5월 중순 독일의 의료진이 북한을 방문하면서 ‘김정일 건강이상설’은 거의 기정사실로 굳어졌다. 과거에 북한에서 의술을 가르친 적이 있으며 이번에 방북한 독일 의료진과도 관련이 있다는 한 독일 외과의사에 따르면 김정일은 5월 초에 심근경색을 일으켜 ‘베를린심장센터’의 의료진을 북한으로 불러 긴급히 관상동맥 우회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5월 초 이후 거의 한 달 동안 김정일이 공식적인 자리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도 묘향산 초대소에서 요양 중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6월 들어 김정일이 현지지도에 나서는 등 건강이상설을 불식시키듯 외부활동을 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의 건강이 좋지 않은 것만은 사실인 듯하다.
앞서의 독일 외과의는 또 “북한의 의사들은 예전부터 구 동독의 간부 전용병원에서 공부를 해왔으며 독일이 통합된 지금도 그 전통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지난해 후반부터 갑자기 베를린심장센터를 비롯한 주요 병원에 북한 의사들이 연수를 오고 있다”는 말로 김정일의 건강상태에 대한 설명을 대신했다. 그는 김정일의 심장수술은 무사히 끝났고 예후도 좋다고 전했다.
김정일의 건강을 위협하는 것은 심장병만이 아니다. <주간겐다이>는 앞서 언급한 서방 외교관의 발언을 빌어 지병인 당뇨병이 계속 악화되면서 망막에 이상이 생겨 기존의 안경을 눈을 다 덮을 수 있는 고글 같은 것으로 바꿨으며, 걸음이 불편한 것에 대해서는 당뇨병 때문에 두 다리가 괴사하고 있다는 추측도 내놓고 있다.
<주간문춘>은 한술 더 떠 “김정일의 건강 상태는 이미 손쓰기 늦은 상태”라고 보도하고 있다. 올해 3월 평양 주재 중국 대사관은 정월대보름 연회를 열어 김정일을 초대했다. 중국에 대해 정통한 한 저널리스트가 연회에 참석한 김정일의 용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김정일은 부은 얼굴과 느리고 불편해 보이는 걸음걸이로 나타났다. 더구나 옷을 입고 있는 상태에서도 금방 알 수 있을 정도로 다리가 부어 있었다.” 중국어로 ‘다리가 붓다’는 말은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뉘앙스가 있다고 하니 단순히 김정일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보기에는 꽤나 의미심장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주간문춘>은 김정일의 건강 악화가 북한의 대외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한 국제 저널리스트에 따르면 미국이 그동안 동결했던 북한의 BDA 자금 문제에 있어서 북한의 체면을 살려주는 안을 내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반응이 둔한 것은 “김정일의 용태가 악화돼 최종적인 결의를 내릴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정일 건강이상설’이 떠돌면서 북한의 다음 후계자와 ‘붕괴 후’의 시나리오를 그리는 언론도 있다.
김정일에게는 정남과 정철, 정운이라는 세 아들이 있는데 아직 공식적으로 후계자가 지명되지 않은 상태다. 세 사람 모두 후계자가 되기 위해 파벌을 만들어 경쟁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누가 김정일의 뒤를 잇건 혼란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일본 언론의 지배적인 시각이다. 이미 중국 화폐와 제품이 버젓이 유통되는 북한의 상황을 고려할 때 북한이 붕괴하면 그대로 중국에 흡수될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특히 <주간포스트>는 김정일 사후에 북한 난민들이 대거 일본으로 밀려들어 일본 재정 파탄날 수도 있다며 호들갑스런 경고음을 발했다.
지난 6월 2일 탈북자들이 작은 배로 북한을 탈출해 일본에 도착한 사건이 있었다. 탈북자가 바다를 통해 일본에 도착한 것은 20년 만의 일로 이 사건은 일본 전체를 깜짝 놀라게 했다. <주간포스트>는 최근 들어 탈북자가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앞으로 더 많은 탈북자들이 일본으로 ‘흘러들어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북한 연안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리만 해류가 도중에 쓰시마 해류와 만나며 일본 해안 쪽으로 흘러들기 때문이다. 해양학자인 히로세 교수는 북한을 떠난 배가 바다를 표류하다가 저절로 일본에 도착할 가능성은 50% 이상이라고 한다.
<주간포스트>는 만일 김정일 사망 후 북한에서 쿠데타나 폭동이 일어나 난민이 대량 발생할 경우 일본이 떠안게 될 난민의 숫자나 그에 드는 비용에 대해 구체적인 계산을 내놨다. 북한의 선박수를 고려할 때 일본에 도착할 난민은 약 10만 명이며, 이들의 식사비로만 하루에 1억 엔(약 7억 5300만 원)이 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또한 난민들에게 필요한 주택이나 학교, 수도 등의 시설을 건설하려면 결국 일본 경제가 파탄날 것이라는 것이 기사의 요지다.
심심치 않게 거론되는 ‘포스트 김정일’ 시대의 권력 향방은 휴전선을 맞대고 있는 우리로선 민족의 운명과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다. 지나친 호들갑은 피해야겠지만 김정일의 건강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박영경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