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월29일 노무현 대통령이 열린우리당 당선자 초청 만찬에 앞서 인사를 나누고 있다. 노 대통령 오른쪽에 신기남 의장, 왼쪽에 천정배 원내대표가 활짝 웃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4·15 총선에서 ‘참패’(영남)-‘압승’(호남)으로 극명한 대비를 보였던 양측이 여권의 진용 개편 과정에서 사사건건 반목하고 있는 것이다.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경선(5월11일)에서부터 서로 맞섰던 영-호남그룹이 최근에는 김혁규 전 경남지사(열린우리당 상임위원)의 차기 총리 지명에 대한 찬반과 이른바 ‘영남발전특위’ 논란을 거치며 더욱 더 대립각을 뚜렷이 하고 있다.
양측의 갈등은 정서적으론 ‘영남 우대 불가피론’과 그의 대척점이라 할 수 있는 ‘호남 홀대론’으로, 여권내 기반면에선 당(黨)-청(靑)간 대립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호남 그룹이 신기남 의장-천정배 원내대표 등 지도부를 중심으로 열린우리당내 핵심세력으로 자리잡고 있는 반면, 영남그룹은 노무현 대통령을 정점으로 청와대를 확실히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목되는 것은 ‘지역’이란 카테고리로 나뉜 영-호남의 대립이 당권파 대 비당권파간 주도권 다툼의 구도와 상당부분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열린우리당을 사실상 장악한 당권파-호남그룹이 ‘원내정당화’를 내세워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것에 맞서, 비당권파-영남그룹은 ‘전국정당화’를 명분으로 청와대-내각에 진지를 구축해 견제하려 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영-호남 갈등이 단순한 지역간 이해상충의 범주를 뛰어넘어 여권내 권력투쟁으로 확대될 수도 있다는 얘기라 하겠다.
‘영남 대(對) 호남’의 대립은 차기 총리 지명을 둘러싸고 전면화되기 시작했다. 노 대통령은 5월 초순부터 직-간접적으로 김 전 지사를 총리에 지명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한나라당은 이에 대해 박근혜 대표까지 나서 반대의 뜻을 피력했고, 만약 김 전 지사를 총리에 지명한다면 “여야간 ‘상생정치’는 중대 위기를 맞게 될 것”(김형오 사무총장)이라며 경고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열린우리당 내에선 ‘김혁규 총리 카드’의 적합성에 대해선 의문을 표시하는 견해가 일부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한나라당의 반발을 통과의례로 여기며 대수롭지 않아 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민주노동당과 민주당이 ‘김혁규 불가론’에 가세하자 5월 하순부터 상황은 급격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수도권 일부 초-재선 의원들이 “여야 대표간에 상생하겠다고 했는데 야당이 그렇게 반발하는 사람을 총리로 지명하는 것은 재고되어야 한다”(정장선 의원)며 문제를 제기하고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 대부분 호남 의원들도 이에 가세하고 나선 것이다.
호남 의원들은 김 전 지사가 총리에 지명돼 ‘경남 대통령-경남 총리’구도가 현실화될 경우 당면한 6·5 전남지사 보궐선거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직-간접적으로 반대 의사를 피력하고 있다. 전남의 K의원은 “왜 노 대통령이 이 시기에 자신과 동향에, 야당이 반대하는 카드를 밀어붙이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일부에서는 부산시장, 경남지사 보선을 염두에 뒀다고 하는데 한나라당의 반발로 오히려 역효과를 내고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전남지사 선거도 함께 치르는데 여권 핵심부에선 누구 하나 신경쓰는 기색이 없다. 지금처럼 호남을 호주머니에 있는 물건인 양 여겼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광주의 한 의원도 “김대중 전 대통령(DJ)은 영-호남 화합을 위해 영남 배려 정책으로 호남을 역차별시키더니 노 대통령은 호남의 전폭적인 지지에도 출범 초기부터 호남 소외로 일관하고 있다”고 여권 핵심부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이들처럼 ‘호남 홀대론’을 토대로 한 ‘김혁규 불가론’은 아니더라도 노 대통령의 선택에 이의를 제기하는 의원들도 적지 않다.
신중식 김성곤 김동철 김태홍 유선호 의원 등은 “노 대통령의 뜻을 알고 있지만 참여정부 2기의 성공적인 국정운영을 위해 김 전 지사의 총리 임명에 대해 당내의 공론화 과정을 거치는 등 보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호남 의원들은 특히 최근 광주 출신인 신일순 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대장) 구속을 계기로 여권 핵심부가 호남 군맥에 대한 정리에 들어갔다는 루머와 김 전 지사 총리 지명, 또 지난 5월27일 단행된 검찰 고위직 인사에서 부산-경남(PK) 인사들이 요직을 차지한 것이 대비를 이루며 지역내 여론이 급격히 악화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 노 대통령의 핵심측근으로 호남의 새로운 ‘맹주’로 기대를 모았던 염동연 의원이 여권내 인사문제를 다루는 핵심요직인 정무조정위원장직을 돌연 고사한 배경을 놓고서도 뒷말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영남권 일부 여권 인사들이 추진중인 영남발전특위에 대한 호남권의 반발도 거세다. 영남특위는 노 대통령의 핵심측근인 이강철 열린우리당 국민참여운동본부장이 지난 5월23일 부산에서 조경태 의원 이철 전 의원 이호철 전 청와대 민정비서관 등과 회동한 자리에서 과거 99년 노 대통령이 주도했던 동남발전특위와 비슷한 성격의 조직에 대한 필요성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논란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호남 의원들은 영남발전특위 추진설이 보도되자 “좌시하지 않겠다”(강기정 의원)며 맹비난하고 나섰다. 신중식 의원은 “40년 동안 이 나라를 지배하고 국부의 50%를 점하고 있는 영남이 또 지역발전을 빌미로 특위를 구성하겠다는 것은 소가 웃을 일”이라고 독설을 퍼부었고, 주승용 의원도 “가뜩이나 호남 민심이 안 좋은 상황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 영남발전특위 추진은 시기적으로 잘못됐다”고 비판했다. 지병문 의원도 “표도 주지 않은 영남권을 배려하기 위해 당 차원에서 특위를 만드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면 표를 몰아줬던 호남에는 어떤 배려를 해야 하는가”라고 반문하기도.
호남권의 이같은 움직임에 영남 그룹도 ‘일전불사’의 태도로 맞서고 나섰다. 영남 그룹은 특히 총선 이후 열린우리당 지도부를 호남 출신들이 완전히 장악하면서 영남권의 소외감이 더욱 심화되고 있는 와중에, 김 전 지사의 총리 지명을 호남쪽에서 문제삼고 나선 것을 격렬히 비판하고 있는 상황.
PK의 한 의원은 “PK 재-보선이 한창인 와중에 여당 의원이라는 사람들이 야당의 정치공세에 동조해 김 전 지사를 공격하는 것은 전투중인 장수의 등에 대고 화살을 쏘는 것이다. 김 전 지사를 반대하려 했다면 열린우리당 입당과정에서 했어야 했다. 만약 지역감정 논리에 따라 인준이 부결된다면 당을 함께 할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또다른 PK 출신 의원(비례대표)은 ‘김혁규 불가론’에 대한 호남 출신 당 지도부의 미온적인 대처를 문제삼았다. 그는 “당 지도부가 한나라당의 김 전 지사에 대한 공세에 반박 논평 하나 제대로 안 내는 등 수수방관하다 문제를 키웠다. 심지어 원내대표 경선에서 영남 의원들이 천 대표를 지지하지 않았다고 지도부가 김 전 지사 문제에 손을 놓고 있는 것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온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당 지도부가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얻은 것을 자기들의 공로로 생각하고 있다면 착각이다. 김 전 지사에 반대하는 의원들도 자신들의 금배지가 자신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노 대통령이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며 거대 야당과 맞선 결과물이란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성토했다.
영남 그룹은 또 영남발전특위에 대한 호남권의 반발에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조경태 의원은 “DJ 시절 ‘동진(東進) 정책’에는 박수를 치더니 지금은 왜 말이 많은지 모르겠다. 더구나 공식적으로 추진방침이 나온 것도 아니고 몇몇 인사들이 6·5 재-보선 이후 본격적으로 한번 논의해 보자고 한 것을 갖고 ‘지역차별’ 운운하는 것은 한마디로 난센스”라고 반박했다.
청와대는 영-호남 그룹간 갈등이 격화되자 당혹감 속에 사안별로 시시비비를 가리겠다는 입장이다. 우선 총리 문제에 대해선 ‘재고 불가’ 입장을 분명히 하며 ‘진압’에 나섰다. 총대는 대통령 정치특보로 당내 노 대통령의 메신저 역할을 하고 있는 문희상 의원이 멨다.
문 의원은 “만약 김 전 지사의 총리 인준 문제가 잘못되면 원내대표를 비롯, 누구라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고 말해 지도부와 ‘김혁규 불가론자’를 동시에 압박했다. 노 대통령 역시 29일 열린우리당 17대 국회의원 당선자, 중앙위원과의 만찬을 통해 김 전 지사 총리 지명 방침에 변함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청와대는 영남발전특위 문제에 대해선 논란의 단초를 제공한 인사들에 경고 메시지를 발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열린우리당내 노 대통령의 핵심측근은 “경위야 어쨌든 영남발전특위 논란으로 영-호남간에 불필요하게 갈등이 깊어진 것은 사실이다. 노 대통령이 영남 그룹에 섣부르게 특위 운운하며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는 뜻을 전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노 대통령은 측근으로 분류되는 일부 인사들이 이른바 ‘노심’(盧心) 논란의 당사자로 구설에 오르는 것을 대단히 불쾌해 하고 있다. 최근 발생한 원내대표 경선 개입, 영남발전특위 논란이 이에 해당한다”고 말해 주목을 끌었다. 이 측근이 언급한 인사가 영-호남을 대표하는 노 대통령의 시니어 핵심측근인 이강철 본부장과 염동연 의원이기 때문. 특히 최근 두 사람 간에는 ‘반목설’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는 터라 최근 여권내 영-호남 갈등과 관련해서도 여러 추측을 낳고 있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