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반적인 상황을 고려할 때 대통령이 언젠가는 나설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 이렇게 강한 메시지를 내놓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16일 국무회의에서 세월호 특별법에 대해 “대통령이 결단 내릴 사안이 아니다”며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사진제공=청와대
“매일 오전 정무수석과 국정기획수석, 홍보수석 등이 모이는 일종의 상황 점검회의에서도 대통령의 모두발언 내용이 사전에 공유되지 않았다고 들었다. 대통령께서 끝까지 원고를 직접 고치는 스타일이라 사전에 발언 원고가 나오는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핵심 수석들 사이에서도 분위기가 사전에 공유되지 않았다는 점은 특이한 일이다.”
박 대통령이 그 정도 수준의 발언을 쏟아낼 것을 사전에 알았던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을 것임을 추정케 한다. 이는 동시에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기존의 불개입 원칙을 깨고 작심 발언을 토해 낸 게 전적으로 박 대통령의 판단의 결과이며, 박 대통령의 승부수임을 보여준다.
여당 쪽에서 들리는 얘기도 다르지 않다. 새누리당 역시 사전에 분위기를 감지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한 새누리당 중진 의원은 “대통령이 세월호특별법 논란에 대해 입장을 밝힐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었지만, 당 내에서는 ‘추석 전 결행설’에 더 무게가 실려 있었다”고 전했다.
박 대통령이 추석연휴와 정기국회 개회를 앞두고 규제 개혁 등 경제 살리기 행보에 총력을 기울였던 만큼 세월호특별법 논란도 서둘러 진화에 나설 것으로 봤다고 한다. 이 의원은 “5일이나 됐던 추석연휴를 여론 정리 기간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도 세월호특별법 논란을 먼저 마무리하는 게 필요했다”며 “당에서도 추석 전 대통령이 원칙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는 건의를 여러 경로로 청와대에 전달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박 대통령은 여권 관계자들의 예상과 달리 왜 하필 이 시점에 정면돌파 승부수를 던졌을까. 박 대통령을 오랫동안 지켜봐 온 인사들은 세월호 문제에 관한 한 박 대통령이 웬만하면 직접 나서지 않으려 했던 것 아니냐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세월호특별법 제정과 진상 규명을 둘러싼 논란이 참사 당일 자신의 7시간 행적 논란으로 변질되고, 급기야 국회가 마비되는 사태로 치달았지만 웬만하면 자신이 칼자루를 쥐고 상황을 정리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2012년 대통령선거 당시 박 대통령 선거캠프에서 활동했던 한 인사는 “눈물의 대국민 담화도 있었지만, 박 대통령이 단일한 사안에 이번처럼 여러 차례 사과와 유감의 뜻을 밝힌 적은 없었다”며 “300명이 넘는 승객들이, 더구나 채 피어보지도 못한 어린 청춘들이 희생된 세월호 참사만큼은 갈등과 충돌 없이 원만하게 해결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세월호 수습뿐 아니라 경제, 안보 등 국가 운영 전반을 책임져야 하는 대통령 입장에서는 왜 진작 나서서 비생산적인 논쟁을 끝내고 싶지 않았겠느냐”고도 했다.
이재오 의원(오른쪽)은 17일 세월호 특별법 협상과 관련 “쪽박까지 깨면 안된다”며 청와대와 당지도부를 비판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추석연휴 전까지 고 김유민 양의 아버지 김영호 씨의 단식이 이어졌던 게 박 대통령을 나서지 못하게 만든 요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한 정치평론가는 “유족들의 단식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박 대통령이 이번과 같은 발언을 쏟아냈다면 대통령과 유족들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모양새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추석연휴 이후에도 여야 대치가 이어지고, 심지어 야당 내에서 협상을 이끌었던 박영선 원내대표가 사퇴·탈당 논란에까지 휩싸일 정도로 입지가 축소되자 박 대통령이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게 됐다는 얘기다.
이 정치평론가는 “정치권에만 맡겨뒀다간 정기국회 공전 사태가 언제 끝날지 기약할 수 없고, 정부 예산안과 각종 법안 처리에도 큰 차질을 빚을 것으로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9월 20일부터 캐나다 국빈 방문과 유엔 총회 참석차 순방길에 오른 박 대통령이 사전에 국내에서의 논란을 정리하려 했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박 대통령의 정면돌파 시도가 장고 끝의 결론이라는 데에는 큰 이견이 없지만, 과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전망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세월호특별법에 발목 잡힌 국정을 정상화하겠다는 박 대통령의 승부수가 오히려 갈등 격화와 그로 인한 국정 파행 장기화라는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우선 박 대통령이 정치권을 국민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방기하는 집단으로 싸잡아 비판하면서 ‘세비 반납’까지 거론한 것에 대해 여당 내에서도 반발이 공개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다. 한 새누리당 고참 당직자는 “대통령은 ‘세월호특별법을 결단하라’는 유족들의 요구를 3권 분립 원칙을 흔드는 요구라고 비판했지만, 오히려 자신이 국회를 무시하고 3권 분립을 훼손하는 듯한 이미지를 주게 됐다”고 지적했다.
이 당직자는 “특히 국무회의 당일 여당 대표와 원내대표, 정책위의장, 원내수석부대표 등 핵심 지도부 전원을 청와대로 불러들인 것은 패착 중의 패착”이라며 “여당이 무력하게 비쳐짐으로써 결과적으로 앞으로도 계속 대통령이 야당과 유족들의 타깃이 될 수밖에 없게 됐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매정한 권력’의 이미지를 갖게 된 것도 두고두고 부담이 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새누리당 내에서조차 비박계 이재오 의원이 공개 회의석상에서 “제 정신이냐”는 격한 말로 청와대를 비난한 데 대해 수긍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친박계의 한 원외 인사는 “박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에 대해 조선, 중앙, 동아일보 등 보수적인 신문들이 일제히 사설, 칼럼을 동원해 비판을 쏟아낸 것은 예사롭게 봐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면서 “유족들의 요구사항을 다 수용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그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모습을 보여줬어야 했다”고 말했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