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재보선의 참패에 대해 열린우리당의 비당권파와 중도파 등이 신기남 의장(사진)을 비롯한 현 지도부의 사퇴를 공론화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종현기자 | ||
열린우리당이 네 곳의 광역단체장 선거(부산-경남-전남-제주)에서 모두 패배하고, 19개 기초자치단체장 선거에서도 겨우 세 곳에서만 이기는 참담한 스코어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당초 기대했던 영남권 교두보 확보에 실패한 것은 물론 4·15 총선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았던 호남, 제주에서도 완패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정치권에선 이번 재-보선 참패를 ‘예고된 `재앙’으로 진단하고 있다. 열린우리당이 총선 이후 50여 일간 원내 과반 의석을 가진 ‘책임 여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추는 데 주력하기보다 ▲소모적인 정체성 논란 ▲당권파-비당권파간 대립 ▲개각-차기 총리 지명을 둘러싼 갈등 ▲당청(黨靑)-당정(黨政)간 알력 등이 끊이지 않은 터에 선거 패배는 당연한 귀결이라는 분석이다. 한마디로 총선을 계기로 47석의 ‘미니 여당’에서 1백52석의 ‘공룡 여당’으로 몸집은 커졌지만, 그에 맞는 콘덴츠와 시스템은 마련하지 못하면서 빚어진 결과라는 게 공통된 지적이다.
재-보선 패배에 따른 여권내 ‘후폭풍’은 이미 본격화된 상황이다. 당장 열린우리당내에선 신기남 의장 등 현 지도부가 진퇴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데다, 비당권파들도 조기 전당대회 개최를 통한 새 지도부 선출을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 경우 그동안 당권파 독주 양상을 보였던 열린우리당내 계파간 역학관계에도 변화가 불가피할 것이며, 그 방향은 외형상 관리형 지도부의 출범을 통한 노무현 대통령의 친정체제 강화가 될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PK(부산-경남) 재-보선 참패를 계기로 노 대통령이 김혁규 상임중앙위원(전 경남지사)의 차기 총리 지명을 재고할 것이란 예상이 나오고 있는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6월7일 현재 여권 내에서 김 위원이 총리직을 고사해야 한다는 주장이 확산되고 있고, 당사자인 김 위원도 용퇴 의사를 밝혔기 때문. 경우에 따라선 여권 핵심부의 진용이 송두리째 바뀔 수도 있다.
먼저 열린우리당 내에선 지난 1월11일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현 지도부가 재-보선 참패의 책임을 지고 모두 물러날 것이란 예상이 일반적이다. 선출직 상임중앙위원 5인 중 이미 정동영 전 의장이 사퇴한 데다, 신 의장도 “곧 거취를 결정하겠다”며 장고에 들어간 상태다.
비당권파를 중심으로 한 조기 전당대회 개최 요구도 확산일로다. 이미 6월3일 김근태 전 원내대표와 이해찬 장영달 임채정 유재건 의원 등 중진들이 회동을 통해 “당 지도부가 당 전반에 통제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지도부 교체 필요성을 거론한 데 이어, 재-보선 결과가 나오자 이를 공론화할 태세를 보이고 있다. 중도파와 개혁당 그룹도 이에 적극 공감하고 나섰다.
▲ 임채정의원 | ||
차기 지도부의 성격과 당 의장 후보군에 대한 논의도 서서히 확산되고 있다. 가장 유력한 후보로는 한명숙 상임중앙위원이 부상하고 있다. 한 위원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서 여성부-환경부 장관을 지낸 경륜에다 ▲여성이면서 이북 출신(평양)에 수도권에 지역구(경기 일산 갑)을 두고 있는 점 ▲당청간 정책 가교역인 국정과제 수행특별위원장을 맡고 있어 관리형 대표로는 적임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임채정 의원도 당 의장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4선인 임 의원은 2002년 당시 민주당 정책위 의장을 지낸 후 노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엔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을 맡아 무난히 역할을 해낸 바 있다. 임 의원은 특히 당내 중진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데다 균형감각을 갖췄다는 평가가 강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김혁규 상임중앙위원의 거취도 권력지형 변화의 주요 관전 포인트다. 김 위원은 5월 초순 이후 노 대통령 등 여권 핵심부가 사실상 차기 총리에 내정됐음을 직-간접적으로 표명해 왔지만 이번에 PK지역 재-보선에서 참패하면서 여권내 입지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 김 위원은 특히 재-보선 다음날인 6일 청와대에서 노 대통령을 단독 면담해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누가 되지 않고 당에 도움을 주기 위해 저에 대한 총리 지명 방침을 철회해달라”고 밝힌 것으로 알려져 이에 대한 노 대통령의 수용 여부가 주목되고 있다.
김 위원으로선 자신의 총리 지명 문제로 야당은 물론 열린우리당 내에서도 반대기류가 형성된 데다, 이번에 그가 진두지휘한 PK지역 재-보선에서 참패하면서 마음이 흔들린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당내 호남 의원들이 전남지사 선거 패배 원인으로 `김혁규 총리’ 지명 문제를 거론하고, 이 같은 기류가 총리 인준 때까지 이어져 인준안이 부결되는 상황이 벌어질 경우 자신은 물론 노 대통령에도 크나큰 타격이 되리란 점을 염두에 뒀을 것이란 분석이다.
노 대통령이 김 위원의 총리직 고사를 받아들일 경우 대안으론 차기 당 의장 후보로도 거론되고 있는 한명숙 열린우리당 상임중앙위원과 현재 총리 대행직을 수행중인 이헌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전윤철 감사원장 등이 거명되고 있다. 그러나 총리 지명 시기가 늦춰질 경우 뜻밖의 인물이 낙점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 한명숙의원 | ||
그동안 지도부 못지 않은 파워를 행사해온 노 대통령의 시니어 측근그룹의 핵심인 문희상 의원과 염동연 의원, 이강철 국민참여운동본부장의 향후 입지도 관심사. 먼저 노 대통령이 대통령 정치특보직을 폐지하면서 졸지에 자리를 잃게 된 문 의원은 열린우리당 지도부가 개편될 경우 영향력이 오히려 강화될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문 의원은 `김혁규 총리’ 논란을 거치면서 당내 소장파로부터 “(청와대에서 파견한) `총독’이냐”는 등의 비판을 받아왔지만, 노 대통령의 신임이 여전한데다 현실적으로 `노심(盧心)’을 전달할 다른 창구가 없는 만큼 메신저로서의 역할에 변함이 없을 것이란 분석이다. 당내 일각에서는 지금처럼 당청간에 `엇박자’가 그려지는 상황을 막기 위해선 아예 문 의원을 차기 지도부에 포함시켜 혼선을 방지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반면 재-보선 기간 영-호남 갈등의 중심축으로 자리잡으면서 불필요한 논란을 불러일으킨 염 의원과 이 본부장은 향후 여권내 입지가 예전보다 축소될 것이란 관측이 많다. 염 의원의 경우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경선 개입과 민주당과의 합당론을 제기해 영남그룹의 반발을 사고 있고, 반대로 이 본부장은 `영남발전특위’ 문제를 언급해 호남그룹으로부터 격렬한 성토를 받았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도 두 사람의 여권내 역할에 대한 논란이 증폭될 경우 자칫 `비선 정치’란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출신 한 초선 의원은 “노 대통령은 재-보선 패배에 염 의원과 이 본부장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생각인 것으로 안다. 대통령의 측근이면 누구보다 더 운신에 조심했어야 함에도 두 사람이 쓸데없는 행동으로 좋지 않은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특히 노 대통령이 정치특보직까지 없애면서 당정분리를 선언한 만큼 두 사람이 불필요한 오해를 사는 일을 더 이상 해선 안된다는 것이 대통령의 확고한 뜻”이라고 말했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