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학자 손경희 씨가 조선 시대 하층민 여성들의 엽기적인 삶을 재조명한 책 <조선이 버린 여인들>. | ||
판관들에게 강간당한 무심
무심은 국가의 제사를 맡는 신성한 관청인 봉상시의 계집종이다. 그런데 파렴치한 고위 관료들이 야음을 틈타 무심의 숙소를 드나들었다. 무심은 이게 노비의 삶이려니 생각하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묵묵히 이를 견뎠다. 그러던 중 한 시기에 이중, 박여, 민규 등 세 명의 남자가 하루 걸러서 무심과 자는 일이 벌어졌다. 무심을 강간한 세 사람은 모두 국가의 제사를 관장하는 관리(판관)였다.
무심은 젊진 않았지만 아름다웠다. 그녀는 세종 때 시녀로 내전에 들어갔다가 쫓겨난 이력이 있다. 궁궐에 들어간 여자는 모두 임금의 상대가 될 수 있기에 다른 남자가 가까이할 수 없었다. 궁궐을 나온 뒤에도 마찬가지다. 판관들은 이 사실을 알고도 무심의 육체를 탐했다.
1450년(문종 즉위) 12월 무심의 간통 사건은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판관이 궁녀였던 무심을 탐한 사실이 탄로 날까 두려워서였는지, 아니면 질투심 때문이었는지 세 사내 중 이중이 관아에 ‘박여가 무심과 간통했다’고 고발한 것. 자기가 살기 위해 남을 먼저 도마에 올렸던 셈이다.
문종은 즉시 사헌부에 사건을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박여는 처음에는 부인했으나 고문을 하려 하자 사실을 실토했다. 그런데 구속될 일이 명확해지자 박여가 어느새 도망을 갔다.
이렇게 간통사건이 확대되자 이번에는 민규가 겁에 질렸다. 게다가 박여의 죄를 추궁하는 자리에 참고인으로 불려온 계집종들은 판관 민규가 봉상시의 주부가 되었을 때부터 계집종 무심, 가석, 노미치 등 세 명을 강간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박여도 동료들을 연루시켜 자신의 죄를 가볍게 하려 했다. 그 또한 조사를 받으며 민규의 일을 자세히 고발했다. 결국 무심을 강간한 관리 세 명 중 두 명이 잡혀 들어왔다.
이런 와중에도 ‘밀고자’인 이중은 관직 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나 사헌부에서는 이중도 의심스럽다고 조사하길 요청했다. 그러나 문종은 사건이 더 확대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문종은 이중이 무심을 강간한 사실에 큰 무게를 두지 않았다. 민규 또한 그즈음 문종에게 죄를 용서받았다. 그는 왕실 친척이었던 것이다. 민규와 이중은 벼슬길에서도 물러나지 않았다. 다만 박여만 도망 중이었다.
사실 무심만 판관들의 노리개가 된 것은 아니었다. 다른 여종들도 한 번씩은 판관들에게 안겨 ‘악기 소리’를 냈다. 유독 무심에게만 성욕을 넘어 부드러운 관심이 생겨나 이들 간에 감정싸움을 불렀을 뿐이다. 당시 세상은 이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사대부들의 기생 쟁탈전
기생 출신 홍행은 아름답고 뜨거운 여인이었다. 홍행은 원래 송림부정(종삼품 벼슬) 이효창의 기생첩이었으나 그의 그늘에 머물기에는 그녀의 미모가 너무 반짝거렸다.
1479년(성종 10년) 7월 이효창의 친척인 이원이 이효창이 잠시 집을 비운 사이 찾아와 홍행과 간통을 저질렀다. 이원은 정희왕후의 친조카였는데 평소 행동이 굉장히 잡스러웠던 터라 이 일로 단번에 파직 당했다. 그로부터 3년 뒤 이원은 조정에 또다시 풍파를 일으켰다. 기생 홍행을 사이에 두고 길거리에서 사대부인 김칭과 대판 싸운 것이다. 당시 홍행은 김칭의 첩이었다. 싸우는 과정에서 김칭이 이원의 왼손을 깨물어 큰 상처를 냈다. 홍행이 ‘남편’을 보호하느라 이원을 껴안아 붙든 사이 김칭이 공격에 성공한 것이다.
이원은 왕실의 사람이고 김칭은 부평부사를 지낸 사람이었다. 고관대작들이 일반 평민이 다 쳐다보는 길거리에서 서로 치고받고 싸웠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조정은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홍행의 두 번째 남편 김칭은 유명한 난봉꾼이었다. 일종의 ‘카사노바’에 가까운 행적을 보였다. 그런 김칭이 기생 홍행을 찾아온 또 다른 난봉꾼 이원과 길거리에서 몸싸움을 벌인 것이다. 1482년(성종 13년) 1월 아침, 신하들이 정사를 아뢰는 자리에서 대사헌 김승경이 이 문제를 꺼냈다. 김승경은 김칭을 구속하고 이원을 국문하도록 청했다. 이 일로 김칭은 귀양을 떠났고 이원은 관직의 임명장이자 신분증이라고 할 수 있는 직첩을 거두고 지방으로 보냈다.
홍행에게 다가온 또 한 명의 남자는 노비 소송을 관장하는 관리였던 현준이었다. 그는 어머니 삼년상이 끝나기도 전에 홍행의 집에 하룻밤 머물렀다. 현준은 용렬한 인물이었다. 홍문관에서 무능하고 탐욕스러운 관료들을 골라내 ‘살생부’를 만들어 임금에게 제출한 일이 있었는데 현준은 ‘무능한’ 사람으로 명단에 올라 있었다.
홍행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 이런 못나고 찝찝한 인간이 향불이 꺼지기도 전에 음욕을 품고 날 괴롭힌단 말인가.’ 시달리기 싫었던 홍행은 딱 한 번이라는 마음으로 그를 받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이 일이 성종의 귀에 들어갔다. 그런데 왕에게 보고된 내용은 전혀 엉뚱한 것이었다. 기생 홍행의 아들이 사헌부 대사헌 김승경의 소생이라는 다소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홍행을 두고 김칭과 이원이 벌인 싸움을 왕과 논의했던 당사자가 김승경이었기 때문이다.
실상은 이랬다. 사실 김승경은 그간 홍행에 눈독을 들여왔고 어느새 긴 밤을 보내는 사이로 발전해 있었다. 홍행의 미모는 세월이 흘러 완숙미를 더해 깐깐한 사헌부의 총책임자를 유혹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둘 사이에 현준이라는 자가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대노한 김승경이 현준에게 “네가 홍행과 잤다는데 이미 내가 그 집에 출입하고 있음을 몰랐단 말이냐”라고 다그쳤다. 이에 현준이 “대감께서 그리 은밀하게 다녀가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겁 없이 상전을 비꼰 셈이다. 예민한 김승경이 이 말에 상처를 받아 현준을 상중에 여자와 잤다는 이유로 잡아들여 심하게 추핵했고, 이 과정에서 현준의 아내 이 씨가 홍행이 낳은 아이가 김승경의 자손이라고 상언을 함으로써 그간의 과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던 것이다.
그러나 홍행이 아이가 대사헌 김승경의 아들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성종이 “홍행의 아이 아비를 정하는 것은 어려우니 내버려두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다만 홍행만 동시에 두 남자와 간통한 기생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부자가 모두 첩 삼은 파독
태조 이성계의 부름을 끝내 거부한 고려 말의 중신 박침은 아내 복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다. 첫째 부인은 아들 두 명을 낳고 39세에 세상을 떠났다. 아내보다 한 살 어렸던 박침은 38세의 한창 나이였기 때문에 곧바로 재혼했다. 두 번째 부인인 곽 씨는 곧이어 아들을 둘이나 낳아 박침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아버지 박침이 젊은 아내에 탐닉하고 있을 때 그의 아들 박저생이 파독을 취해 첩으로 삼았다. 천한 계집종 출신이었던 파독은 얼굴이 해맑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세상은 이 아름다운 여인을 그냥 두지 않았다.
박저생은 상당한 문제아였다. 성격이 과격한 그는 밥을 먹다가 질투하는 아내를 고기 굽는 틀로 마구 때려 동네가 떠들썩할 정도로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처럼 박저생은 계속 여자 문제를 일으켰는데 가장 큰 사건이 바로 파독을 둘러싼 사건이었다.
마당의 꽃들이 지칠 정도로 더운 어느 날 시아버지 박침은 ‘며느리’인 파독을 불렀다. 시아버지의 갑작스런 부름을 받고 파독은 얼른 달려갔다. 파독은 평소와는 달리 방으로 들어오라는 얘기에 의아했지만 이윽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시아버지는 날씨가 덥다면서 윗저고리를 풀어헤치고는 아들의 행방을 물었다. 파독은 남편이 집안일로 다른 곳에 출타했다고 대답했다. 그때 시아버지 박침이 파독을 자리에 넘어뜨리고 가슴을 풀어헤치면서 안섶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발버둥을 치면서 소리를 질렀지만 한낮 집 안은 텅 비었고 사랑채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파독은 파들파들 떨면서 옷가지로 몸을 가린 채 크게 울지도 못했다.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범한 ‘파독 사건’은 세상의 이목을 끌지 못하고 곧 잊혔다. 시아버지인 박침이 파독을 첩으로 삼아버렸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 첩을 빼앗긴 박저생은 더욱 성격이 흉악해졌다. 그러다 아버지 박침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게 된다. 박저생은 그렇게 원하던 파독을 다시 첩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