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연테이프 중의 하나라고 주장하는 ‘동학란’. | ||
김 전 대통령을 상대로 소를 제기한 사람은 출판 및 음반 제작업체를 운영하는 고춘남 씨(63). 고 씨는 지난해 10월 2일 서울 서부지방법원에 김 전 대통령을 상대로 3억 7284만 원을 청구하는 소장을 제출, 법원의 심리가 진행 중인 상태다. 고 씨에 따르면 김 전 대통령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하게 된 것은 지난 1980년대 DJ가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고 있을 당시 DJ 본인 및 측근의 부탁을 받고 그의 강연 테이프를 제작·배포한 것이 발단이 됐다. 고 씨는 소장에서 당시 이 일로 인해 “중앙정보부 등 정보·수사기관에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해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겪어왔다”며 “회사 운영까지 방해를 받아 집안이 파탄 났고 현재까지도 극심한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는 상태”라고 밝혔다. 이후 DJ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테이프 제작비용 및 약속한 대가를 요구했으나 DJ 측이 줄곧 이를 외면해왔다는 게 고 씨의 주장이다. 고 씨는 5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소를 제기하기 전까지 DJ는 물론 그의 측근들과 계속 접촉을 시도하며 과거 그쪽에서 약속했던 대로 적절한 보상을 요구했으나 DJ 측에서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보상책임을 미루는 등 사실상 보상을 받을 길이 없다고 판단, 법에 호소하게 됐다”며 소송 배경에 대해 밝혔다.
고 씨에 따르면 사건의 발단은 1980년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 씨는 ‘○○예술사’라는 출판음반제작 회사를 운영하던 중 DJ의 측근이자 동향 선배로 가깝게 지내던 K 씨로부터 긴요한 부탁을 받게 됐다고 한다. “선생님(DJ)께서 일본에서 납치된 이래 국민과 접할 기회가 없으니 선생님이 앞으로 강연하실 내용을 녹음테이프로 제작해 배포하게 도와달라”는 부탁이었다. 이 작업은 DJ 주변에 대한 정보기관의 감시가 삼엄하던 당시 시대상황상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고 씨는 처음에 부탁을 거절했다고 한다.
하지만 몇 번을 거절했음에도 K 씨는 “이 일을 하겠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선생님이 곧 연금에서 풀려나오게 될 테니 제발 만들어달라”고 거듭 부탁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테이프 제작비용을 포함한 추후 사례에 대한 얘기도 ‘당연히’ 거론됐다는 것. 당시 부안지구당 위원장을 맡고 있으면서 DJ 측 핵심인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K 씨는 “선생님이 앞으로 대통령에 당선되면 테이프 값은 물론, 박정희의 5·16 혁명공약을 인쇄한 광명인쇄 이학수 사장이 1960년 5·16 이후 정부 인쇄물을 20년간 독점했던 것처럼 특혜를 주고 문공부 장관도 보장해준다고 확실하게 약속하셨다’며 간곡히 설득을 했다고 한다.
당시 월평균 1500만 원 이상을 벌며 뭐 하나 부러울 것 없던 고 씨로서는 사실상 모든 것을 걸고 진행해야 되는 작업인 만큼 결심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고 씨가 결심을 굳히게 된 것은 얼마 후 DJ를 직접 만나고부터. 고 씨에 따르면 동교동 자택에서 DJ가 자신의 손을 잡으며 “시국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으니 고 동지가 발 벗고 도와줘야겠네”라고 부탁을 했고 마침내 고 씨가 DJ의 요청을 수락할 뜻을 전하자 “고 동지가 전국 대학생들이 하는 역할보다 더 큰일을 하네. 고맙네. 이에 대한 대가는 내가 결코 잊지 않고 반드시 하겠네”라고 약속했다는 것.
당시는 워낙 살벌한 군사정권 시절이었기에 고 씨는 DJ 강연 테이프 제작비용이나 추후 사례금을 명시하는 일종의 이면계약서 등 ‘증거’를 남길 생각은 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당시 신군부에게 눈엣가시와 같던 DJ와 접촉하고 테이프를 제작한 사실이 발각되면 생업이 파탄 나는 것은 물론 가족이 겪을 고초도 불 보듯 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DJ 측에서 ‘이름이 새어나갈 염려가 없으니 안심하라. 정 겁나면 테이프에 회사이름도 넣을 필요 없다. 단 비매품이라는 문구를 넣어 제작해달라’고 부탁했으며 심지어 DJ가 테이프 제작에 대한 감사와 사례에 대한 문구를 직접 자필로 써주기도 했지만 그것마저 나중에 문제 될까 싶어 버렸다는 것이 고 씨의 얘기다.
큰 사업체를 운영하며 넉넉한 자금을 갖고 있던 고 씨는 DJ의 부탁에 따라 자비를 들여 무려 9만 3210개의 강연 테이프(개당 4000원)를 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고 씨가 제작한 이 테이프는 당시 DJ의 직계 최대 조직이었던 ‘한국정치문화연구소’ 조직원에게 전달돼 전국과 해외로 배포됐다는 것. 한국정치문화연구소는 당시 DJ의 최측근 인사였던 김상현 의원이 소장, 박정훈 의원이 부소장으로 있던 단체였지만 그 리더는 DJ로, 사실상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를 목표로 결성된 조직이었다는 게 고 씨의 얘기. 고 씨는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는 인물로 김상현, 김옥두, 김진배, 한화갑, 박정훈, 이 협, 박 실, 손주항, 박종률, 백청수, 문희상 씨 등을 거론하면서 이들이 사인한 사실확인서를 증거로 내세우고 있다.
이밖에도 당시 연구소 총무부장을 맡았던 한 인사는 “1980년 계엄정국의 합동수사본부가 언론을 통제하던 당시, ‘한국정치문화연구소’에서는 DJ가 과거 중앙정보부의 공작으로 일본의 한 호텔에서 납치돼 현해탄에서 수장될 뻔한 내용이 포함된 시국강연 테이프를 보급했으며, 고 씨는 그 테이프를 제작해 납품했다. DJ의 지시로 연구소는 이 테이프를 전국의 조직을 통해 배포했는데 80년 5월 17일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동지들이 구속되거나 피신하면서 조직이 와해돼 고 씨에게 테이프 대금을 지불하지 못했다”고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실제로 5·18 민주항쟁이 일어나기 하루 전 DJ는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됐고 한국정치문화연구소도 강제 폐쇄되고 만다. 연구소에 소속된 정객들 역시 구속되거나 피신하는 처지가 됐으며 고 씨 또한 녹음테이프를 제작했다는 이유로 중정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중정 수사관들이 고 씨의 회사에 난입, 시가로 1억 7000만 원 상당의 기자재를 부숴버려 2년 동안 회사를 운영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는 것. 또한 이를 만류하는 과정에서 고 씨의 부인마저 수사관들에게 척추에 금이 갈 만큼의 잔혹한 폭행을 당해 현재까지도 걸음이 불가능한 상태라는 것이다.
그 후 고 씨는 우여곡절 끝에 회사를 간신히 복구하여 영업을 재개했으나 1984년 당시 ‘동교동’ 비서실 차장이었던 박종률 전 의원이 찾아와 다시 간곡한 부탁을 했다고 한다. “선생님이 ‘미국의 소리’ 방송에서 대담한,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서는 죽어도 귀국하겠다’는 내용을 테이프로 제작해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고 씨는 녹음테이프 1000개를 제작했고 이것이 또 중정에 발각되어 고 씨는 구속되고 만다. 그리고 중정 수사관들이 간신히 살려놓은 회사에 쳐들어와 당시 시가로 1억 8000만 원 상당의 기자재를 파손시키는 바람에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게 됐다는 것.
가정과 생업이 파탄 나고 모진 고문으로 인해 반불구의 몸이 되어버렸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고 씨는 대중으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고 있던 ‘민주화운동가’ DJ의 연설을 녹음해 국민들에게 알린다는 것에 나름의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신군부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었던 언론기관들을 대신해 국민들의 눈과 귀가 돼주는 일이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앞당기는 도화선이 될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결국 고 씨를 포함한 모든 동지들의 피나는 희생과 노력으로 그 후 DJ는 대통령에 당선된다. 고 씨가 물질적으로 돕던 그의 아들 김홍일 씨도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DJ의 참모들은 대부분 소위 ‘잘나가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시절 자비를 털어가며 위험한 작업을 감수했던 고 씨는 어느새 육체적으로는 불구, 경제적으로는 거지나 다름없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돼 있었다. DJ 편에 서서 수년간 민주화활동을 지원해주던 사업가에서 밑바닥 신세로 전락하고 만 고 씨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었지만 DJ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어느 정도의 사례가 이뤄질 거라 믿었다고 한다. 심지어 ‘DJ의 사람들’의 입에서도 “이제 고 사장도 고생 끝났다”는 말이 흘러나왔다고 한다.
▲ 음반 제작업체를 운영하는 고춘남 씨가 주장하는 DJ 측근 인사들의 사실확인 사인. | ||
고 씨는 “강연 테이프를 만드는 일이 DJ의 측근들의 부탁으로 시작되긴 했지만 그들이 DJ의 직접 지시를 받았던 인물이라는 것은 만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당시 그들은 DJ와 가장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조직에 소속된 인물이었으며 DJ를 최측근에서 보좌하던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테이프 제작은 DJ로부터 직접 부탁을 받고 진행한 작업이었기에 그 일로 인해 내가 입은 피해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 역시 DJ 본인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에 대한 보상은커녕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에 인간적인 배신감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실제로 당시 한국정치문화연구소에 소속돼 있던 몇몇 인사들은 법원에 제출한 확인서에서 “(당시) DJ는 각 대학과 단체에서 강연을 할 예정이니 정치문화연구소와 민주헌정동지회 등 자신을 추종하는 모든 조직이 강연녹음테이프와 강연내용이 수록된 책자를 많이 보급해야 군부독재를 종식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들은) DJ의 지시를 받고 고 씨를 적임자로 포섭, 회유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DJ 측의 입장은 어떨까. ‘동교동’ 측 최경환 공보비서관은 이번 소송 건에 대해 ‘금시초문’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그런 사실이 있나? 김 전 대통령이 관련된 소송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은 전혀 모르는 일이다. 고춘남이라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이다”라는 것이 최 비서관의 답변이었다.
하지만 고 씨는 “내가 DJ 측에 보낸 내용증명만도 10장이 넘는데 모른다는 게 과연 말이 되느냐. 작년 정일영 박사 추도식에 참석한 이희호 여사에게 자료를 직접 주면서 연락을 달라고까지 했는데…”라며 불쾌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최 비서관의 얘기와는 달리 DJ 측은 지난해 11월 H 법무법인을 통해 이 사건에 대한 답변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이 답변서에 따르면 DJ 측 입장은 고 씨의 주장과 상반된다. DJ의 소송대리인인 K 변호사는 답변서를 통해 “DJ는 고 씨에게 녹음테이프 제작을 주문한 적이 없고 그 대가를 약정한 적도 없다”고 밝혔다. “고 씨가 한국정치문화연구소의 주문에 따라 녹음테이프를 제작하였으므로 한국정치문화연구소 측에 테이프 제작비용을 청구해야 하며, (설사) 고 씨의 주장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10년의 소멸시효가 완성되었으므로 법적인 효력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 DJ 측 주장이다.
고 씨는 이에 대해 “DJ와 직접 만난 자리에서 부탁을 받은 사실이 있는 데다가 한국정치문화연구소가 DJ의 최대 지원단체였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수장인 DJ가 책임을 회피할 수 없으며, 특히 해당 연구소가 이미 테이프 제작 직후 중정에 의해 강제 폐쇄됐음을 알면서도 ‘연구소 측으로부터 보상받으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떠넘기기로밖에 볼 수 없다”고 맞서고 있다.
고 씨는 “20년 이상 고통을 받고 있는 내 사정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진심으로 사과하고 응어리진 내 마음을 풀어주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내가 몰라서 그렇게 되었다. 미안하다’고 따뜻한 말 한마디 하는 게 도리다. 하지만 여태껏 DJ는 테이프 제작비는 고사하고 내가 받은 피해에 대해서도 일절 외면해왔다. 오죽하면 내가 전직 대통령을 상대로 법에 호소를 하게 되었겠는가”라고 호소했다.
과연 고 씨가 밝힌 김 전 대통령과의 ‘과거사’는 모두 사실일까. 만약 그렇다면 향후 법원은 고 씨와 김 전 대통령 중 누구의 손을 들어주게 될까. 3월 19일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이 사건의 3차 공판이 열릴 예정이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